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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Jul 07. 2016

낯선 두 최씨의 '수연산방' 방문기

최인훈의 [화두]를 읽으며

시대를 다르게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알지 못한다. 어떻게 어떻게 시대적 조명을 받고 역사 속에 알려진 인물들 뒤로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부지불식간의 인물들이 슬며시 끼여져 있다. 제 생명을 다하고 사스러져 간 선배들이 즐비한 세상에 그들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족적처럼 남겨진 말과 글의 흔적들 뿐이다. 


[광장] [화두]의 저자 최인훈 작가


너무 유명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최인훈이라는 작가가 있다. 그와 나는 생면부지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열혈독자다. 그는 모든 독자를 알 수 없다. 사실 알리가 만무하기도 하지만 아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수도 있다. 책은 그렇게 뿌려진다. 늘 누군가에게 영적인 존재처럼 말이다. 자신의 의지를 담은 볼온한 삐라처럼 세상에 뿌려진다. 그렇게 집어 들어 올릴 뿐인 나는 그의 개인이 되고 만다. 글의 위력이다.



최인훈의 <화두>라는 책에서 그는 성북동에 위치한 상허 이태준 작가의 고택을 찾아간다. 내가 수연산방을 아는 것은 별날 것이 없다지만 그가 느끼는 상허 이태준의 체취는 내가 살았던 시대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연산 방조차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고대 사람이 박물관에 가서 자신이 그린 벽화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후세의 사람들이 고대의 그림 벽화를 보면서 문명의 한 복판에 살고 있다는 안위감을 가지는 것을 허무맹랑하다고 깔아뭉갤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수연산방엔 그 미스트 같은 미묘한 해답이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해답 말이다. 



최인훈 / 우연하게 이루어진 방문이었다. 나는 삼선교에서 택시를 내려보니 참 오랜만에 이 동네에 오는구나 하는 느낌이 일었다. 삼선교 길을 흐르던 냇물이 있던 자리는 포장이 되어 있었다. 다리 저 편과 이 편의 지형을 간직하고 있던 기억 속의 풍경에 순식간에 그림 한 장이 추가되는 운동이 생생하게 실감된다.


삼선교는 내가 집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 중 하나였다. 혜화동과 미아리를 잇는 중간지점에서 젊은 시절 난 늘 갈등했다. 한성대를 졸업하고 그 지역에 둥지를 튼 친한 후배 녀석이 있어서 늘 집으로 갈 때면 이곳에서 술 생각이 절로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올라가는 길이... 냇물을 복개한 도로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도 못했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삼선교 풍경


최인훈 / 그녀가 사는 동네에 상허 이태준이 살던 집이 있다는 말은 지난해에 듣고 있었다. 그 말을 하던 그때 우연히 알게 됐다는 얘기였다. 그때는 그렇게만 들었다가 그 후에 만났을 때 또 그 얘기가 나온 끝에 관심이 있으시면 방문하실 수 있게 자기가 알아보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올해 정월이었는데, 방문 교섭이 되었다는 것이다. [해방전후]에서 상허는 적고 있었다. <.. 현은 정말 살고 싶었다. 살고 싶다기보다는 견디어 내고 싶었다. 조국의 적일 뿐 아니라 인류의 적이요, 문화의 적인 나치스의 타도를 오직 사회주의에 기대하던 독일의 한 시인은 몰로토프가 히틀러와 악수를 하고 독소 중립조약이 성립되는 것을 보고는 그만 단순한 생각에 절망하고 자살하였다 한다. '그 시인의 판단은 경솔하였던 것이다. 지금 독소는 싸우며 있지 않은가? 미, 영, 중도 일본과 싸우며 있다. 연합군의 승리를 믿자. 정의와 역사의 법칙을 믿자! 정의와 역사의 법칙이 인류를 배반한다면 그때는 절망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현은 집을 팔지는 않았다. 구라파에서 에이전선이 아직 전개되지 않았고 태평양에서 일본군이 아직 라바울을 지킨다고는 하나 멀어야 이삼 년이겠지 하는 심산으로 집을 최대한도로 잡혀만 가지고 서울을 떠난 것이다.> 이렇게 떠났다가 해방이 되자 돌아와서 [해방전후]를 집필한 그 집으로 가고 있다. 


