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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심연들 - 마지막 왕국3》

날아 올라 가장 깊은 곳, 어떤 심연을 바라보고 싶다는 욕망만...

by 우주에부는바람

한꺼번에 (왜? 모르겠다) 읽을 수가 없어서 몇 번에 걸쳐 (좀처럼 그러지 않는데) 끊어서 읽었다. 그 사이 두 권의 소설, 한 권의 시, 또 한 권의 만화를 읽었다. 그 사이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고, 떠올리기 싫은 것들은 알아서 간혹 떠오르고, 떠올리지 말아야 할 것들은 떠올리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잠의 타이밍을 자꾸 놓쳐서 고생을 했고, 그래서 술을 한 번 마셨다. 아내는 술도 수면제도 안 된다 하고, 어떤 이는 술보다는 수면제가 낫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수면제보다는 술이 낫다고 하였다.


《심연들》은 파스칼 키냐르가 구상하고 쓰고 있는 ‘마지막 왕국’ 연작의 세 번째 결과물이다. 프랑스에서는 2002년 출간되었고 (다른 두 권과 같은 해에)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출간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2005년 이 연작의 네 번째 권과 다섯 번째 권이, 2009년에 여섯 번째 권이 나왔는데, 우리는 아직이다. 어서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당장 읽지 않아도, 단숨에 읽지는 않아도, 파스칼 키냐르의 책을 곡간에 들여 놓으면 조금 안심이 될 것 같다.


번역자는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은 송의경, 이었는데 이번 세 번째 책에서는 류재화, 로 바뀌었다. 앞의 두 책의 번역이 좋다고 느꼈고,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크게 거슬리지 않았으니, 두 사람 모도 좋은 번역가가 아닐까... 번역가들이 다는 주석만 놓고 보자면 류재화 쪽이 좀더 친절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주석을 달기 위하여 (어쩌면 그 과정 자체가 파스칼 키냐르의 책을 일해하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부러 여러 책과 자료를 찾을 것임에 틀림 없다.


“... 이 ‘마지막 왕국’은 내게는 대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아의 방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이 방주에 싣고 싶은 것은, 무신론적인, 무국적적인 사고, 동요하는 생각, 불안한 성(性), 비이성, 비직선적, 비방향적 시간, 비기능적 예술, 비밀, 척도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자연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 사회를 계속 망보고 있는 것은 과거입니다. 망보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를 틈타 복귀합니다.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면 안 될 것 같은 끔찍한 과거를 반복합니다. 과거의 속성, 과거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쓴 것이 『옛날에 관하여』라면, 여기에 또 다른 이유로 세 번째 권 『심연들』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크기가 신의 크기보다 더 무지막지하게 크다는 것을 알게 된 최초의 문명 시대에 사는 자들입니다...” (p.283, 『엑스프레스 Express』, 2002년 9월 첫째 주호에 실린 인터뷰 가운데, 옮긴이의 말 중)


여전히 어떤 이해를 바라면서 책을 읽지는 않고 있다. 옮긴이의 말에 실려 있는 작가의 인터뷰 글과 번역가의 부연 설명 등을 읽고 나면 본문에서 느껴지던, 지금에 대한 반감을 좀더 잘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심연들》 중 어떤 하나의 ‘심연’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옮긴 이는 ‘역행성, 선존성, 근원성에 대한 탐구’라는 말로 작가의 작업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적절한 설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으로 온전히 정리되는 것은 또 아니다.


여전히 독자를 부유하도록 만드는 작가의 힘에 불가항력을 느낀다. 비행을 꿈조차 꿀 수 없던 시절의 새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아니 그 새를 날아다니도록 만드는 바람을 얼핏 본 것만 같다. 나는 아주 잠깐씩 그 새의 눈에 접속하여, 아주 잠깐 새를 바라보는 나, 와 눈 맞출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은 곳을 바라보면 좋겠다고 여긴다. 사실 날아 오른 것의 정체가 새인지 바람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상념은 토막 나 있고...


