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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순정 Aug 27. 2019

그래서 몇 살인데?

이름 말고, 나이를 묻는 사회

    시애틀에서 보내는 여름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하늘은 시시각각 빛의 흐름에 따라 총천연색으로 물들고, 습하지 않은 상쾌한 공기는 마냥 산과 바다와 호수를 찾아다니게 만든다. 11월부터 5월까지 비만 추적추적 내리는 지루하고도 우울한 겨울을 견디어 낸 뒤에 오는 선물 같은 날씨라 더욱 달콤하다.


  손님을 위한 여분의 방과 작은 정원까지 갖춘 시애틀의 우리 집에는 끊임없이 손님이 드나들었다. 남편의 오랜 친구인 Y씨네 가족도 지난여름 우리 집을 방문한 손님 중 하나였다. 남편과 대학 시절부터 죽이 잘 맞았다던 그는 다섯 살짜리 어여쁜 딸과 아내를 데리고 우리 집에 머물렀다. Y 씨의 딸은 우리 부부의 큰아이보다 겨우 한 살 더 많았는데 어른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하고, 한글을 거의 완벽하게 읽고 쓰는 등 영특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보스 기질도 있어서 스스로를 '누나'라고 칭하며 우리 아이를 잘 데리고 다니며 소꿉놀이도 같이 하고 친구가 되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진 아이들을 데리고 또 다른 친구의 가족과 함께 캠핑장을 았는데 누나와 잘 놀던 아들이 갑자기 울상이 되어서 마를 찾았다.


"엄마~ 으앙"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누나가 나랑 안 놀아줘"

"울지 마, 엄마랑 가보자"


  아이들이 같이 놀다가 투닥거렸나 보다, 화해시키면 되겠거니 하고 우는 아이를 달래 손을 잡고 '누나'에게 데려갔다. 다섯 살 누나는 화가 단단히 난 듯 입을 앙다물고 말없이 나무 밑동의 흙을 파고 있었다. 꼬마 아가씨는 갸륵하게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동생의 대역죄를 고발했다.


"저보고, '너'라고 불렀어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이유인지라 깜짝 놀라긴 했지만 꼬마숙녀의 조숙한 감수성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깜찍하기 그지없었던 네 살과 다섯 살의 하극상 사건은 동생의 "누나 미안해"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지만 이것이 어린이들에게도 꽤나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한국에 돌아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큰 아이는 원체 말이 빨랐다. 두 돌이 채 되기 전에 단어 네댓 개를 사용해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고, 접속사, 부사 등을 사용했으니 다들 놀라워했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이 년여를 보내면서 이상하게도 한국말은 더 완벽해졌는데 미처 가르치지 못한 것이 '존댓말'이었다. 아이는 상대방의 나이에 따라 호칭과 말씨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린이집 선생님과도, 옆집 할아버지와도 서로 이름을 부르는 환경이니 네 살짜리에게 (한국말에서만 필요한) 존댓말의 필요성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이모의 결혼식을 보러 방문한 한국에서 키즈카페를 방문한 아이는 신이 났다. 더 깨끗하고 세련된 시설도 좋았겠지만,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또래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랬을 법하다.


"엄마, 엄마, 이것 봐. 나 엄청 잘하지? 내가 쟤네들보다 훨씬 잘한다!"


  순간 옆에서 놀던 '쟤네'들이 이야기를 들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너 몇 살이야?"

"나? 세 살인데?"

"참나! 우리 다섯 살이거든?"


    잠시 지켜보다 결국 얼딩들의 서열정리에 개입하기로 했다.


"안녕 얘들아? 무슨 일이야?"

"얘가 세 살인데 우리 보고 반말을 했어요!" (이 투철한 장유유서 주의와 고발정신이라니!)

"사실은 얘도 다섯 살이야. 미국에서 살다와서 나이를 적게 계산하지만 실제로는 너희랑 같아"

"진짜요?"

"그럼. 얘가 세 살 아가로 보이니?"

"... 아니요."


