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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Jul 24. 2016

용호농장의 추억

파노라마로 담아낸  사라진 어느 마을 이야기

1. 오늘도 그는 며칠 밤을 새웠다. 


그곳에 다녀온 지도 벌써 2주째가 넘어가고 있는데도 그는 아직 원고의 첫 페이지도 끝내지 못했다. 흑백의 필름들과 피처럼 진하지만 낡고 강렬한 컬러 색조들이 이리저리 그의 책상을 어지럽게 이미지를 만들며 흐르고 있지만 그는 그것들을 도통 정리하지 못하고 다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만다. 컴퓨터를 끌까 하다가 포기하고 샤워실에 들어간다. 찬물을 틀어 놓고 머리를 흔들어 본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 난 뒤라 정신이 몽롱하지만 조그만 여행기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작업은 그 시작의 엄두를 잡지도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히 그 끝을 어림잡기가 힘이 든다.


그는 자신이 보고 느끼고 돌아본 부산의 조그만 언덕배기 동네의 흔적을 어떻게든 나름대로 정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봐도 그는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는 냉장고에 재워놓은 얼음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넣은 후 다시 내뱉는 담배질을 연실 거듭하고서야 결국, 스토리가 없는 단편적인 이미지들만으로 여행기를 완성하기로 작정했다.


어떤 여행이든 작가가 느끼는 솔직 담백한 여행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번엔 그 여행기마저 작은 파노라마라는 이미지에 그냥 얹어 놓기로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인즉슨 자신의 여행기 대신 그것들을 대신할 짧게 부서진 작은 이미지의 조각들로 그 우울한 여행 퍼즐을 맞춰가기로 한 것이다. 난 절대 동의할 수 없었지만 작자가 그렇게 한다는 데야 어찌할 방도가 없어 난 그저 내레이션만을 빌려주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용호동의 이야기는 앞과 뒤가 없는 비상식적인 스토리 없는 단서적인 그림으로만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 용호동의 색들 ⓒ  다모토리


2. 무작정 부산행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 모인 사람들은 깊어 가는 밤 시간에도 어디론가 떼를 지어 긴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도 사람 사는 내음이 흠씬 풍기는 그 대열에 슬쩍 끼여 있었다. 심야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부산시 남구 소재에 있는 작은 마을 용호동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왜 용호동을 찾았을까? 사실 그가 용호동을 알게 되고 찾아가게 된 계기는 그렇게 오래전 일이 아니다. 


언제인가 부산 국제 영화제 주간에 문득 TV를 보다가 장선우 감독이 만든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란 영화의 무대 배경이 되었다는 장소에서 조감독과 사회자가 영화 에세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는 그 프로그램의 배경지가 된 부산 용호동이라는 곳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오륙도를 동그랗게 안고 있는 바다가 보이는 잔잔한 산골짜기에 노인의 주름살처럼 깊게 패인 주검 같은 집들과 공장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허리의 낡은 공동주택들의 이미지는 그에겐 단 한 번도 이 땅에서 구경할 수 없었던 깊은 이미지로 날카롭게 각인되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 새벽에 바라본 용호농장의 풍경 ⓒ  다모토리


줄달음하는 호기심 속에 찾아본 그곳은 처음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우리네 삶의 깊고 우울한 역사를 내포하고 있는 한센병 환자들의 집성촌이었다. 그는 그곳을 향해 지금 내려가고 있었다.


3.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이 울렸다


 여름을 시작하는 태양이 내려앉고 어둠이 깊게 깔린다. 플랫폼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기차들의 궤적을 보며 부산에 가까이 왔음을 직감한 그는 갑자기 차내의 정적을 깨는 발칙한 벨소리로 요동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의 주인공은 부산 토박이 선배. 며칠 전 친한 모임의 선배님들과 그가 부산에 함께 내려간다고 메시지를 남겼는데 이제야 그 메시지를 받은 모양이었다.


 " 문디 자슥아. 와 인자 전화하노? "


선배의 여전한 걸걸한 목소리로 서로의 반가운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는 그렇게 정겹게 쓰이는 부산 사투리의 원조인 문디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거칠게 다가옴을 느꼈다. 그가 용호동을 내려가기로 작정한 후 해방 후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한 음성나환자 집성촌에 대한 자료들을 모조리 훑어보았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당시의 음성나환자들에게 남겨진 고통의 흔적들이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깊은 수렁의 세월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문둥병에서 비롯된 문디라는 말이 스스럼없는 사이에 자주 쓰이는 일반적 호칭이 되어 버렸으니 그것 자체가 그는 참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사실 음성나환자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 한센병이라는 구체적인 병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긴 세월 동안 치유불능, 혹은 가까이하면 안 되는 사람들로 분류되어 격리된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제 3 법정 전염병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기차는 부산에 도착했다.


▲ 부산으로 오는 기차안에서 광안대교를 넘어... ⓒ  다모토리


 4. 그렇게 용호동을 만났다


그는 마중 나온 지인의 차에 올라 새벽을 가르고 용호동에 올랐다. 용호동은 부산시 남구의 동남쪽 끝에 있는 인구 10만의 대표적인 주거지역으로 남구에서 그 넓이가 두 번째로 크고 서쪽으로 대연동, 용당동과 접하고, 나머지 삼면은 해안에 접해 있는 지역이다. 새벽에 용호동 산꼭대기에 올라와 있으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동네 개들만 요란하게 낯선 방문자를 경계한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날이 샐 때까지 사람들이 떠난 지붕에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가방에서 그가 모아 놓은 작은 자료들을 꺼내 뒤적이기 시작했다.


