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을 걷다

살며 생각하며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창경궁 안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왕의 정원"이라 불리는 '비원'을 걷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내년을 기약하면서 겨울에 바통을 넘기고 안녕을 고할 준비를 하고 있지 않나 싶다


단풍비 내리는 산책로를 따라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비원을 걸으면서 얼마 남지 않은 나뭇잎이 하나 둘 흩날리는 가을의 마지막 정취가 가슴속 깊이 파고드는 걸 느낄 수 있어 좋다.


비원을 걷다 보면 -감정은 다소 차분하지만- 서글프면서도 아름다움을 맛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나무 사이로 스며 들어오는 가을 햇살이 마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낙엽이 바람에 스치면서 내는 작은 소리가 퍼져나가면서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정적인 아름다움과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순간, 내 마음은 시간 속에서 함몰돼 흐르는 아름다움에 감동한다.


가을의 끝자락일 것 같은 오늘, 비원에서의 산책은 이처럼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함과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해주는 것 같다. 지금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고요한 가을의 미학에 푹 빠져들게 하지 않나 싶다.


잠시 벤치에 앉아 포도 위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과 친구하고 있다. 다정하게 손잡고 산책하는 연인들의 도란도란 음성조차 정겨운 자장가 같다. 그래서일까? 꾸벅 졸음이 밀려온다.


가을을 뱉어내고 있는 것 같은 지금 이 순간, 이번 가을이 그리울 때면 종종 꺼내 볼 수 있게 기억의 창고에 고이 간직해 두고 싶다.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으면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민주당 혁신파,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