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시공간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좋을 현대적인 긴장감...
얼마 전 읽은 《레베카》가 건넨 긴장감이 받아들이기에 좋아 다시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단편이고 1940년에서 1980년 사이에 쓰인 작품들이다. 그 영화가 바로 이 작가의 단편이었던 거야, 놀라게 되는 소설 <새>도 수록되어 있는데 1952년도 작품이다. 그 작품 말고 다른 작품들 또한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고 여겨지는 구석들이 있다. 아마도 미스터리한 혹은 환상적인 영화들에서 사용되었을 법한 혹은 사용되면 좋을 듯한 미장센이 여기저기 많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 쳐다보지 마」 (1971)
아이를 잃고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는 아내를 데리고 남편은 이탈리아에 여행을 왔다. 그곳에서도 아내는 기분을 되돌리지 못하던 참에 우연히 쌍둥이 노인 자매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죽은 딸을 본다는 그 노인과의 만남 이후 아내는 드디어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남편은 그 노인 자매가 계속해서 거슬린다. 게다가 노인 자매는 두 사람에게 특히나 남편 쪽에게 이 도시를 서둘러 벗어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들의 위급 상황을 듣고 이탈리아를 먼저 떠난 것은 아내 쪽이고 결국 남편은 그곳에서 하루를 더 보내게 되는데... 사소한 눈 맞춤에서 살인 혹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서스펜스의 서사가 흡입력을 지닌 채 환상적이다.
「새」 (1952)
히치콕의 영화 《새》의 원작이다.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는 남자는 어느 날 갑작스레 공격적으로 변한 새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새들은 자꾸 집으로 침입해 들어오려 하고, 남자는 자신의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지키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새들이 제공하는 공포의 분위기는 그 새들의 난폭성이 점차 증가하면서 덩달아 상승하게 되고, 그에 맞추어 이 남자의 힘겨움도 가중된다. 하지만 이 남자의 경고를 무시하던 이웃은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되고, 도시 전체는 라디오 송출조차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호위선」 (1940)
일종의 유령선 이야기라고나 할까... 세계 대전 중 유보트의 공격을 두려워하며 먼 바다로 나갔던 래번스윙 호의 이야기이다. 배의 선장이 갑작스런 급성 맹장염으로 사경을 헤매는 사이, 그 배의 항로에 잠수함이 출현한 그때 안개는 짙어지고, 선장의 역할을 대신하여야 했던 나는 왠 범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범선의 도움으로 잠수함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되는데, 사실 그 범선은 오래 전 사라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군대의 배이다.
「눈 깜짝할 사이」 (1953)
잠시 산책을 하려고 집을 나섰던 앨리스 부인은 그러나 다시 돌아간 집에서 그곳을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엉뚱한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동네, 그리고 그 동네의 주민들을 기억 속에서 소환하며 이들과 맞서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경찰관까지 나서보지만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는 것은 앨리스 부인이다. 시간 이동이라는 비일상적 현상과 일상의 결합이라는 시도가 꽤 오래 전에 이루어졌구나...
「낯선 당신, 다시 입 맞춰 줘요」 (1952)
영화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만난 매표소의 여인, 그리고 그녀를 따라 함께 하였던 공동묘지를 향하였던 그 밤의 버스 여행... 거처가 분명치 않아 보이던 그 여인은 그러나 남자의 호의를 끝내 거절하고, 남자는 다음 날 다시 그 영화관을 찾았으나 그 여인은 없고, 그는 신문에 크게 실린 한 살인 사건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여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푸른 렌즈」 (1959)
시력을 회복시켜주는 수술을 받은 한 여인이 드디어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풀게 되던 날, 하지만 그녀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몸에 동물의 머리를 하고 있는 군상들이다. 그동안 자신을 치료하였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개나 고양이나 소 심지어 뱀의 머리를 하고 나타나니 여인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탓에 무례한 환자로 몰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눈의 안정을 위하여 부착한 렌즈 탓이라 여기며 버텨내고, 드디어 렌즈를 다른 것으로 바꾸던 날, 드디어 사람들은 원래의 머리로 돌아가게 되지만, 결국 거울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성모상」 (1980)
뱃사람인 남편에게 순종적이기만 한 아내는 남편이 다시 항해를 떠나게 되는 날 그의 안전을 위하여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드리던 그녀는 구름을 뚫고 드러난 예배당 구석에서 남편과 한 여인을 본다. 그녀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그 시간 그녀의 남편은 친구의 여동생과 욕망을 속삭이는 중이다.
「경솔한 말」 (1980)
사장의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와 함께 로맨스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나에게 일어났던 아주 로맨틱하게 시작되었으나 처절하게 끝이 나버린 하나의 사건을 떠올린다. 감상적인 어느 날 극장에서 나와 발견하게 된 한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기구한 사연과 함께 하였던 하룻밤까지... 하지만 다음 날 그 여자는 사라진다, 나의 지갑과 값나가는 물건들과 함께... 그리고 사장의 신부를 만나게 되는 순간, 나는 그녀가 낯이 익음을 깨닫는다.
「몬테베리타」 (1952)
높은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몬테베리타, 그곳의 꼭대기에 있었던 어떤 집단에 대한 이야기인데 꽤나 신비스럽다. 이러한 신비스러움을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소설은 옛일을 회고하는, 칠십을 바라보는 나의 기억에 기대고 있다. 친구가 소개하였던 아리따운 아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나, 친구와 친구의 아내가 떠났던 몬테베리타로의 여행과 그 여행에서 친구만 홀로 돌아와야 했던 사연, 그리고 그 후 계속되는 친구의 몬테베리타로의 여행까지... 그리고 친구의 마지막 순간, 우연한 비행기 불시착과 함께 나는 운명처럼 몬테베리타를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친구 그리고 친구의 아내를 차례대로 만나게 된다.
‘스크린이 사랑한 20세기 서스펜스의 여제’라는 추켜세움이 과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들은 오래전 소설들이라는 사실을 잊게 될 만큼, 소설 속의 시공간적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될 만큼 현대적인 의미의 긴장과 불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또한 그것들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미국의 미스터리 협회에서 그랜드 마스터 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럴 법 하다.
대프니 듀 모리에 (Daphne du Maruier) / 이상원 역 / 지금 쳐다보지 마 (Don't Look Now) / 현대문학 / 378쪽 / 2014 (1940~1980)
ps. 소설 외적으로는 작가의 얼굴도 (소설 《레베카》의 표지에 실려 있으며, 작가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도 금세 뜬다) 흥미진진하다. 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이다. 작가의 연보를 보니, 작가의 부모는 모두 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