수연산방은 '문인들이 모이는 산 속 작은 집'이라는 뜻이다


상허의 단편은 교과서에서는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월북작가였기 때문이다. 분단은 시대를 거꾸로 되돌려 놓았다. 분단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간직한 채 나는 에이리언처럼 알이 부화되기를 기다리는 고약한 짐승이었다. 나는 입이 찢어진 이승복을 네덜란드에서 자신의 몸으로 댐의 구멍을 막았던 소년과 동질화시키면서 자라났고, 마라톤 코스보다 짧은 거리에 휴전선을 두고 있는 시골 초등학교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화두를 배우며 자랐다. 사회주의가 뭔지를 알기도 전에 황순원의 '소나기'와 피천득의 '인연'을 배우며 달콤한 추억에 의지하는 꾸리한 샌님이 되어버렸다. 현실은 그렇게 늘 비눗물처럼 이어서 마음대로 헹구기만 하면 보송보송한 과거만을 기억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중학교 때 즈임인가..거름통을 지고 할머니가 키우던 감자 텃밭에서 난 내가 사는 이 곳이 침략당한 자유의 땅이 아니라 전쟁을 감행했던 지역의 최전방 교두보였음을 현장 목격자인 할머니로부터 듣고 그제야 알았다. 그 사람들이 전쟁의 시작을 본 사람들이라는 불편한 사실을 말이다.


수연산방의 마당풍경

     

최인훈 / 그 골목에 들어서자 한 집 건너서 오른쪽으로 돌로 쌓은 기초 위에 조금 높게, 흰 석회 바탕에 돌이 박힌 기와 얹은 담이 있었다. 담의 온 길이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담이 휘어져 들어갔다가 다시 저쪽으로 이어지는 곳에 돌 기초 높이만큼 계단이 있고 계단을 올라선 곳에 기와지붕이 얹힌 두쪽 나무 대문이 보였다. 강양이 대문 기둥에 붙은 벨을 눌렀다. 곧 사람이 나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중략....) 이렇게 집을 다 살펴본다. 그의 몇 단편들에 묘사된 집이 이 집이다. 그는 이 집을 짓는 이야기를 수필로 쓰기도 했다. 그이 수필도 모두 읽을 만 하지만 그중에서도 훈훈한 이야기였다. 이제 집안을 다 둘러보고 장독대 앞에 있는 의자에 와 앉아서 집을 바라본다. 집은 그 시절의 규모로도 결코 큰 것이라 할 수 없으나, 그가 수필에서 구식 목수들의 인품을 칭송한 끝에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아모리 요새 시체 집이라도 얼마쯤 날림 끼는 적을 것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고 한 그 바람을 잘 이루고 있어 보인다. 작아서 아담하고 구석구석 알뜰해 보인다. 이것이 상허 선생의 집이었다. 여기서 그는 그 구슬 같은 단편들을 다듬어 냈고 격동하는 시기의 숨결을 귀중하게 증언한 [해방전후]를 썼고, 일본 패망 직전에 시골로 가면서도 팔지 않은 이 집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것이다.



우스꽝스럽게도 나에게는 상허 이태준 작가의 고택인 수연산방이 바로 그 집 앞에 있는 '금왕 돈가스'라는 식당보다 더 존재감이 없었다. [해방전후], [영월연감], [가마귀], [달밤] 등의 수많은 주옥같은 단편을 이 집에서 집필한 선생의 글 향기가 즉석 돈가스의 진한 내음에 가려져 있었다는 것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트렌드였던 것이다. 내가 이곳을 알게 된 계기는 늘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수연산방의 특징인 돌출 누각은 함경도의 한옥 스타일로 상허가 직접 분해해서 함경도에서 우마차에 실어 서울로 직접 가져온 것이다.


어떻게 잠깐 다니게 된 회사에서 동료로 있던 이가 자주 이곳을 찾는다 하여 같이 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가 마침 성북동으로 해가 막 떨어질 때였는데, 수연산방의 누마루에서 바라 본 성북동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난 그때 이 자리가 누구의 글방이었는진 몰라도 이 자리에서 자신의 상상을 동원해 글을 썼던 작가에 대해 대단한 경외심을 가졌던 기억이 새록하다. 



