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 《전락》

인생의 마지막 순간 펼쳐 보이게 될 이 남자의 마지막 연기...

by 우주에부는바람

“그것은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걸면서 시작되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일에 그가 매료된 것은 서너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애초부터 자신이 연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p.12)


소설은 평생 동안, 주인공인 액슬러가 밝히는 바에 따르자면 서너 살도 되기 이전에 이미 매료된 연기라는 것을 해온 그가 육십 살을 즈음하여 겪게 되는, 그 나이가 되어서야 겪게 되는 일련의 롤러코스터 같은 행적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발단은 그처럼 평생을 연기하면서 살아온 그가 갑작스레 연기를 못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사실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갑자기 연기를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 액슬러처럼 상대에게 대사를 말하거나 상대의 대사를 받는 무대 배우는 거의 없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귀에 쏙쏙 들어오던 소리는 이제 반대쪽 귀로 흘러나가버리는 것 같았고,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대사가 자연스럽기는커녕 연기처럼 느껴졌다. 그의 연기에서 첫째가는 원천은 듣기에 있었고, 들은 것에 대한 반응이 연기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만약 주의 깊게 들을 수 없거나, 들리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것도 계속할 수 없었다.” (pp.12~13)


대신 그는 자신의 집에 처박혀 자살만을 꿈꾸는 지경에 이르렀고 아내 빅토리아 또한 그를 떠났다. 그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갇히기를 원했고, 정신병원에서 나온 뒤에는 그저 칩거한 채 간신히 생활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페긴이 찾아온다. 젊은 시절 함께 연극을 했던 친구 부부의 딸인 페긴이 방문한 첫 날 두 사람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곧 연인의 관계로 발전한다.


“... 그전에 그녀를 본 것은 뉴욕 세인트빈센트 병원 산부인과에서 엄마 젖을 빨 때였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몸이 유연하고 가슴이 풍만한 마흔 살의 여자가 있었다. 뻐드렁니가 다 드러나도록 자동으로 윗입술이 올라가는 미소엔 여전히 아이 때의 뭔가가 남아 있었고,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에는 여전히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했다...” (p.59)


그는 다시 희망의 불씨를 살려낸다. 이십오 년이라는 나이 차이, 자신의 친구인 부부의 딸이라는 사실, 스물 셋에 레즈비언임을 공개하고 지금까지 여성들만을 애인으로 삼아왔다는 페긴의 과거는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직전에 사귄 루이즈라는 여인이 자신의 집을 방문하여도, 자신의 친구인 페긴의 아버지가 매일 페긴에게 전화를 한다고 해도 그를 말릴 수는 없다. 그는 페긴이 자신의 아이를 낳아줄 수 있기를 바랄 정도로 페긴을 원하고 있다.


“... 불운의 연속이던 시간은 끝났다. 그 스스로 자신에게 가하던 고통은 끝났다. 그는 자신감을 회복했고, 비통함을 밀어냈고, 지긋지긋한 두려움을 몰아냈다. 그에게서 달아났던 모든 것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인생 재건이 어디선가 시작되어야 했는데, 그의 경우에는 놀랍게도 그 일을 위해 고용된 여자인 듯한 페긴 스테이플퍼드에게 그가 빠져든 순간 시작되었다.” (p.130)


하지만 모든 것은 한 순간 사라진다. 그야말로 전락이다. 바에서 만난 트레이시와 하룻밤을 보낸 다음, 그가 페긴과 보다 온전히 합쳐지기를 원하며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고 난 다음, 페긴은 갑작스레 그에게 결별을 고한다. 페긴과 직전에 사귄 루이즈가 그랬듯 그도 그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페긴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패악을 부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난 더 이상 당신의 연기 대용품이 될 수 없어요... 당신한테 난 연기 대신인 존재예요! 연기를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고요.” (p.138)


이 모든 일은 그가 정신병원에서 잠시 마주쳤던 여인, 저명한 인사이지만 자신의 어린 딸아이를 추행하는 두 번째 남편을 향한 증오로 들끓었던, 그러한 증오가 망상으로 치부되는 걸 참아내야 했던, 그러다 결국 별거 중이었던 남편을 향하여 두 발의 총탄을 날린 시블 밴 뷰런의 기사를 읽고 난 다음 일어났다. 그리고 페긴이 떠난 지금, 그는 그러한 시블 밴 뷰런의 용기를 떠올린다.


“시블 밴 뷰런이 용기의 기준이 되었다. 마치 간단한 한두 마디가 세상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일을 실행할 수 있게 해주기라도 한다는 듯 그는 그 격려의 말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그녀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그녀가 할 수 있었다면...... 마침내 연극에서 자살을 하는 것인 척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pp.149~150)


서너 살 이후의 평생동안 연기를 하였던 한 남자, 어느 날 연기를 멈추어야만 했던 남자, 그리고 마치 그 연기에 대한 보상처럼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던 남자, 그리고 그 사랑이 떠나자 인생의 마지막 순간 최후의 연기를 펼쳐 보이게 된 남자의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소설 전체가 긴장감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지만, 길지 않은 분량에 적지 않은 이야기가 잘 포진하고 있고, 덕분에 어느 순간 이 남자의 심정에 조금 다가가게도 된다.



필립 로스 / 박범수 역 / 전락 (The Humbling) / 문학동네 / 151쪽 / 201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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