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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저 먼 인류의 DNA로부터 비롯된, 부인하기 힘든 우리 안의 무엇...

by 우주에부는바람

“... 해리엇을 만났을 때 그는 서른 살이었고 야심 있는 남자가 지닌 완고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일해 왔었다. 그러나 그가 일해 온 목표는 가정이었다... 그들은 무성한 정원을 가진 거대한 빅토리아풍의 집을 발견했다. 완벽해! 그러나 젊은 부부에게는 말도 안 되는 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식을 많이 낳을 예정이었다. 두 사람은 미래에 대해 엄청난 포부를 갖고 있었기에 약간 도전적으로 「우리는 애가 많아도 개의치 않아요」라고 선언했다...” (p.14)


1960년대,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그 시대에 걸맞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진 두 사람이었고, 덕분에 너무도 쉽게 서로를 향하여 끌렸고, 결혼을 결심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지만, 결혼을 한 다음에는 되도록 많은 아이를 낳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잘 사는 편이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거대한 집을 사기로 결정하였다.


데이비드의 직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거대한 집을 살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이 집의 구입에는 데이비드의 이혼한 아버지 제임스의 도움이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데이비드는 아버지에게 기댈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해리엇과의 사이에서 첫째 루크를 낳고, 자신의 집이 일가 친척들로 가득차 웃음과 활기가 넘치는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첫째 아이 루크가 생기고 연년생으로 헬렌이 생기고, 다시 제인과 폴이 태어나면서 두 사람은 그 중에서도 해리엇에게는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인생으로 가득 찬 건강하고 매력적인 젊은 여인’임은 여전하였지만 해리엇은 ‘피곤했다’. 데이비드 또한 집안을 가득 채우는 가족들, 자신의 아버지인 제임스와 새엄마, 자신의 엄마인 몰리와 그의 새로운 남편 프레더릭, 해리엇의 엄마인 도로시, 해리엇의 여자 형제들과 그녀의 남편들, 그리고 아이들의 사촌들로 북적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과 부활절 시즌을 계속 행복하게만 여기지는 못하게 시작된다.


“저는 바로 핵심으로 가겠습니다, 로바트 부인. 문제는 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있어요. 당신은 그 애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죠... 그래요 로바트 부인.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시겠어요? 우선 저는 이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리고 또한 이런 일이 희귀한 일도 아니라는 사실도요. 우리가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선택할 수 없듯이 아기를 갖는 일도 마찬가지랍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첫번째 일은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p.139)


그리고 해리엇과 데이비드에게는, 이들의 다섯째 아이 벤이 있다. 해리엇은 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벤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야수성을 드러냈고,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집이 아닌 병원에서 태어나야 했다. 태어난 이후에도 벤은 다른 네 명의 아이들과는 달랐다. 벤은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무모하였고, 그들의 부모는 벤을 통제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내가 애 잡아가는 사람인 줄 알았을 거예요. 나라면 저 애가 그렇게 돌아다니게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저 앤 납치당할 수도 있어요... 그런 행운은 없어요. 아마도 그 애가 그들을 납치할 확률이 많을 거예요.” (p.151)


해리엇과 데이비드를 포함한 가족들 전부의 암묵적인 동의와 몰리의 주선으로 한때 벤을 수용소에 보내기까지 하였지만 해리엇은 결국 벤을 다시 찾아온다. 데이비드는 이를 반대했지만 결국 해리엇은 수용소를 향했고 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벤은 자신의 속성을 숨기지 않은 채 성장하였고, 아이들은 차례차례 집을 떠났다. 루크는 할아버지 제임스에게, 헬렌은 할머니 몰리에게, 제인은 외할머니 도로시에게 떠났고, 집에는 넷째 아이 폴과 다섯째 아이 벤만 남았다.


“폴은 여러 시간 텔레비전만 보며 지냈다. 그 애는 안절부절 못하고 돌아다니면서도 텔레비전만 보았고 그 안으로 도피했다. 또한 보면서 먹고 또 먹었지만 체중은 늘지 않았다. 그 애의 내부에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입이 있어 날 먹여줘, 먹여줘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애는 갈구했다. 온몸의 구석구석까지. 그런데 무엇을? 자기 어머니의 팔은 그 애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전쟁과 폭동. 살인과 비행기 납치, 살인과 강탈과 유괴...... 19880년대. 야만적인 80년대가 본 궤도에 올랐고 폴은 텔레비전 앞에 누워 기거나, 방안을 서성대다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밥을 먹었다. 그런 양분을 먹고 자라는 것 같아 보였다.” (p.145)


소설은 꽤나 목가적이고 가정적으로 시작되지만 그 안에는 음울한 미래가 도사리고 있었다. 아직 첫째 아이가 태어나기 이전, 그들이 빅토리아풍의 거대한 집을 사기로 결정하던 그 순간, 에 이야기의 그로테스크한 결말의 배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후 이야기는 네 아이, 그리고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60년대와 70년대와 80년대의 인물들을 양분 삼아 점차 어두운 방향으로 진행된다.


작가가 소설을 구상하는 데에는 ‘빙하시대의 유전자가 우리에게도 내려온다는 한 인류학자의 글’ 그리고 ‘정상적인 세 아이를 낳은 뒤 태어난 네 번째 딸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망쳤다고 하소연하는’ 한 어머니의 글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다섯째 아이’ 벤은 호러 영화의 어린 악마와 같은데, 그것은 인류 전체의 내면에 있는 원시적인 야만성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좀처럼 우리들의 일상에서 발견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렇다고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작가는 이 부인하기 힘든 인류의 DNA를 요령껏, 불안감과 위기감 속에서도 소설에 담아내고 있다.



도리스 레싱 (Doris Lessing) / 정덕애 역 / 다섯째 아이 (The Fifth Child) / 민음사 / 1999 (1988)



ps. 소설에서는 이 다섯째 아이 벤이 집을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만약 소설 《다섯째 아이》 이후의 벤이 궁금하다면 작가의 2000년 발간된 소설 《세상 속의 벤》을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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