전후세대들이 이 자리에서 성북동의 향취를 만끽하며 전쟁의 흔적과 이데올로기를 액세서리쯤으로 여길 때 거기서 나는 역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치열하게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제 국민을 개새끼 모양 꾸닥거리고 치다꺼리며 사냥하던 시절... 이 집주인이 월북한 심적 요동을 나는 거기서도 내내 알지는 못했다. 지식이라고 배우는 것은 그 껍데기가 온전한 형태랄 뿐이지 깊이가 있는 심정이 없다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인훈 / 6. 25 전쟁 이후 상허에 대한 공식 소식은 일체 알려진 바 없고 휴전된 후 함흥에 있는 고철 수집소에서 수집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미확인 증인이 있을 뿐이다. 상허 아니라 누구라도 운명의 명령이면 고철 수집소 아니라 어디라도 설 수밖에. <중략...> 역사가 마지막 말을 할 때 까지는 아무도 마지막 진실을 알 수 없다. 역사에 마지막 말이란 시간이 있는가? 아마 그런 것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권력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만 가능한 권위를 가지고 그들은 말할 뿐이다. 권력은 그 말에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왜냐면 그들만이 여러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슴속에만 묻어 있을 그 <큰 의도>를 알 수 없으므로 피고의 행적이 어느 만큼 반역적인지 알 수 없다. 그때까지는 이태준 자신도 자기 작품에 대해 최종적인 변명을 할 수 없다. 하물며 그의 작품을 가지고 배운 학생의 공부는 끝나지 못한다.


우리는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지켜보면서 한 인간이 선택했던 순간의 시간이 어떻게 결론되어졌는가를 배웠다. 그것들은 책에 있고, 누군가와의 이야기 속에도 있으며, 심지어 이 조그만 고택 마당의 우물 속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형태와 내용적 양식의 기준은 다르지만 적어도 내가 보는 모든 사람들은 보다 더 성공적인 삶을 설계하고 있다. 



작금의 이 시대, 그것은 마치 탱크와 같아서 밀어붙이는 힘의 완력에 인간들은 스스로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수연산방의 마당 문을 열면 시원하게 펼쳐졌을 성북동 산자락과 내천은 이제 도로가 되어 국화주에 취한 취객들을 태울 콜택시들이 정차되어 있는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상허의 단편을 읽으며 느꼈을 최인훈 선생의 마음을 나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수연산방의 같은 누마루에 앉아 그렇게 들이치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르지만 알 것 같은 간신배의 그 모략질이 또 충동한다. 어쩔 수 없는 짓... 그게 추억이자 회한이다.



최인훈 / 대문을 나서서, 이 잡담이 끝나는 언저리에서 돌아본다. 상허 선생님, 허락도 없이 이렇게 왔다 갑니다. 용서하십시오. 돌아보는 시늉 속에 누가 얹히는 느낌이다. 그가 이 집을 마지막으로 나섰을 때도 필시 이렇게 돌아보았을까. 지금은 골목이 되어 있지만 그의 단편을 읽으면 주변의 대부분의 집은 그때는 없었던 모양이며, 시내로 들어가는 큰길에 나서자면 지금은 복개된 냇물을 건너야 했을 것이다. 역사는 조선의 문사가 한양성 밖의 산골짝에 마련해 본 이만한 평화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대역죄인으로 고변되어 북변의 고철 수집소에서 쇠 넝마를 줍는 신세가 되었다. 혁명재판소의 탄핵은 추상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재판기록을 공개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재판소 지붕 꼭대기에 휘날리는 혁명의 깃발을 가리킨다. 저 깃발 밑에서도 송사를 의심하는가? 그것은 피고도 선택한 깃발이며, 피고는 이 깃발 밑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유죄를 인정하였다. 저 깃발이 있는 동안 피고의 유죄는 명백하지 않은가. 이 동어반복의 저편에 이 집의 옛 주인은 갇혀 버렸다. 


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장난치듯 젊음을 소비하는 재미로 살 때... 물론 그런 일탈의 세상살이 방식으로 살고 있을 때에도 채 한 평이되지 않는 감방에서 반 평생을 비전향 장기수로 일생을 마친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은 알고 있는 사람에겐 개선에 대한 조건으로 제한적인 고통을 주지만, 알고 있지 못한 사람과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불쾌한 쾌락만을 선사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현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졌을지는 모르겠으나 사상적 선택의 요건이 별로 없는 획일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수연산방의 문지방 미닫이가 여닫이로 바뀌어도 그저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냉랭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수연산방의 하나하나의 방문을 열면 거기에 답은 없지만 희미한 힌트가 있다. 그 힌트들은 어떤 세계에 속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숭고한 선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법이다. 최인훈 선생도 마루를 차고 대문을 나오며 흘낏 뒤를 돌아본 이유가 아마 그런 것의 느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성이 같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시간적 간극을 지나 두 최씨의 발걸음을 작위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시도가 상허 선생의 고택에서 나름의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 자체에 행복이 있으려니.. 나로서는 참으로 행복하고 뿌듯한 나들이였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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