상실을 동력으로 삼아 성장하는, 여백으로 가득한 성장 소설...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작농의 피살 사건을 50년도 넘게 기억하는 건 첫째, 살인자가 내가 아는 이의 아버지였고 둘째,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는 나중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p.22)
《안녕, 내일 또 만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후 엄마를 병으로 잃었다. 상실감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새엄마를 맞이하게 된다. 살던 동네를 떠나 새로 살 집을 짓게 되는데, 나는 그렇게 조금씩 형체를 갖춰가는 그 집에 홀로 들르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래 소년 클레터스를 만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만들어지는 하나의 동력은 상실감이고, 또 다른 동력은 성장이다. 아니 어쩌면 상실감이 성장의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함께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나는 클레터스에게 내 힘든 상황을 말하지 않았고 클레터스도 자기의 힘든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늘을 보고 이제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었다 싶으면 우리는 내려가서 “안녕” 그리고 “내일 또 만나”라고 말하고는 황혼 속에서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리고 어느 저녁 이런 평범한 작별인사가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우리는 바로 그 총소리에 의해 갈라졌다.』 (p.62)
당시의 (서로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몰랐지만 클레터스는 부모의 이혼을 겪었거나 겪는 중이다. 어머니와 살고 있으며 아버지는 소작농으로 농장에 아직 머물고 있다. 둘은 거의 매일 만나서 한 동안 함께 앉아 있다가 헤어진다. 나는 죽음으로 어머니를 잃은 다음이고, 클레터스는 이혼으로 아버지를 잃은 다음이다. 정확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 시간들을 통하여 나와 소년은 어떤 위안을 받고 있는 지도 모른다.
“... 나의 내면은 두 명의 소년으로 나뉘게 되었다. 한 소년은 고등학교에 갔고, 성실하게 과제를 수행해 제출했고, 합창단과 토론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시험을 보았으며, 방과 후에도 남아 대수학 선생님과 대화를 했다. 또 다른 소년은 우울하고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늘 다른 사람들이 어서 꺼져주기만 바랐다.” (p.87)
하지만 그 후 갑작스레 그 사건이 발생한다. 클레터스의 아버지 클래런스는 어느 날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바로 옆집 로이드 윌슨을 살해한다. 그리고 자신은 사라졌다가 얼마 후 익사체로 발견된다. 두 소년이 사는 링컨, 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아직 어린 나이인 나에게 그 사건은 아주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의 한 귀퉁이에 클레터스가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성격과 외모가 비슷해지고 똑같은 삶을 살게 된다. 또는 거의 그렇게 된다...” (p.113)
나는 그 사건 이후, 좀더 나이가 들어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우연히 클레터스를 시카고의 고등학교 복도에서 맞닥뜨린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아는 체를 하지 못했다. 이 회고의 소설 첫 부분에서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렇게 지나치고 난 이후 또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그것은 어떤 죄책감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 나는 뒤늦게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뒤졌지만 클레터스는 거기에 없었다.
“자신들이 가정의 일부인지 아니면 가정이 자신들의 일부인지는 아이들이 대답할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이 아니다. 아이는 개를 빼앗기고 부엌을 빼앗겼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오븐에서 나는 맛있는 냄새를 빼앗겼다. 세탁하는 날 나무로 만든 건조대에서 모직물이 마르며 나는 냄새를 빼앗겼다. 재 냄새, 스토브 위에서 지글지글 끓는 수프 냄새를 빼앗겼다. 목초지 울타리에서 끈기 있게 기다리는 늙은 말을 빼앗겼다. 학교가 끝난 뒤 저녁식사 시간까지 바쁘게 해치워야 했던 잡일을 빼앗겼고 이른 아침의 안개, 우듬지에서 싸우는 까마귀 소리를 빼앗겼다.” (p.186)
나는 이 성장의 소설이 꽉 차 있기보다는 상실과 여백으로 구멍 뚫려 있는 소설이라고 느낀다. 나와 클레터스는 만남보다는 헤어짐을 감내해야 하는 소년들이다. 그들은 어머니를 혹은 아버지를 잃는다. 그 상심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서늘해진다. 사건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살인이라는 주요 사건이 있지만 그 세부 묘사는 없다. 특히 제3자인 나에게 그 사건은 구체성을 띠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연히 사춘기 시절의 자신에게 완벽을 요구할 순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토록 오래전 일에 계속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불합리하다. 조금은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클레터스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늘 그러하리라. 하지만 내가 클레터스를 자꾸 생각하는 건 단지 그때 복도에서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클레터스가, 그리고 클레터스가 겪은 일들이 궁금하다...” (p.219)
그렇지만 소설을 읽는 동안 혹은 모두 읽고 난 후, 그 여백을 향하여 오래도록 눈길을 두게 된다.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려 그 형체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거기서 발견하는 형체가 무엇인지를 말하기가 쉽지는 않다. 어쩌면 도통 그 어둠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그만 어둠에 갇혀 헤매고 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발견되지 않은 그 형체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런 소설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니 말이다.
윌리엄 맥스웰 William Maxwell / 최용준 역 / 안녕, 내일 또 만나 (So Long, See You Tomorrow) / 한겨레출판 / 226쪽 / 2015 (1980)
ps. 작가 윌리엄 맥스웰은 <뉴요커>의 소설 편집자로 40년간 일한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가 스승이자 친구의 역할을 한 작가들의 목록에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제롬 샐린저, 프랭크 오코너, 존 치버, 존 업다이크 등이 있다. 그는 일주일 중 삼일은 편집자로 일하였고, 나머지 사일은 소설 등의 작품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