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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니 듀 모리에 《레베카》

독자의 시계를 팔십여 년 전으로 돌리면 더욱 기가 막힌 장르 소설...

by 우주에부는바람

책을 소개해 준 선배는 이 작가가 장르 소설 작가라고 하였다. 어떤 장르였는지는 이야기해주지 않았거나 들었는데 내가 까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전반부를 읽는 내내, 물론 아주 잘 읽히고 재미있기는 하였으나, 의아해했다. 뭐지, 이것은? 그러니까 브론테 자매 류의 소설을 선배가 내게 소개해 준 거였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1938년 출간되었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첫사랑의 열병이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은 참 다행이다. 시인들이 어떻게 찬양하든 그건 분명 열병이고 고통이기 때문이다. 스물한 살의 나이는 용감하지 못하다. 겁이 많고 근거 없는 두려움도 많다. 쉽게 까지고 상처를 입어 가시 돋친 말 한 마디를 견디지 못한다...” (p.53)


소설은 귀부인의 말벗으로 들어가, 귀부인과 함께 프랑스를 여행 중인 영국인 처녀가 어떻게, 아니 얼마나 갑작스럽게 신데렐라가 되는가, 하는 데에 책의 전반부를 온통 할애하고 있다. 이 처녀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신사, 콘월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맨덜리 저택의 소유자인 맥시밀리언 드 윈터와의 짧은 만남에는 별다른 우여곡절이 없지만 두 사람은 스무 살이 넘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된다.


“그가 내게 맨덜리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갑자기 나는 상황을 똑똑히 이해했다. 나는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p.84)


처녀가 어린 시절 그림 속에서나 (사진이었던가) 보았던 맨덜리 저택, 일주일에 한 번은 관광객들에게 오픈을 해야 할 정도로 유명한 저택, 그리고 이제 처녀는 바로 그 저택의 안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처녀는 맨덜리의 현재 안주인이지만 저택 곳곳에는 맨덜리의 이전 안주인인 레베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레베카는 이미 죽었지만 모든 사람이 레베카를 알고 있다. 특히나 댄버스 부인, 레베카와 함께 이 집에 들어왔고 아직까지도 이 저택의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하고 있는 댄버스 부인은 이 새로운 안주인에게는 어렵기만 한 존재이다.


“햇살 아래서 그 방은 한층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덧창을 닫고 전등 불빛으로만 보았을 때는 무대장치 같은 느낌이었다. 한 공연이 끝나고 다른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놔둔 연극 무대 말이다...” (p.249)


하지만 이처럼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두 여인, 과거의 안주인과 현재의 안주인, 과거의 안주인을 대리하는 듯한 댄버스 부인과 순진무구한 신데렐라의 갈등은 갑작스레 새로운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된다. 그저 연애 소설인가 싶던 소설은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로 가득한 소설의 차원으로 넘어 간다. 순진무구하기만 하던 현재의 안주인은 껍질을 벗고 변태를 하게 되고, 소설은 이제야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인은 방에서 나갔다. ‘난 더 이상 부인이 무섭지 않다.’ 나는 생각했다. 부인의 힘은 레베카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p.442)


한 번 붙잡으면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 책을 놓을 수 없는, 과 같은 수식어는 바로 이런 소설에 붙게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1938년 발간된 후 영국에서만 28쇄를 찍었다는, 미국과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초판 발행 후 70년 동안 절판된 적이 없다, 는 번역자의 설명에 수긍하게 된다. 연애 소설만 같은 전반부, 그렇기 때문에 탄탄해지는 후반부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모두 흥미진진하다.


그건 그렇고 소설의 제목이 왜 레베카인지, 실제로 레베카는 이미 죽었고 소설 속 신데렐라, 이 아무것도 모르는 영국이 처녀인데 말이지, 하며 소설을 읽는 내내 계속 의아해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레베카, 그녀는 지금이야 여러 종류의 악녀 캐릭터 중 하나일 법 하지만, 독자의 시계를 과거로 돌려 그것이 만약 1938년의 독자들 앞에 놓인 레베카라면 꽤 센세이셔널한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지금의 우리가 읽어도 충분히 매력적인 캐럭터이기도 하지만...



대프니 듀 모리에 (Daphone Du Maurier) / 이상원 역 / 레베카 (Rebecca) / 현대문학 / 583쪽 / 20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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