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뚝뚝해 보이지만 섬세했고 수동적인 듯 하지만 능동적이었던 한 생애...
*2015년 8월 1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p.392)
아마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엊그제 새벽,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났을 때, 가시지 않는 창밖의 열기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나는 짜릿하였다. 너무 늦었거나 이른 시간이었던 탓에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어 아쉬웠다. 나는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울까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마침 화장실에 들르려고 침대를 빠져 나온 아내를 향하여 정말 대단한 소설이랴, 라고 말할 수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내는 다 읽고 잔다더니 정말 다 읽었나보네, 졸린 목소리로 말하고는 볼일을 보고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오래전 문학회 선배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정말 장엄한 장면을 보았다면, 예를 들어 평생에 한 번 볼까말까 하다고 여겨지는 노을 같은 것을 보았다면, 당장 그것을 쓰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당장 쓰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 선명함에 무너질 것이라는 지적이었는데, 나는 맨 눈으로 태양을 바라볼 때처럼 눈을 멀게 만들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는 언질 같은 것으로 이를 이해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날 새벽 당장 이 책에 대하여 무엇이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토너의 정말 장엄한 평생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pp.387~388)
스토너의 인생이 장엄한 것은 그가 답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답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 스스로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삶이 장엄하다 여겨지는 것은 그가 질문으로 생을 마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이러한 마지막 질문이 장엄한 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 이미 답이 주어진 것처럼 살아온 다음, 그 다음에야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 윌리엄 스토너 앞에 놓인 장래는 밝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와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중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pp.38~39)
무지렁이 농사꾼인 부모가 권한 대학에 진학한 이후, 또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진행시키던 학업의 어느 순간, 문득 깨달은 바에 따라 영문학 공부를 하기 시작하고, 별다른 의구심 없이 그 공부를 지속시키다 학생을 가르치는 직위에 오르고, 그렇게 거의 오십 년에 걸쳐 배우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스토너는 그렇게 한결같고 의문을 품지 않은 세월을 보낸 다음 칠십이 넘은 나이의 마지막 순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그제야 스토너의 삶이 가지고 있던 광휘는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p.22)
스토너는 근래에 읽은 많은 책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었던 캐릭터이다. (책은 1965년 미국에서 출간되었는데, 최근 유럽에서 주목을 끌었고 이후 역으로 미국에서 재조명을 받게 되었으며, 그렇게 한국에서도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시치미를 떼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으며, 무뚝뚝해 보이고 소심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집을 떠난 이후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중반부까지 그는 그저 결정된 바에 따라 마지못해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p.272)
하지만 독자인 우리가 알아차리든 그렇지 않든 그의 삶에 깃들어 있는 열정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있다. 첫눈에 반한 이디스와의 결혼 이후 심연에 가라앉아 다시는 수면 위로 떠오를 것 같지 않은 그 순간에도 그의 열정은 보이지 않았을 뿐 부재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게 동료 교수인 로맥스와의 평생에 걸친 악연을 제공한 워커와의 갈등의 순간에도, 그에게 진정한 사랑을 알려준 캐서린과의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에도 그의 열정은 꽤나 역동적인 형태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은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p.353)
엉뚱하게도 다시 소설을 복기하면서 하야호의 2D 애니메이션 혹은 대사조차 거의 없는 과거 어느 시점의 흑백 영화들을 떠올렸다. 밀어붙이는 힘을 고스란히 (느낀다기보다는) 이해할 수 있는 3D 애니메이션이나 4D 영화들과는 다른,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고스란히 (너무나도 입체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스며드는 힘을 느꼈다. 바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 안에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 것만 같았다. 내가 추구하고자 하였던 어떤 삶, 추구하고자 하는 어떤 삶이 여기, 과거의 소설 혹은 소설의 과거에 있었다.
존 윌리엄스 (John Williams) / 김승욱 역 / 스토너 (Stoner) / RHK 알에이치코리아 / 395쪽 / 2015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