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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마지막 왕국2》

'과거'를 넘어 '옛날'을 향하여 '아오리스트'적으로...

by 우주에부는바람

*2015년 8월 7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버티고 버티다 미장원에 들렀다. 어머니는 나의 머리 상태를 일컬어 ‘불난 집 며느리’와 같다 하였고, 아내는 마치 지구 정복을 꾀하는 ‘미친 과학자’의 스타일이라고 하였다. 그사이 허옇게 센 머리는 지난 주말 아내가 염색을 해주었다. 그전까지 내 머리의 염색도 도맡았던 남자 미용사는 그 색을 칭찬해 주었고, 나는 그 칭찬을 들으며 그리고 스왈롭펌이 (나는 처음에 스왈롭 펌을 스왈로브스키 펌이라고 알아들어, 무슨 퍼머에 이런 브랜드명을 붙이나 의아해 하기도 하였던) 완성되어가는 동안 《옛날에 대하여》를 모두 읽었다.


《옛날에 대하여》는 파스칼 키냐르의 마지막 왕국 시리즈 중 두 번째 권이다. 첫 번째 권인 《떠도는 그림자들》, 세 번째 권인 《심연들》과 같은 해인 2002년 출간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출간되었다. ‘과거’와는 다른 ‘옛날’이라는 파스칼 키냐르 식의 개념어를 아예 제목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해하려고 마음을 다잡고 몰두하면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과거’가 단순한 시간의 개념이라면 ‘옛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어떤 근원을 지목하고 있다고 여기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옛날’이라는 단어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아오리스트’라는 단어이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단어인데, 이 또한 ‘과거’와 비슷하지만 좀더 추상적으로, 그리고 키냐르 식으로 확장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키냐르는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옛날’과 ‘아오리스트’라는 개념을 통하여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시공간이 함축된 혹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어떤 흐름을 ‘마지막 왕국’ 시리즈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책은 파편화된 9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이 연쇄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목차에는 모든 장의 제목이 들어 있지만 실제 챕터에선 어떤 장은 제목을 달아 놓지 않았다. 목차에 실려 있는 제목들 중 괄호로 묶인 것들이 실제 챕터가 실린 부분에서는 제목이 붙여져 있지 않은 것들이다. 키냐르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게 한 이유는 글의 진행이 물 흐르듯 하기 위한 조치라고 하는데, 알 듯 모를 듯 하다.


책을 읽는 사이, 퍼머 약과 중화제가 나의 머리에 도포되는 사이 잠깐 잠이 들었다. 미장원에 오르기 전 주차장에서 스쳐지나갔던 남미 아가씨가 꿈에 나왔다. 현실에서 나는 차를 주차해야 할 자리에 놓여 있든 그 아가씨의 짐꾸러미를 주차선 바깥으로 살짝 옮겼을 뿐이었지만, 꿈에서 나는 그 아가씨와 나란히 캐리어를 끌고 좁은 골목길을 하염없이 걸어갔다. ‘과거’는 바뀌었고, 나와 남미 아가씨는 ‘옛날’로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과거란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옛날Jadis에 비해 과거passé를 결정짓는 요인이다. 과거는 바꿀 수 있지만 옛날은 바꾸지 못한다. 시대에 이어 국가, 공동체, 가족, 생김새, 우연, 즉 조건이 되는 무엇이 끊임없이 과거를 좌지우지한다. 질료, 하늘, 땅, 생명은 영원토록 옛날을 구성한다.” (pp.18~19)


"물고기들은 고체 상태의 물이다.

새들은 고체 상태의 바람이다.

책들은 고체 상태의 침묵이다.“ (p.48)


“다른 시간은 이곳에, 그리고 자신의 은신처에 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 즉 느닷없이 울부짖음, 추위, 젖, 갈증, 허기를 알게 된 세계는 어둡고, 따스하고, 멀리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갈증이 즉시 해소되고 허기가 곧바로 충족되는 예전 세계의 환각을 일으킨다.