    아이들은 대충 납득을 한 듯했으나 이번에는 갑자기 나이를 두 살이나 더 먹어버린 아들이 혼란에 빠졌다.


"엄마, 나 왜 다섯 살이야?"

"응, 한국에서는 다섯 살이야. 그러니까 이제 누가 물어보면 다섯 살이라고 대답해. 알았지?"

  



     미국 나이 세 살, 한국 나이 다섯 살인 아이는 이후 한국에 더 머무르며 네 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제 자연스럽게 본인은 다섯 살, 동생은 세 살이라고 소개하게 되었고 키즈카페나 놀이터에 가서도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게 되었다. 그 과정을 옆에서 조용히 관찰하며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다섯 살 먹은 어린이들이 어른들보다 서열(호칭) 정리에 더욱 민감하다는 것이었다. 근거리에서 놀다가 한 두 마디 주고받게 되면 여지없이


 "그런데 넌 몇 살이야? 나는 $살인데." 


라며 나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서열 정리를 간단히 하고 나면 동무가 된다. 같이 놀기 위해서는 열이면 아홉, 여지없이 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이름은 물어보지 않는다. 존댓말을 잘 배운 대여섯 살의 어린이들이 서로 만나면 나이부터 묻는 광경이 무언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정말 어렵다. 영어로는 그냥 이름을 부르면 되는데, 한국말을 사용하려면 일단 대화를 시작하며 상대방을 부르는 행위에서부터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상대방의 나이, 성별, 나의 나이, 친/인척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혼인으로? 혹은 출산으로?) 관계되었는지까지. 이런 것들을 고려해서 명명된 호칭어는 대화에 참여하는 개인들을 서열화한다. 그리고 그 서열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말씨를 구사해야 한다. 누군가는 상대방에게 "요"를 붙여야 하고, 또 누군가는 그걸 생략해도 되는 것이다. 


     이 대화의 서열은 곧 권력이 된다. 반말을 쓰는 사람이 지시나 명령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존댓말(존칭)을 쓰는 사람이 이를 따르는 것도 자연스럽다. 존댓말 문화로 얻어지는 나이 서열화가 권력이 되는지 아닌지는 이것을 제거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1) 나이 많은 A에게 나이 어린 B가 이름을 부르며 반말을 한다. 

2) 나이 어린 B에게 나이 많은 A가 존댓말을 한다.

1)의 경우 A는 기분이 나쁠 것이고, 2)의 경우 B는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좋을 가능성도 있다. 즉, 이 관계에서는 A 가 권력을 가진 것인데, 단순히 태어난 순서만으로 서열상 우위를 정하고 권력에 차등을 두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존댓말과 함께 사용하는 호칭어는 사람들의 '이름'과 더불어, 그들이 가진 생각과 성격도 슬며시 가린다. "형" 혹은 "선배님"이라고 불리는 순간 혼자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있지도 않은 리더십이나 대범함을 쥐어짜 내 주어진 호칭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한다. "얘, 00이 어미야, 애들 잘 있니? 오늘 저녁은 뭐 먹니?"라는 질문에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아귀찜이요. 애들은 매운 거 못 먹으니까 햄버거 시켜주려고요"라고 쉽게 대답할 그녀는 또 과연 몇이나 될까? 



   

 아이는 한국에서 다섯 달 동안 어린이집을 다닌 뒤 어느 정도 존댓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따로 가르치지는 않았다. 아마도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쓰는 말을 보고 옆에서 배운 것이리라. 스스로 배우고 커 가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지만, 한편으로는 존댓말 조금 천천히 배워도 좋으니 나이보다 이름을 먼저 물어보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아들, 오늘 재미있었어? 

"응, 완전 재미있었어."

"그런데 아까 놀이터에서 같이 놀던 친구 있던데?"

"응, 친구 아니고 형이야."

"그렇구나. 같이 놀면 친구지 뭐, 그런데 그 형은 이름이 뭐야?"

"몰라, 그냥 형이야. 이름은 안 알려줬는데?"

"네가 물어보면 되지."

"응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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