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왕국의 허름한 쪽문을 열고, 저기 옛날 최초의 왕국을 향한 첫..
소설이 끝난 다음, 책에는 작가인 파스칼 키냐르와 번역자인 송의경 사이의 짧은 대화가 (파스칼 키냐르의 건강 상황을 고려하여 대화는 한 시간으로 한정되었다) 부록처럼 수록되어 있다. 그 대화는 욘 강이 내려다보이는 작가의 전원주택 작업실 정원에서 이루어졌는데, 나는 소설의 내부가 아니라 소설 바깥의 그 대화록에서 어쩌면 보다 많은 이해의 단초를 얻을 수 있었다고 실토해야겠다.
“... 『마지막 왕국』에 속하는 책들에서 나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내게는 중요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잡다한 사실들, 전혀 다른 시간들, 매우 신기한 이야기들을 모아 하나의 흐름으로 융합시키는 것이지요. 글을 쓸 때 나는 액체가 지닌 것과 같은 유동성과 연속성을 담지하기 위해 무척 고심합니다. ‘최초의 왕국’이나 심지어 ‘옛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유연한 흐름이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장과 장 사이, 장면들 사이, 사실과 허구 사이에 흐름을 방해하는 무엇이 있으면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나는 인용을 하면서도 인용 부호를 붙이지 않거나 내 마음대로 정정하곤 합니다. 글에 융합된 느낌을 주기 위해서 말이지요. 때로 제목이 없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입니다. 내게는 늘 강이 필요해요. 흐르는 강물을 보며 작업합니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이, 비록 단장(斷章)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저 강물처럼 융합되어 흐르기를 바랍니다.” (p.238)
2002년에 발간된 이 소설 《떠도는 그림자들》은 작가가 모두 열다섯 권 내지는 열여섯 권에 걸쳐 쓰기로 작정한 『마지막 왕국』의 첫 번째 권이다. 파스칼 키냐르는 『마지막 왕국』의 두 번째 권인 《옛날에 대하여》, 세 번째 권인 《심연들》을 첫 번째 권과 함께 2002년 동시에 출간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대하여》와 《심연들》은 2010년 발간되었다. (이와 함께 작가는 대화에서 자신이 투병 중 발견한 형식에 의하여 처음 쓴 《은밀한 생》, 출간 순서로 보자면 이들 세 권 보다 앞서 출간된 《은밀한 생》은 『마지막 왕국』의 8권이나 9권이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이 작가라는 느낌이 별로 안 듭니다. 작가라기보다는 독자라는 느낌이 훨씬 강하지요. 겸손이나 겉멋치레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독서는 참으로 이상한 경험입니다. 사람들이 독서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요. 독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책 속의 다른 정체성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무모한 경험이니까요. 우리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는 채로 그 세계에 뛰어듭니다. 우리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변하기 시작하는 거지요.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고, 어떠한 말도 하지 않게 됩니다. 독서란 한 한 사람이 다른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그 안에 자리를 잡는 행위라고 정리해둘까요...” (pp.234~235)
대화들 중에서도 이 독서에 대한 부분이 나오고 나서야 어째서 내가 이 작가의 책을 읽는 내내 정신의 부유 상태, 의식의 무중력 상태를 경험해야만 하는 것인지 조금 이해되었다. 어째서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나를 잃고 허둥대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나는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독서, 그러니까 ‘다른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 태아’가 되어버리는 독서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옛날은 최초의 시기primum tempus이며 그것은 회귀한다... 과거는 시간의 파도가 칠 때마다 구축되어 앞으로 밀려온다... 현대인들이 소유한 과거는 그것이 어둠의 왕국에서 올라올 때마다 달라진다...” (p.48)
이처럼 다른 독서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소설, 『마지막 왕국』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소설의 경우에도 쉽지 않다. 소설은 동양과 서양, 현재와 과거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모든 것들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모두 5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장은 아주 짧고 또 어떤 장은 조금 길다. 유럽과 동양의 작가들이 그리고 여러 가지 종교와 역사 속 인물들 그리고 이야기들이 갑자기 등장하고 또 퇴장한다.
“세계는 늙어갈수록 시간 속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시간 속에서 과거가 멀어질수록, 과거의 소멸은 더욱 돌이킬 수 없어 보였다. 소멸이 돌이킬 수 없어 보일수록, 과거에 대해 어렴풋한 기억을 지닌 버림받은 자는 더욱 절망에 빠져들었다. 과거의 소멸로 인해 버림받음이 가중될수록, 향수는 더욱 심해졌다. 향수가 확산될수록, 불안도 심해졌다. 불안이 마음을 짓누를수록, 더욱 목이 메었다. 목이 메일수록, 목소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으며, 그것이 최초의 새벽이고 최초의 태양이다.” (p.80)
이후의 독서를 위하여 그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의 용어들은 살피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이 또한 키냐르가 대화 중에 밝힌 내용들이다. 키냐르가 밝히는 ‘최초의 왕국’은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시기이다. 그리고 출생 후 18개월, 혹은 3~4년에 이르는 시기는 ‘최초의 왕국’ 이전인 ‘옛날’과 직접적인 연속성을 가진 시기이며 ‘최초의 왕국’과 ‘마지막 왕국’ 사이의 통로가 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왕국’은 이 통로인 시기를 거쳐 죽음에 이르는 시기를 말한다.
“... 인간은 물론이고 조수(潮水)와 태양과 별들이 있기 훨씬 이전에, 그 모든 것들-우주 전체-이 혼재되어 퍼져 있는 것이 바로 ‘옛날’입니다. 이 ‘옛날’과 이분법적 대립을 이루는 것이 옛날 이후인 ‘과거’이지요. 내 작품에서 ‘옛날’ 이후로는 모두 ‘과거’입니다... 아무튼 ‘옛날’은 앞서 말한 두 왕국과는(최초의 왕국과 마지막 왕국) 아주 다른 종류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두 왕국을 지닌 동물들이고, ‘옛날’은 자연 이전, 생명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 궁극적인 공간과 시간에 관련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땅 위에 존재하게 한 원초적 분출 말이지요.” (pp.233~234)
그리고 이 두 왕국과 함께 중요하게 키냐르가 다루는 것은 바로 ‘옛날’이라는 개념이다. 키냐르는 ‘옛날’을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거’라는 개념과 다른 차원으로 사용한다. 그러니까 ‘옛날’은 태초에 가까운 개념이다. ‘과거’는 현재와 대립되는 개념이겠지만, 키냐르에게 있어 현재는 그저 ‘마지막 왕국’의 단순한 부속에 가깝기 때문에 이에 호응하는 ‘과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대신 ‘옛날’이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내민다. (『마지막 왕국』의 두 번째 권의 제목은 《옛날에 대하여》이다.)
“독서에는 도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독서는 방황이다.” (p.61)
하지만 이렇게 정리를 해본다고 해서 머릿속에서 이 책의 내용이나 형식이 명확히 자리를 잡아 주지는 않는다. 또한 그러한 정리를 통하여 모든 장의 내용들을 하나의 줄에 꿰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나는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지 계속 의구심을 품게 되지만)을 읽는 동안 방황한다. 이것은 마지막 왕국의 성벽에 달린 작은 쪽문을 열고, 저기 최초의 왕국으로 향하는 여정 중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방황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살짝 이러한 방황을 즐기기까지 한다.
파스칼 키냐르 / 송의경 역 / 떠도는 그림자들 (Les Ombres Errantes - Demier royaume Ⅰ) / 문학과지성사 / 253쪽 / 2003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