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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May 21. 2016

내 기억 속의 송림동 아침

새벽 첫 차를 타고 인천의 송림동을 향했다. 


10년도 넘은 추억이다. 당시로서는 인천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재개발 지역인 송림동은 아직도 예전 우리네 살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골목들이 많이 존재했기에 고향생각이 나면 가끔 찾던 곳이었지만 아침 풍경을 맞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날따라 아이들이 분주하게 학교를 향해 등교를 하고 있었고 게 중에는 할머니와 손을 잡고 가는 아이들... 대문을 나와 엄마와 각자 헤어지는 아이들... 우르르 몰려가며 수다를 떠는 아이들로 송림동 골목의 아침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폭염을 연신 땀으로 비벼대며 난 슬며시 추억의 내 등굣길로 필름을 돌려 본다.. 지금은 개발로 인해 대부분 사라졌지만 나의 고향 역시 조그만 골목들이 즐비한 가난한 갯가 사람들이 모여 살던 어촌 동네였기 때문에 이런 조그만 골목들을 지나고 있노라면 어느덧 세월의 시간을 지나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곤 한다. 



더욱이 아이들이 학교를 등교하기 시작하는 아침 풍경은 그야말로 촌 동네의 가장 왁자지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파이란에 등장하는 푸른 동해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학교를 등교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명태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했던 동해안 거진. 이 작은 어촌 동네의 신작로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4리 길 우측의 조그만 산 위에 코딱지만 하게 놓인 건물이 바로 우리 학교였는데 이 학교로 올라가는 조그만 흙 골목길은 아직도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잔영을 남겨주고 있다.



어촌이란 농촌이랑 구조가 달라 구릉이 많고 협소한 골목이 많다. 대표적인 풍경은 담벼락이 없다는 것인데... 학교로 올라가는 길에 수많은 집들의 안방을 쳐다보며 등교해야 하는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딱히 담이라고 쌓을 공간도 없거니와 앞집과 옆집 그리고 뒷집들이 너무 조밀하게 붙어있어 담을 칠 공간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이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가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실 담은 동네 사람들에겐 불필요한 존재 같은 것이었다. 



추억의 풍경엔 소리가 있다. 어릴 적엔 아주 길게 느껴졌던 그 조그만 길 위에서 보았던 풍경들은 각자의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등교 길 골목.. 열린 방문 앞에 펼쳐진 대나무 발 뒤로 가족들이 모여 꽁보리밥을 박박 긁어먹는 소리하며 등교시간이 늦었다고 징징대는 누나와 게으름 피우는 동생이 다투는 소리... 그 뿐인가?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 위에서 갓 돌이 지난 동생을 안아 들고 쉬쉬-하며 오줌을 누이는 소리들까지.... 수많은 풍경과 소리들이 고향의 아침을 꽉 메우고 있었다.




대문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 가족처럼 지냈다. 물론 게 중에는 간섭과 관심의 차이를 몰라 힐난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가장들을 새벽마다 검푸른 죽음의 바다에 보내 놓고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어부의 아내들이고 자식들이어서 그랬는지.... 그들은 자신의 동네 사람들의 집에 밥숟가락이 몇 개고 그 집 아들 녀석의 주요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다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심리가 보편적인 정서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당시 난 항상 아침은 두 끼를 먹어야 했다. 집에서 대충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이유는 등교하면서 들리는 창길이네 집에서 또 한 끼를 먹어야 하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친구 녀석인 창길이 네는 학교 바로 앞에 집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내가 지나갈 때면 여지없이 붙잡아 한 끼를 같이 먹이고서야 등교를 시켰기 때문이었는데 아침밥을 먹었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창길이와 다른 반이 될 때까지 그 아침식사는 그렇게 계속되었고 난 그게 아주 싫지는 않았었다.  창길이네 집엔 늘 ‘서거리’라고 하는 걸출한 젓갈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 서거리 - 명태 아가미로 만든 동해안의 유명한 젓갈) 세월의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이제 담을 치고 자신만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시골도 마찬가지였다. 새마을 운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재산을 선으로 긋게 하는 동기가 되었고 구부정한 집보단 각이 잡힌 넓은 집들을 선호하게 되면서 뒷동산 성황당은 생활공간 확보라는 명분에 밀려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남의 대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 



송림동 아침 골목을 맛있게 돌면서 난 그런 생각을 했다. 가난했지만 정이 있었던 시절.... 부유하지만 정이 없는 현재... 과연 우리가 만들어낸 시간의 성과라는 게 정말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는가? 그런 생각 말이다. 뙤약볕 아래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린 성장 드라이브의 시기에 잃은 것이 너무 많은 듯 싶다. 높은 담이 나의 추억을 무겁게 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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