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모토리 May 27. 2016

비 오던 날, 덕릉 마을


조그만 골목길에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사라진다. 


엄마들은 끼니때가 되어야 아이들을 찾아 나서고... 골목에서 이미 지친 아이들이 고갯마루로 우르르 빠져나간 다음에야 엄마의 목소리는 골목 안을 메아리친다. 그렇게 덕릉의 골목길은 내가 태어난 동네 길과 아주 비슷하다. 산 능선을 깎아 성황당 아래 만들어진 내 친구의 집도 물론 그러했다.


당고개역에서 바라본 풍경...덕릉은 여기에서 몇분 쯤 더 걸어가야 한다

비탈은 삶의 위험을 알려주는 천연의 학습터였고 성황당은 시골 촌놈들의 정신 단련장이었다. 소나무 사이로 무시무시한 바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거리도 얼마 되지 않은 녀석들의 집에선 아우성이 났다. 아랫동네로 이사 가자는 말에 되려 엄마에게 혼줄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구슬치기 시절... 비탈을 보면 난 어릴 적 추억이 떠 오른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템포를 조절하며 뜀박질하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덕릉마을의 전형적인 언덕길

그 시골엔 조그맣게 열린 문이라도 있으면 그 문틈으로 언제나 조그만 AM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그 뽕짝 소리에 맞춰 노인네는 그물코를 만지고 있고 부엌 정지에서 베어 나오는 꽁 보리밥 쉰내가 진동을 한다. 왜 나는 그 아련한 추억의 골목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친구 중에 창걸이라는 녀석이 있었다


그 친구의 할아버지는 우리 고향에서 꽤 큼지막한 명태잡이 어선의 선주였는데, 그런 이유로 이 골목에서 창걸이네는 언제나 가장 부자였다. 새로 나온 장난감은 물론 신기한 외국 물건들.. 호기심 많은 동네 친구들은 늘 그 녀석의 집안 물건들을 부러워했다. 


덕릉마을의 파수꾼인 슈퍼마켓 이장님...
마을사람들이 시간을 볼 수 있도록 시계를 가게앞에 달아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삐거덕 하는 철판음이 울리며 창걸이네 대문이 열렸다. 그러자 기회를 엿보던 친구 녀석들이 득달같이 우르르 대문 안으로 들이닥쳐 창걸이를 뒤집어 놓고 잭패질을 시작했다. 딱지며 구슬이며, 쌍안경... 무전기, 로봇 등 신기한 물건들이 와르르 굴러 나오고 아이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신기해한다. 그러자 창걸이 녀석이 울음을 터트렸다. 난장 패거리들 중에 창걸이를 제일 골려먹은 친구가 경식이라는 놈이었는데, 이 녀석 아버지는 창걸이네 명태잡이 배의 갑판원이었다. 



그 날 저녁, 오늘 벌어진 난동으로 불안감을 느낀 우리는 모두 연탄 보일러실에 꽁꽁 숨어 있었고, 단 한 명 경식이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창걸이네 집에서 두 손이 수세미가 될 정도로 싹싹 빌어야 했다. 그 이후 몇십 년이 흘러 다시 가 본 그 골목은 나 혼자서도 지나가기도 벅찬 너무나 작은 골목이었다. 그 조그만 골목에서... 사실 앞집 문을 열면 옆집 문이 열리지 않는 그런 좁은 골목에서 아이들은 그렇게 세상을 탐험하고 부대끼면서 세상을 알아갔던 것이다.



골목에서 배우다


우리는 경식이가 창걸이한테 절대 개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자신의 아버지와 옆집 아저씨와의 위계질서가 골목길에서도 존재하는 것처럼... 살림의 수준 역시 균등하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갔다. 그것이 우리에게 골목이 가르쳐 준 한국판 시골 자본주의의 산 교육이었다. 그렇게 나의 어린 골목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여전히 유효하다. 골목은 내게 있어 바다와 같은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덕릉 마을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많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두운 역사 속에 방치된 우리의 가계는 새로운 식구를 떠나보내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늘 그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살던 조그만 어촌마을도 그랬다. 너무나 조그만해서 이웃집의 숟가락조차 다 세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던 마을 사람들이 느끼는 '정'이라는 것은 사실 가족적인 것 이상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한번 다투기라도 하면 사생결단을 내곤 했다. 그럴 만큼 섭섭한 구석이 많았다는 증거니까...