“나는 욘 강둑에서 죽은 꽃들과 자글자글하게 그 꽃들을 받치고 있던 꽃가지들을 꺾었다... 꽃잎들은 쌓이고 늘어난다. 꽃잎들은 펴지고 벌어지고 물든다... 고대 일본의 사색가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죽은 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생명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시간이 축적되고 부화함에 따라 개화한 봄은 점점 더 새로워지고, 그 새로움은 점점 더 진해진다고 생각했다.” (pp.19~20, 제3장 중)


“... 태양광 속에 흑점이 있다. 그 소멸 너머의 영혼 속에 더 이상 명명되지 않는 세계. 작은 심연.” (p.22, 제3장 중)


“성적 쾌감 속에서는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가 사라진다. 욕망에 전신을 맡기면 맡길수록 행복은 거의 다 와 있다. 오는 길목을 살핀다. 모든 오차는 바로 이 점에 달려 있다. 그 만남을 기다린다. 그것을 예감한다. 언뜻 보이는 것도 같다. 아직 더 기다린다. 다가간다. 온다. 오면서 파괴된다... 금욕을 결심하는 이유를 이런 선상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두 가지다. (1) 욕망은 이제 손을 들어 올려도 좋다고 믿는 방금 끝난 성교의 희열보다는 잃어버린 것에 더 가깝다. (2) 쾌감을 느끼며 욕망을 잃는다. 상황 종료물로서의 이 썩 유쾌하지 않은 상실감이 성적 쾌감의 정의에 다름 아니다.” (p.63, 제17장 쓴맛 중)


“의존은 옛 쾌락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향수이다. 어서 빨리 흥분을 되찾기 위한 몸살... 즐겼던 쾌감의 돌연한 반복, 사지를, 몸을, 뇌를 관통하는 섬광 혹은 에르사츠 혹은 빛의 시간적 효과를 즐기기. 몰려오는 쾌감. 인류를 지배한 격정의 황홀경, 저 멀고 먼 시대의 유혹.” (p.141, 제42장 습관성에 관하여 중)


“오스트리아 제정 말기에 고안된 정신분석학, 그것은 무엇인가? 소진된 과거를 언어를 통해 다시 흐르게 하는 열정이다. 지나간 것이 다시 지나가니 자지러진다.” (p.172, 제54장 동물들 중)


“자연은 시간보다 덜 오래되었다. 자연은 생명에서 비롯되어 세상이 된 시간이다.” (p.218, 제71장 중)


“옛적에 자연은 소위 아름다울 수 없었다. 수만 년간 자연은 한 번도 아름답다고 느껴진 적이 없었다. 고대인들은 그 이미지를 모사해보려고 한 적조차 없었다. 그 권위, 자명함, 그 동물상, 천체적 · 기상적 · 식물적 · 동물적 지배, 끝도 없는 모습 등이 미(美)라는 개념을 초월했다. 수도 없이 많은 도시들이 땅을 짓이겨 여유 공간은 모조리 건물과 도로로 뒤덮고 나서야 자연의 아름다움이 보였으니 비로소 그때 자연미를 깨달았다. 아름다운 것은 잃은 뒤에야 깨닫는다. 상실이 그 얼굴을 바꾸었다.” (p.244, 제78장 장자의 새 중)


“탄생은 시간의 유일한 시원성이다. 단 하나의 날짜가 솟는다. 이 날짜로 시간이 찢어지며, 사후성이 생기고, 언어 한 가운데에서 보이지 않는 과거(고인)와 언어 없는 미래(어린이)가 양립한다. 미래란 다시 태어나는 일 그 이상은 아니다.” (p.253, 제80장 모더니티 중)


“특별한 휴머니티란 없음을, 의미란 부여된 것임을, 진리는 알 수 없는 것임을, 벗겨졌으나 밝혀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은 21세기의 우울한 양식... 멀고 먼 옛것을 더듬으며 강렬한 경이를 느끼는 시대. 근대 세상은 ‘답 없음’을 불편이나 하고 있으니, 그 ‘답 없음’이 그와 더불어 생긴 것을. 영영 답이 없는 것이,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도리여 신명 나는 잔치 아닌가.... 그 돌연한 침묵.” (p.259, 제82장 중)



파스칼 키냐르 (Pascal Quignard) / 류재화 역 / 심연들 (Abîmes) / 문학과지성사 / 306쪽 / 20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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