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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1. 2024

진연주,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

떠나는 것들의 리듬과 남은 것들의 멜로디가 만들어내는...

  소설 <바깥의 높이>에는 ’나는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보다 어머니가 죽어 있을 때 더 많이 어머니를 생각했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뻔하지만 그 앞에서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떠나는 것들의 리듬과 남은 것들의 멜로디가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음악인지 말인지 단언하지는 못하겠다. 뭐랄까 그러니까 이것은 환청인지도 모르겠다.


  「떠도는 음악들」

  “...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은 어떤 생물. 작고 흰. 흙을 뒤집어쓴 그것은 흙을 털어낼 기력도 없이, 떨 기력도 없이, 단지 놓여 있었는데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만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두려워하는 한편으로 안도하며, 그렇다 하더라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내게 눈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p.22) 그날 밤 내가 본 것을 이 작가가 보았나 싶어, 이 장면에서 숨을 멈추었다. 그날 밤 방으로 돌아와 나는 어떤 음악을 들었더라, 어떤 장면을 틀었더라...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

  “착한 것들과 실없는 농담이나 해가며 하루하루 나이 먹는 일. 오래된 집을 손보는 것처럼 오래된 육신을 돌보는 일. 늙은 개. 더 늙은 개와 덜 늙은 개. 더 늙은 개는 더할 나위 없이 깡말라서 등뼈가 드러나 보인다. 공깃돌 같은 등뼈. 공깃돌보다 작은 등뼈. 늙은 개야, 밥을 먹어라...” (pp.43~44) 늙은 반려의 동물들과 살고 헤어지는 일에 대해 조금 안다. 쇠락의 속도는 다르고 애잔함은 커가고 그러다가 모든 것이 한순간에 툭 끊기고 마는...


  「없어야 할 것이 있게 되는 불상사」

  갑자기 ’불상사‘라는 절 이름은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성서롭지 못한 일, 이라는 불상사의 의미가 있어 어려운가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에는 어머니의 언니, 가 등장하는데 어머니의 언니, 라면 이모를 말하는 것인데, 어째서 이모가 아니라 어머니의 언니, 라고 부를까 생각했다.


  「우리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우리는 소년일 때 만났다. 유우가 소년이었고 내가 소년이었을 때, 아이도 못 되고 어른도 못 되었던 때. 여성과 남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던 때. 여성도 남성도 못 되었던 때. 기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어떤 만남은 너무도 강렬해서 서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 (p.88) 시작은 이러하고 나는 허용되지 않은 서사를 이어간다. 서사는 관능적이고 반짝이지만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시작이 이러한 허용되지 않은 많은 서사들이 그러하듯이...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아무」

  “아무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말의 구조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런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투로, 들을 테면 듣고 말 테면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아무의 말이 어디에서 끝날지 알 수 없었고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알아내기도 어려웠다. 아무의 말을 되뇌며 재배열하다 보면 아무는 곧 다른 말을 이어갔다. 아니 아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어디에서 끝날지 알 수 없는 말에 온종일 이끌려 다녔다. 침묵. 침묵마저 아무는 말의 구조를 허무는 데 사용했다.” (p.110) 아무의 말은, 침묵을 포함하여,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 대신 아무의 말은, 침묵을 잘 포함하면,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아무와 만나고 아무의 말에, 아무의 말과, 아무의 말로, 그러다가 아무의 말을, 죽인다.


  「바깥의 높이」

  “아주 간혹 뜨개질하던 손이 내 이마에 내려앉았다. 한숨 소리도. 그런 날의 한숨 소리는 여느 때의 것과 달랐는데 뭐랄까 땅에 떨어질 것 같은 높이를 끌어 올리여 애쓰는, 말하자면 뭐랄까 무한한 피로와 절대적인 고요 같은 것, 그러니까 뭐랄까 나는, 그래서 나는, 번번이 잘못된 공간에 놓인 것 같은 느낌에 붙들리고 말았다...” (pp.144~145) 소설에는 ’들창‘이 등장하는데, 나는 ’들창‘으로 바다를 내다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영화의 한 장면에서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미지화된 허구의 텍스트 안에서였는지 모르겠다.


  「음표들의 도시」

  “... 그녀는 커다란 나무 밑동에 기대어 앉아 한숨을 내쉬고는 손부채를 부쳐 얼굴을 식혔다. 달아올랐던 얼굴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상상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상상하고 난 후에는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잊었다.” (p.171) 그녀가 당도한 음계의 도시, 그녀가 만난 온음표의 사내, 그녀의 16분음표, 그가 떨어뜨린 4분음표... 그리고 그녀는 그가 말한 비밀을 찾아 길을 나선다.


  「울퉁불퉁한 고통」

  “시간은 빠르게도 느리게도 흐른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인다. 모두 외롭다. 외로움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울고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연애를 하고 어떤 사람은 쇼핑을 하고 어떤 사람은 남을 속이고 또 어떤 사람은 기꺼이 남에게 속는다. 여자의 엄마는 머리를 감겨달라고 했다...” (p.198) 여자의 엄마는 외로웠고 죽었다. 많은 것들을 여자가 끌고 다니는 트렁크가 어쩌면 트렁크가 끌고 당기는 여자가 바라보고 서술한다. 납득의 장면들은 시선 건너편이 아니라 벌거벗은 시선 자체에 있는 법...  


  「구름」

  “그다음 날에도 사람들의 화제는 구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록되지 않는 피사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해석되지 않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그것이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어느 정도 타당했다...” (pp.205~206) 서울의 한강 어디께쯤에, 사진으로도 동영상으로도 저장되지 않는다는 특질을 지닌, 뻥 뚫린 가운데로 빛을 쏟아내는 타원형의 구름이 등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J와 결별하고, 지방대 출신으로 대기업 핵심 부서에 다니는 친구 G와 만나 구름과 J 그리고 G의 섹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연주 /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 / 문학과지성사 / 250쪽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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