언젠가 깡촌을 떠나고... 사람들은 이제 도시를 이야기한다. 마을 등대 주변에 사시던 고모부가 손수 명태잡이를 마치고 돌아와 대나무를 쪼개어 만들어 준 방패연을 날리던 그 고향집 언덕배기는 이미 그 마을 사람들의 소유가 아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야박해지고 있다. 촌동네일수록 그 야박함의 속도가 빠르게 번지고 있다. 



작은 골목 안에서 그렇게 잘 나가던 창길이네 할아버지가 영식이 아버지를 혼내던 그 시절... 모든 것은 상식으로 다 통했다. 골목 안 사람들도 대부분 그랬다. 하지만 지금 그 골목이 스산해지고 있다. 추억록에만 남아있을 법한 어리어리한 감정만이 희미하게 박재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골목이란 나에게는 푸른 바다다


약아빠지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때로는 한 집에 몇 명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어 어쩔 때는 놀러 가도 민망할 때가 많았던 친구들의 집... 그래도 할머니는 기꺼이 자리를 비켜주며 손주들 놀이터를 엉덩이 사이로 내주시곤 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친구 녀석 신발을 신고 가도 다음날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공간은 다르지만 네 것과 내 것이 불투명하던 시절이었다.



그게 가난인지 몰랐다. 크면서 아이들은 몸서리치게 가난을 경험했다. 풍족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가난이라는 것을 학교 체육복을 사며, 운동화 한 켤레를 사며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고향 동네는 그 유명했던 명태 어종이 고갈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공부를 잘하던 1%의 촌 동네 수재들은 다들 인문계 대신 공고로 진학을 해야만 했으며... 그리고 다시는 골목 안에서 서로의 숟가락을 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덕릉에서 내려오며 난 바다를 상상했다. 그리고 골목 안에서 비릿한 바다내음을 맡았다. 그 비린 내음은 나에게서 나는 것도 아니고, 골목에서 베어 나오는 그런 냄새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부슬거리는 비 속에서 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 비린 내음을 분명하게 맡고 있었다. 골목은 나에게 좁디좁은 통로를 통해 바다를 바라보게 해주는 거대한 망망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골목에서 추억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섣불리 기대할 수는 없지만, 미래가 나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생각을 정리하게 해준다. 비 내리던 덕릉...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올 때는 항상 비가 왔었던 것 같다. 민들민들해진 아스팔트 사이로 픍들이 드러나고, 그 속에서 조금씩 자라는 어떤 질긴 잎들처럼... 난 이곳에서 늘 바다내음을 맡곤 한다. 돌아갈 수 없는 그 긴 고향 골목의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창걸이와 경식이는 어른이 되어 서로 동업을 하다가 집안을 들어먹고 죄다 낙향했다.   


[당고개 덕릉(德陵)마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피신을 하기 위해 여주의 친정집으로 가는 도중, 이 근처 수락산 용굴암에서 7일간 숨어 있었다고 한다. 본래 당고개의 옛 지명은 '당현'인데 지금은 '덕릉고개'라고도 부른다. 그 이유는 선조가 자신의 아버지 덕흥군의 묘가 이곳에 있는데 평소 아버지의 '묘'를 '능'으로 불리길 원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능'은 왕이나 왕비가 묻혀있는 곳임으로 조정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선조는 당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들어온 장사꾼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 '당고개'를 넘어왔다고 하면 그냥 보내고, '덕릉'을 넘어왔다고 하면 후한 물건값과 융숭한 대접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근 동네 이름도 덕릉 마을로 남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Red in the cit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