더 멀리,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자궁 속의 세계 이전의 다른 절대 세계, 태아로서 어린애가 체험했던 세계보다 앞선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성적인, 알몸의, 욕망의 세계가 있다. 환각이 아닌 상상의 세계, 원초적 이성애적 장면의 세계가 있다. 즉, 옛날이 있다.“ (p.137)


“연인들은 열정을 지배한다. 지식인들은 속임수를, 어머니들은 불평을, 사제들은 죽음을, 공안원들은 구속을, 교수들은 일반교양을, 아내들은 질투를, 친구들은 시샘을, 전사들은 증오를, 농부들은 따을, 어린애들은 옛날을 지배한다.” (p.158)


“꿈은 부재하건, 먼 곳에 있거나, 사라졌거나, 죽은 사람들을 이곳에 있는 것처럼 나타나게 해주는 것이다. 이곳이기는 하나 그들이 머무는 ‘이곳’은 공간의 차원(살아 있는 자들의 경우)도 시간의 차원(죽은 자들의 경우)도 아니다... 꿈속의 ‘이곳’은 태생동물들이 출생으로 내던져지는 대기 중의 ‘이곳’보다 앞선 곳이다. 시간은 ‘이곳’을 찢으러 올 뿐 가져다주지 못한다. 개체 발생이나 계통 발생과 별개로 한 ‘옛날’이 있는 것이다. 내가 이곳을 옛날이라 부르는 이유는 옛날을 과거 전체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p.171)


“출생은 시작이 아니라 세계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여행 중에 나타나는 하나의 경계에 불과하다. 연속에서 불연속으로 넘어가고, 숙주인 육체에서 단독 육체로 옮겨가는 것이다.” (p.226)


“... 독창적original이라는 것은 기원origine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당대의 다른 사람들이 모방의 후계자 없이 남겨둔 옛사람을 고르는 일이다...” (p.231)


“자부신은 우리 내면의 길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중심에 있는 성기에서 느껴지는 욕망처럼 다시 생겨나고, 사계절이 번갈아 뒤를 잇듯이, 해마다 동지가 되면 하늘의 궁륭에서 봄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듯이, 무의식적 충동이 나이로 인한 피로와 세월의 부식이나 침식을 모르듯이, 그렇게 되풀이된다...” (p.329)


"열아홉 살 때부터, 내가 쓴 첫 번째 책이자 모리시 스브에 관한 책 이후로, 줄곧 내가 원하는 바는 무시당한, 난해한, 매혹적인, 까다로운, 고집 센, 훌륭한 인물들을 유령의 세계에서 귀환시키는 일이었다... 이들에게 바치는 책을 한 권 쓸 때마다, 나는 역사의 파렴치함을 조금이나마 지우고, 오류를 바로잡고, 방황을 멈추게 하고, 역사의 운명인 중상모략과 내숭 떨기, 평온, 가시 돋친 콧노래, 두려움에 소리죽여 내는 떨리는 탄식으로부터 언어를 끌어낸다는 확신이 들었다.

시간의 한복판에서 솟구치는 불가사의한 원천은 끓어오르는 과거에 끊임없이 새로운 얼굴을 부여한다.“ (pp.331~332)


“과거보다 더욱 파괴할 수 없는 어떤 과거가 있다. 내가 옛날이라고 정의하는 바로 그것이다. 본래적으로 세상에 접근하는 아오리스트적 시간이다. Avancer(전지하기)는 존재의 뒤편에 있다.

가시성, 생식 능력, 유랑, 황홀, 예술은 감지할 수 없는 전진을 형성한다.“ (p.347)



파스칼 키냐르 / 송의경 역 / 옛날에 대하여 (Sur Le Jadis - Dernier royaue Ⅱ) / 문학과지성사 / 382쪽 / 20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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