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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May 13. 2016

세상을 떠나던 날의 기록

 

1. 訃音 


사람은 반드시 언젠가 죽는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이지만 아무도 그 진리가 쉽게 내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병들지 않고 아프지 않으며 오랫동안 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일 때가 많다. 친한 고향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서울에 있는 친구 녀석 연락을 받고 그 날 저녁 바로 승용차로 합류해 장례식장으로 달려 내려갔다. 발인이 바로 다음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동창 녀석으로 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집 하고도 집이 가까웠고 시내에서 우리 집으로 가자면 늘 그 녀석 집 앞을 지나가야 했다. 



그때 좁은 마당에서 거친 손으로 늘 그렇게 낡은 그물을 손질하시던 그 친구 아버님이 불현듯 떠올랐다. 대학시절 그렇게 부모님 속 썩일 때, 술 먹고 고주망태가 되어 그 친구 작은 방에서 골아떨어질 때면 새벽같이 밥 먹고 자라며 깨우시던 모습까지 생생한데,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참으로 세상을 등지는 일은 이리도 무심하고 간단한지.. 그저 억울함만이 치솟아 올랐다.




2. 發靷 


장례식 장은 참으로 휘엉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다음이기도 하지만 새로이 시에서 만든 장례식장이라 조금 외진 곳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친구들과 서둘러 장례식장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3시 무렵, 문상 온 사람들은 무척 피곤해하고 있었고 3일장의 끝 무렵의 상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리움이 어찌 피곤함에 비하랴..



그렇게 날 선 새벽을 맞이한 발인 날. 친구 녀석 둘째 형이 나를 불러 세웠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대로 보내기 너무 안타까우니 마지막 순간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이었다. 부랴부랴 내려오느라 내겐 손가방에 달랑 들어있는 낡은 카메라 한 대 뿐이었지만 나는 기꺼이 그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결코 호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정정한 나이에 돌아가신 친구 아버님의 운구가 영구차에 오르고 며칠 밤 내내 참았던 통곡이 새벽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큰 형님 친구분들은 이대로는 못 보낸다며 관 위에 드러눕기도 하고 같이 통곡을 하며 홀로 남은 어머님을 달래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의 곡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이제 장례식장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나도 일찍이 어머님을 먼저 보낸 불효가 있어 그 심정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살아있을 때의 다짐이 죽음의 뒤안 길에선 저승길 노자 돈 조차에도 비교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후회 너머에서 배우는 것이 인간이다.  


상주의 통곡을 뒤로 한 채 조그만 제를 지낸 관은 바로 영구차에 실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깊은 여정 속으로 새벽 공기와 함께 길게 빨려 들어갔다. 상주의 애통해하는 곡소리를 여운으로 남긴 채.... 




3. 火葬 

사람은 땅에서 와서 땅으로 간다고 한다. 바로 지난달에 친할머니를 화장장으로 모신 나로서도 다시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 것 같아 못내 찜찜하던 차인데... 당신이 그렇게도 땅에 묻히기를 싫어하셔서 그만 가족들이 유언대로 화장장을 지내었었다. 



어찌하여 친구 아버님도 화장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셨기에 대구 영천에 있는 참전용사 납골당에 모셔지기 위함이었다. 본인의 소원대로 전쟁의 마지막 세대가 되어 산천 위를 구름처럼 날아다니며 자유로와 지고 싶어서였을까.



당시 속초의 화장터는 아주 낡고 오래된 피폐한 건물이었다. 흐린 날에는 그저 을씨녀스럽기까지한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화장을 결심하고 찾지만 실상 이곳에 도착하면 백이면 백 다 실망하고야 만다. 너무나 조그만 시멘트 벽돌 건물에 나란히 누운 3개의 화장구를 보면 마지막 설움이 복받쳐 통곡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덧 없이 가시려고 그 긴 생을 힘들게 힘들게 견뎌오신 것인가... 



그렇게 격렬한 교반과도 같은 통곡이 화장터의 아침을 들썩이고 원했던 원치 않았던 이젠 되돌릴 수 없는 불길 속으로 시신은 빨려 들어갔다. 때론 너무나 차가워 통곡했던 냉동실에서 이젠 너무나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한 인생의 짐이 가벼운 연기로 승화하는 시점이었다. 모두의 가슴이 미어진다..... 




4. 旅路 

운구가 소산을 거듭하는 동안 화장터는 때론 숨죽이고 때론 왁자한 표정이 번갈아가며 이루어졌다. 본시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엔 축제 같은 왁자함이 망자의 외로움을 달래 준다고 믿는다. 그날의 그 왁자함의 주인공은 큰 형님 친구분들이었다. 연일 3일째 꼬박 밤을 새웠다는 형님들은 그날도 친구 아버님이 홀로 연기로 떠나시는 그 시각까지도 술을 부으며... 마시며 망자를 위로하는 떠들썩 함을 재현해 주었다....




5.納骨 

화장은 몇 시간 걸리지 않고 벌써 끝이 났다. 존재감이 사라진 유골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렇게도 보고 싶던 아버지는 이제 어디론가 훌쩍 가버리셨다. 진정으로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통곡의 행렬은 잦아들고 가족들은 이내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살아있음의 우리들은 부친의 유골을 받아 들고 이제 긴 여정의 마지막 관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용하게 친구 아버님이 긴 여정을 떠나는 것을 하루 꼬박 지켜본 나는 그저 속으로 나지막하게 혼자서 이런 말을 읊조리고 있었다. 


"평생 가족과 자식을 위해 푸른 바다 위에서 혹은 거친 세상 풍파 속에서도 꿋꿋하고 헌신적으로 살아오신 아버님... 부디 북망산 중턱에서 감로주를 파는 노파의 유혹을 견디시고 극락의 세계로 영천하시옵서서....다시는 인생의 그늘에 접하는 이승을 생각하지 마시고 그저 가족을 안녕케 하고 영겁의 편안함을 전녕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Leica Ic / 21mm F4 , 50mm Elmar F3.5 / 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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