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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May 07. 2016

꿈속 같은 난곡의 추억

Leica M, 21mm F4 슈퍼앵글론, TX & K-100 

아마 15년 전 이맘때였나 보다...


밤늦게 필름 정리를 하다 의자에서 잠이 들었다. 시골과 도시의 경계선에서 늘 헤매던 나에게 꿈속의 풍경은 가슴을 칠 그리움으로 다가온 바닷가 고향이었다. 바다와 바람 그리고 비린 내음들. 의자에서 떨어져 잠을 깨고 나자 난 머리를 털며 잠에서 깨어난 것을 한참 동안 안타까워했다. 그러고 나서 이상하게 내 머리에 맴맴 도는 풍경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난곡이었다. 


Leica M, 21mm F4 슈퍼앵글론, k100


당시에도 수많은 뉴스와 드라마 배경에 등장하는.. 그리고 서울시청 앞에서 농성을 하던 빈민층 사람들이 거주하는 신림동의 마지막 달동네 난곡...이들에게 도시의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또 있는 고향을 버리고 서울의 변두리에서 기거하다 쫓겨다니면서 결국 난곡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새벽을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너무나 이른 새벽이다. 그러다 난 다시 잠이 들었고.. 이내 새벽의 난곡행은 그저 푸념 줄이 되고 말았다.

                                                                                                

Leica M, 21mm F4 슈퍼앵글론, K100


얼마 후 여의도로 일을 나가며 조그만 가방에 카메라를 하나 쑤셔 넣었다. 해가 떨어질 오후 무렵,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난 버스에 올라 무작정 신림동으로 향했다. 신림사거리에서 난곡 시장을 지나 재개발 철거가 한창 중인 난곡 마을 끝에 다다렀다. 

                     

▶위치 : 서울시 관악구 신림 7동(난곡동) 
▶인구 : 15,873명
▶세대수 : 5,465세대 
▶극빈수: 520가구 1227명 
▶독거노인 : 250 명정도 


사람들은 거의 반수가 이미 집을 버리고 떠난 상태.... 그 폐허 같은 동네 골목 사이에는 아직 잔잔한 사람들의 사는 소리가 들리고 진진한 된장 내음도 향기롭게 다가왔다. 남아 있는 아이들은 아직도 큰 소리를 외치며 뛰어다니고 장을 보고 돌아오는 아주머니의 얼굴은 그저 그렇게 보기에 좋았다. 낯선 놈이 나타나 카메라를 들고 설치는 게 이상할 것 같아..... 난 사람들이 없는 언덕 위로 올라가 촬영을 하고 이내 카메라를 집어넣고 한동안 그 동네를 강아지와 함께 툴레 툴레 걸어 다녔다. 그래, 내 어릴 적 고향 골목이 꼭 이렇게 생겼었지...


Leica M, 21mm F4 슈퍼앵글론, TX


그렇게 나는 난곡에서 무심하게 내 고향 바다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사라진 나의 고향 골목 위에 얹힌 낡은 그리움으로 현재의 난곡을 왜곡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어묵꼬치를 갉아먹으며 같이 웃고 그러다가 해가 완전히 져서야 그곳에서 내려왔다. 물론 내가 꿈에 본 바다는 난곡에 없었다. 바다와 꿈 그리고 고향.... 이제는 잃어버린 단어들을 재조합하기 위해 난 해가 떨어지는 어스름한 저녁, 난곡에서 그렇게 홀로 헤매고 있었다. 한참 돈을 벌고 아이들 양육비를 대야 할 나이에 난 한심하게도 사라져 버린 예전의 나를 사라질 운명에 놓인 달동네에서 찾고 있었다. 


Leica M, 21mm F4 슈퍼앵글론, K100


95번 버스인가를 타고 신림동을 내려오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신림 사거리에 내렸다. 비스무리한 도시의 고향... 사람 사는 흐느적거림..... 추억의 사치를 쓰레기 통에 버려야 했기 때문에, 난 거기서 살고 있는 학교 선배를 불러내 아주 조금만 술기운을 빌어 내 사치를 지워버리려 애썼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지금 다시 생활벌이용 의자에 앉아있다. 머리를 비우고 나니... 책상 앞에 곱게 놓인 대출이자 납입통지서가 나를 보고 웃는다. 


" 븅신, 꼴 값 떨지 말고 돈이나 벌아 자식아~" 


오늘은 졸지 않기 위해 평소에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준비했다. 마치 며칠간 꿈을 꾼 것 같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꿈을 말이지... 아마 난곡에는 다시 아파트가 들어서고 그럴 것이다. 그러면 내가 다시 갈 일은 없겠지만 서울에서 바다내음이 나는 고향 하나는 사라지겠지. 억지로 내몰려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말이지..


