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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추리와 미스터리의 형식으로 퍼올리는 철학적 함의 가득한 이야기들...

by 우주에부는바람

카렐 차페크는 체코 출신으로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지만 두 작가만큼 알려져 있지는 않다. (오래전 《도룡뇽과의 전쟁》이라는 책을 산 적이 있는데, 읽지는 않았다. 읽기를 아꼈던 걸로 해두자...) 작가를 소개한 글을 읽어보자니 《R.U.R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라는 희곡 작품에서 ‘로봇’이라는 개념을 창시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몇 페이지 들춰보았던 《도룡뇽과의 전쟁》이라는 책의 형식이 매우 독특했던 것만 기억하고 있다.)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러한 내력의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의 짧은 소설 모음집이다. 책에는 모두 스물 네 편의 소설 혹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가 있으니 당연히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도 있을 터이고,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오른쪽 보다는 왼쪽, 이라는 이상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둘 중 왼쪽을 먼저 읽었다. 이번 책에 실린 스물 네 개의 이야기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늙은 죄수의 이야기」, 「도둑맞은 선인장」, 「히르쉬의 실종」, 「여의주와 새」, 「금고털이범과 방화범」, 「도난당한 살인 사건」, 「영아 납치 사건」, 「어린 백작 아가씨」,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이야기」, 「간다라 남작의 죽음」, 「결혼 사기꾼」, 「유라이 쿠프의 발라드」, 「실종된 다리」, 「현기증」, 「고해」, 「서정적인 도둑」, 「하브레나의 판결」, 「바늘」, 「전보」, 「잠 못 이루는 남자」, 「우표 수집」, 「평범한 살인」, 「배심원」, 「인간 최후의 것들」.


각각의 이야기들은 매우 짧지만 나름의 완결성을 갖는다. 어떠한 사건이 (주로 절도나 살인 사건) 발생하고, 그 사건이 해결되거나 혹은 해결된 것도 아니고 해결이 안 된 것도 아닌 어정쩡한 결말로 끝이 나기도 한다. 이러한 사건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보니 형사와 도둑이 많이 등장한다. 사건의 해결 과정에 도움을 주기 위한 장치인 듯 의사가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진실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진실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말을 잘 가려서 해야만 한다.” (p.106)


하지만 대체적으로 추리 혹은 미스터리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이야기들이 그 사건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들은 사건의 발생과 해결보다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자리를 잡고 있을 어떤 진실에 주목하는 것 같다. 작가는 눈앞에 여지없이 보여지는 사실들에 개의치 않는다. 그것들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작은 부속들과도 같다. 그러니 그 부속들은 부실하거나 희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렇게 그러한 과정을 거쳐 도달한 진실들조차도 의심 없이는 받아들이지 말라고 너스레를 떠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게 결코 우리가 경험한 것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 경험의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가 이 순간 경험하고 있는 것들은 너무나 광범위하기에 우리가 그것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혹은 편리한 대로 이런저런 경험만을 골라서 그것으로 하나의 단순한 플롯을 짠 뒤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쓰레기 같은 부분은 잊어버리고, 이상하고 끔찍한 부분도 무의식적으로 생략해버린다. 맙소사, 우리가 경험한 일을 모두 알게 된다면!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하나의 인생을 살 능력밖에 없다. 그 이상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밖이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많은 부분―더 큰 부분―을 버리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함이 우리에겐 없다.” (p.223)


어쩌면 자극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 속 사건들은 일종의 눈속임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작가는 그러한 사건들 자체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신 그러한 사건을 당할 확률이 높지 않은,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이 품고 있는 철학적 함의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그러나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어서 잊고 사는 어떤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카렐 차페크 (Karel Capek) / 정찬형 역 /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Tales From The Other Pocket) / 모비딕 / 271쪽 / 2014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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