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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미래를 기억한다는 아이러니로 가득한 평범함...

  「이토록 평범한 미래」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p.29) 미래를 기억하라는 아이러니는 테드 창의 중편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네 인생의 이야기〉에는 딸의 미래를 기억하며 사는 엄마가 있다면,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는 딸의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엄마가 있다. (엄마의 생이 다른 것처럼 딸의 생 또한 두 소설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시간의 혼재 혹은 동시성은 작품집에 실린 다른 소설에서도 간간이 눈에 띄었던 것 같은데...


  「난주의 바다 앞에서」

  “... 언제부터인가 그는 세상을 거울이라고 생각해왔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어딘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에 가까웠지만, 그는 늘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모습을 통해 지금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거리의 풍경을 면밀히 살펴보거나 들리는 소리에 자세히 귀를 기울이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p.44) 소설에서 그는 이야기를 하는 쪽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는 쪽이다. 어쩌면 그의 오랜 습관이 어떤 이야기들을 그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야기는 사는 것을 멈추지 않음으로써만 만들어진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진주의 결말」

  “...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p.85) 이 발췌된 문장은 그러니까,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라는 문장의 변형같기도 하다. “그 집에서 살 때, 이 이야기에도 결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빠가 죽어야만 끝나는 그 이야기에서 저는 어떤 결말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아빠가 죽는다는 결말도 안 되고, 아빠가 죽지 않는다는 결말도 안 되니까요. 그러다가 어느 날, 제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끝나버렸어요...” (p.96) 소설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그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딸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이 사건을 방송에서 다룬 범죄 심리학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아빠의 죽음에 이르자 얼핏 독자인 내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기억되는 미래와도 같은...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이를 응시하는 우리 앞에는 우리의 삶과는 다른 삶이, 우리 자신들 그리고 다른 것으로 이뤄져 있는 또다른 삶이 응집되고 해체된다. 완전히 통찰하는 견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의식적이지도 않은 잠자는 사람은 이상한 동물, 기이한 식물, 끔찍하기도 하고 기분좋기도 한 유령들, 유충들, 가면들, 형상들, 히드라, 혼란, 달이 없는 달빛, 경이로움의 어두운 해체, 커지고 작아지며 동요하는 두꺼운 층, 어둠 속에서 떠다니는 형태들, 우리가 몽상이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는 이 모든 신비를 언뜻 본다.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 (p.110, 빅토르 위고 《바다의 일꾼들》 중 재인용) ‘꿈은 밤의 수족관’이라는 표현이라니... 빅토르 위고도 그렇거니와 후지와라 신야의 책이 등장하여 반갑다. 빅토르 위고라니, 그리고 소설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후지와라 신야를 따라 인도를 방랑하면서... “그 무렵 정미는 언젠가 세상의 모든 것은 이야기로 바뀔 것이고, 그때가 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게 되리라고 믿는 이야기 중독자였다.” (p.115)


  「엄마 없는 아이들」

  “... 아버지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친모가 있는 미국에 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아버지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인생에는 있는 법이다. 그렇게 스무 살의 여름을 미국에서 보낸 뒤 그녀는 다시 한국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는데, 뒤에서 말하겠지만 그건 사슴에게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pp.147~148) 엄마가 없는 아이들,인 그와 그녀는 그 해에 연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났다. “... 봄의 울음과 달리 슬픈 감정은 전혀 없었다. 물론 상실감은 있었다. 연극이 끝났다는 것, 더이상의 술자리는 없다는 것, 그리고 엄마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명준은 그렇게 상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 울음은, 말하지만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의 울음이었다.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 없는 첫 여름을 그는 영영 떠나보냈다.” (p.156)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라니...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우리에게는 아직도 지켜볼 꽃잎이 많이 남아 있다. 나는 그 꽃잎 하나하나를 벌써부터 기억하고 있다는 걸 네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뿐.” (p.181)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인지 그 아래에 ‘2014년 4월 16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지. 잘못 쓴 게 아니라면, 이건 십 년 뒤 미래를 기약하는 프러포즈인 것 같다”라는 문장이 덧붙여진다. ‘미래를 기억하는 아이러니’의 또다른 실례로 기억하게 되는 또다른 소설이다.


  「사랑의 단상 2014」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pp.206~207) 마지막에 가서야 이 소설은 세월호와... 누군가는 삼천 명 중의 한 명을, 누군가는 삼 백명 중의 한 명을, 누군가는 서른 명 중의 한 명을, 누군가는 세 명 중의 한 명을, 그리고 누군가는 단 한 명을 잃었으리라...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말했다.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p.244)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바르바라는 한 명이 아니고 동일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관통하는 그 어떤...



김연수 / 이토록 평범한 미래 / 문학동네 / 273쪽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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