Leica M, 21mm F4 슈퍼앵글론, K100


2003년, '달동네 난곡'이 사라졌다.


이곳을 다시 찾았을 때 내가 아는 난곡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1960년대 말 대방동, 청계천, 동부이촌동, 남대문, 용산 등지에서 떠밀려온 도시 철거민들이 구청에서 횟가루로 선을 그어주면 그 안에 집을 짓고 살았던 마을 '난곡'. 2003년 17만 1770㎡에 대한 재개발이 시작됐고, 이제는 신축 아파트가 새 주인을 맞았다. 하지만 재입주율은 8.7%인데 비해 아파트 단지 이름이 '휴먼시아'인 것은 차라리 아이러니다. 주인은 주로 외지인들이었다. 임대아파트에 입주한 난곡 세입자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산 101번지의 경우 전체 세입자의 34.6%), 입주한 이들도 비싼 임대료를 못내 아파트를 거저 내줘야 했다. 


Leica M, 21mm F4 슈퍼앵글론, K100


난곡 사람들은 지난하게 인근의 지하방과 옥탑방을 떠돌아야 했으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난곡 아래쪽 어딘가로 떠밀려 가야했다. 과거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할수록 높은 곳에 살았지만, 이젠 부유할수록 높은 곳을 선호한다. 달동네의 둥근 달은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서 부유한 자들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판자촌은 사라졌지만 판자촌 주민들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들었던 난곡을 떠난 1만 5천여 명의 주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난곡의 사람들’은 뭇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서울 도심 곳곳의 다가구 주택 지하셋방으로 침침하게 숨어들었다. 그들은  바람도 안 통하고 장마철이면 곰팡이가 피는 지하에서 지금도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Leica M, 21mm F4 슈퍼앵글론, K-100


그렇게 참혹한 지하셋방은 쓰레기로 발 디딜 틈이 없고, 여기저기 핀 곰팡이 위로 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있다. 이처럼 ‘난곡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판자촌 덕에 어려운 살림이 공개되었던 난곡 시대보다 더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려 이제는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아예 멀어졌다.  


서울시에서 이들 철거민들에게 한 가구당 대지 8평씩을 주었는데 당시엔 사방이 나무와 논밭, 웅덩이들이 많아 수 천 세대들이 정착하기엔 땅이 모자라서 공동묘지를 이장한 뒤에 터를 닦아 집을 짓게 했다. 원래 이 지역의 이름은 ‘난곡’이었는데 이주과정에서 공동묘지의 이장과 이주가 동시에 이루어져서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한 이주민들이 해골이 쓰레기 모양 뒹구는 것이나 자신들이 청소차 위에서 뒹구는 것이나 같다고 하여 ‘낙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도시빈민연구소 1991년) 


서울 마지막 달동네 난곡을 유유자적하게 돌아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이 모두 가난할 때의 마을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정서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 우리에겐 가난한 시골 촌 마을이 대부분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무한한 확장과 더불어 생겨난 투기와 개발의 붐은 사람들로부터 정서적 문화 따위는 개나 주라는 식으로 돌변하게끔 만들었다. 말 그대로 개발 광풍이었다.   


Leica M, 21mm F4 슈퍼앵글론, K-100


우리는 그런 개발지상주의의 부도덕함과 역겨움을 두 눈으로 목도하며 자랐다. 가난을 밟고 나만 잘살면 된다는 개인주의와 한탕주의가 만들어낸 개발 지상주의는 세상의 평등한 가치와 인정이라는 관습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나는 난곡을 돌아보며 그렇게도 찾고 싶어 하던 풍경이 바다였다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도시의 빈민과 강원도 동해안의 깡촌 난장을 비교하면서 느낀 감정이 여전히 편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 같이 가난하던 것이 특별하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기에 난곡은 집단으로 모여진 자본주의 시대의 낙오자들을 집단 수용하는 불공평한 '게토[Ghetto]'였다.  


Leica M, 21mm F4 슈퍼앵글론, K-100


이제 난곡을 오르는 길 양쪽으로 아파트만 우뚝우뚝 가파르게 존재한다. 그렇게 진했던 폐허의 겉은 바뀌었으나, 폐허의 속은 바뀌지 않았다. ‘난곡’은 바뀌었을지 모르나, ‘낙골’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보이는 폐허가 아닌 보이지 않는 폐허를 고발할 숙제를 우리가 떠안게 된 이유다. 나의 필름 속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살아있는 난곡은 그래서 15년 만에 뒤적거리면서도 마음이 한편으로 짠하거나 울적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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