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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May 20. 2016

비 오는 날.. 건봉사(乾鳳寺)


내가 태어난 고향엔 자랑할 만한 것이 여러 개 있다. 그 하나는 푸른 동해바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작고 아름다운 항구들이라 할 수 있겠다. 거기에 하나를 더 한다면 들쭉날쭉하는 줏대 없는 인심(?)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그것이 바로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에 위치한 건봉사라는 유명한 사찰이다.. 



어렸을 적 할머니 손을 잡고 몇 번 다녀온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건봉사를 나이가 들어 새삼스레 다시 찾은 이유는 이 건봉사의 말사들이 지금은 유명해진 신흥사, 낙산사 뭐 이런 절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다. 대체 얼마나 장대한 절이었길래 각목 사건으로 주지 싸움을 벌일 정도로 큰 사찰인 신흥사를 말사로 두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한 탓일 게다....



하지만 찾아간 날이 장날이라고 날이 꽤 짓꿋었다. 고성 건봉산 자락에는 포근한 날씨에 종일 추적스러운 비가 주르륵 산사를 타고 내렸다. 꿀꿀한 날씨 덕에 건봉사지의 장엄함은 더욱 돋보였지만 사진을 찍기에는 그리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사실 어렸을 적에도 맑은 날의 건봉사 절터보다는 이런 우중충한 날씨의 건봉사의 모습이 더욱 짠하게 다가올 때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한 해발 910m의 건봉산 산자락에 들어앉아 있어서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린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설악산 신흥사, 양양의 낙산사, 백담사가 모두 건봉사의 말사였을 정도로 대찰이었으며, 특히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통도사에 봉안하였었는데 임란 때 왜병이 강탈해 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다시 찾아와 이곳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떼 놈들 하여간 이상한 넘들이다. 



과거 966칸의 가람과 2백 개가 넘는 부도탑, 부속암자만 해도 보림암, 대성암, 적명암, 보리암 등을 거느렸던 건봉사는 6.25 동란으로 모두 전소되고, 현재는 50 여기에 달하는 부도탑과 절 입구의 불이문만 남아있다. 1920년에 세워진 불이문은 한국전쟁 당시 피해를 입지 않아 온전한 형태다. 불이문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 그는 금강산 구룡폭포 암벽에 새겨진 ‘미륵불’을 쓴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진리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이다' ‘두 마음을 가지지 말고 오직 불심 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의 불이문은 본당에 들어가기 전 거쳐야 하는 마지막 문이다. 여타 불이문과 달리 기둥이 4개다. 기둥에는 전쟁 때 맞은 총탄 자국이 선명하고 앞 기둥 두 개에는 금강저가 새겨져 있다. ‘예리한 지혜의 칼’로 불리는 금강저는 사찰 수호를 의미한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을 일으켰고, 일제강점기 때인 1906년엔 만해 선생이 이곳에 학교를 세워 항일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쳤다. 불이문 앞 사명 당승병 기념관과 만해 선생의 시비는 이를 기념한 것이다.



불이문을 지나 왼쪽 돌기둥이 서있는 공터는 정터가 있던 자리로 절터와 대웅전 사이 좁은 계곡에는 무지개 모양의 능파교가 놓여있다. 그 외 대부분의 절터는 한국전쟁으로 불타 건물터만 남아있어서 아쉬움을 더 한다. 전란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멋진 절이 이곳에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비와 함께 흐른다. 그도 그럴 것이 사찰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엔 3천1백83칸의 규모를 자랑하기도 해 명실상부한 정토불교의 총본산이었다는데... 



그렇다면 건봉사는 언제 지어졌을까? 건봉사(乾鳳寺)의 창건은 서기 520년 아도화상이 금강산 남록 냉천리에 절을 세우고 원각사(圓覺寺)라고 이름 지은데서 비롯된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건봉사가 신라 법흥왕 7년인 서기 520년에 창건됐다고 전하나 건봉사의 관계자들은 그 당시 건봉사의 위치가 고구려 땅에 속했던 시기이므로 창건에 대한 기록이 고구려 안장왕 2년으로 수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건봉사는 남한에 존재하는 유일한 고구려의 사찰이라는 것이다. 



이후 758년(경덕왕 17년) 발진 화상이 원각사를 중건하고 만일원(萬日院)에서 염불만일회 (念佛萬日會)를 열었다고 전한다. 서기 937년(고려 태조)에는 서봉사로 칭하기도 했었으며, 현재의 이름인 건봉사로 칭하게 된 때는 서기 1358년(공민왕 7년)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척불 정책으로 전국의 많은 승려들이 고난을 겪었지만 건봉사만은 왕실에서 여러 번의 재정지원을 해 사세가 오히려 번창할 수 있었다. 특히 1754년 8월에는 영종이 숙종의 어제 절감도와 어필화를 내려 어실각(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곳)에 봉안하고 각종 노역까지 면제했다. 건봉사가 번창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 복원공사를 마친 건봉사는 마당 나루에 절터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절간에는 외국 승려들이 읽는 불경 소리가 한창 들리고 있었다. 고구려 시대의 유일한 사찰.... 척불 정책에도 꿋꿋하게 의병을 일으켜 호국 불사의 이념을 다한 사찰... 건봉사를 들러보며 그 명멸했던 역사의 오만과 자존심을 바람결에 듣고 시원한 빗소리에 묻혀 산자락을 내려왔다. 돌아오고 나니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절이 없는 터가 오히려 웅장해 뵈는 것은 진리가 두 맘이 아닌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일까....


Leica M4 black-paint / 21mm F4 S.A / Fuji 10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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