▲ 용호포구로 내려가는 길 ⓒ  다모토리


 5. 그가 펼쳐 든 자료에는.... 


『용호동은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지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용호동은 조선시대에는 분개[盆浦]라 했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는 집은 별로 없고, 소금을 굽는 동이[盆](분)만 여기저기 있어 동이가 있는 갯가[浦](포)라는 뜻에서 분개라고 하였다. 분개에서 언제부터 소금을 구웠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400년 전에 석포 마을의 동쪽에 사분개 염전을 시작한 것이 분개 염전의 시초라고 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바다가 자연 매립되어 남쪽으로 해안이 이동함에 따라 지금의 용호동 쪽으로 염전이 옮아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염전분이 24군데나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6곳의 염전 구역으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 


그는 자료를 뒤적이다 아무리 봐도 뭔 소린지 잘 몰라 그냥 가방에 쿡 하고 쑤셔 넣고 다른 자료를 찾았다. '전에 다른 게 있었는데' 하면서. 그러고는 꼬깃꼬깃한 파일 모둠 안에서 한 장의 접힌 자료를 꺼내곤 그 기사를 골똘하게 다시 읽어보았다. 동네 개들의 짖음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고 여명이 터 오기 시작했다.


『 부산시 남구에 소재한 용호동에 만들어진 용호농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나병환자들을 따로 격리하기 위해 만든 음상 나환자 집성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의학의 발달로 극소수의 음성 나병환자만이 있을 뿐, 나머지 가구들은 영세가구 공장이나 양계를 하는 사람들로 이 사람들은 나병환자들이 떠나간 마을의 폐가를 헐값에 빌려 사용하게 된 것이다 』


『 부산 남구청은 음성나환자 집단 거주지인 용호동 용호농장 안에 아파트 3천여 가구를 짓기 위해 24일 개발업체와 지역주민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종 설계 안에 대한 공청회를 가졌다. 개발업체는 이날 오륙도가 보이는 바다 쪽 아파트 층수를 23층으로 낮추고 중앙 지역은 47층 높이로 모두 3353가구를 지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아파트는 다음 달 중 교통영향평가를 마치고 3월 건축심의를 거쳐 착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것이 그가 가진 용호동에 대한 전부의 자료였다.



6. 날이 밝자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선명하게 마을이 들어왔다. 그는 부산을 많이 방문했었지만 오늘처럼 그렇게 오륙도를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물이 날 때면 섬이 여섯 개, 물이 차면 다섯 개로 보인다고 해서 지어진 오륙도는 아직도 용호동을 관통해 낚시를 하러 가는 사람들의 길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오륙도가 보이는 용호동의 작은 포구엔 낚시 집들과 매점들이 아직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작은 마을버스들이 가끔씩 사람들을 싣고서 산등성이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는 마을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이미 떠난 공가들이 음습한 용호농장의 모습을 만들고 있었고 그런 공가들 사이로 개들이 짖는 집들은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이 었다. 뉴스 기사로 볼 때 그가 찾은 4월의 끝이자 5월의 시작은 공교롭게도 용호동의 마을이 맞이하는 마지막 봄인 셈이었다. 작은 골목에는 조그만 덩어리로 모여있는 유채 꽃만이 용호농장의 마지막 봄을 위해 악착같이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 용호동의 작은 골목길을 따라 ⓒ  다모토리


 7. 마을 전체는 작은 공동체였다. 


아직 한가운데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촌들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좁지만 작은 마당엔 꽃들이 가득한 조그맣고 아름다운 정원들이 가꾸어져 있었다. 마을 외곽에 버려진 가구공장들과 건물의 잔해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중앙부에는 오래전부터 가꾸어 왔을 용호동의 사람 사는 모습들이 아직도 건재하게 오랜 풍경을 간직한 채 남아있었다.


한센병으로 인해 신체가 불편해 보이는 몇 분의 모습들을 대하고 그는 직접 용호동의 역사를 듣기 위해 어렵게 말 걸기를 시도해 보았으나 그분들은 한결같이 옅은 웃음만을 만들어 줄 뿐 쉽게 말문을 열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조그만 우물가 앞에서 아주머니가 요즘은 용호동이 개발이 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하셨다. 이제는 영원히 사라질 동네이니 그 모습을 담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는 얘기다.


어찌 보면 나도 그런 낯선 방문객이었던 셈이다. 부산에 사는 사람들도 평생 한번 가 보지 않았다고 실토할 만큼 일반인들과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던 작은 마을 용호농장은 그렇게 개발의 막바지 기로에 서 있었다. 아주머니가 소개한 것처럼 용호동 마을은 아름다운 골목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조망할 수 있는 바다의 풍경이 있고 사람들은 직접 손으로 돌담을 쌓아 거기에 담쟁이를 길렀다. 산 위쪽의 가구공장과 집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외지로 빠져나갔음을 보여주듯 적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아마 마을버스가 드나드는 작은 마을의 중심부도 이제는 떠날 채비를 하며 다가오는 개발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마을 사람들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제2의 고향인 셈이지만 달리 보면 그네들의 삶의 유배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는 울적한 기분을 떨쳐낼 재간이 없었다. 하루 종일 마을을 둘러보다가 산 중턱에 앉아 마을을 조망해 본다.


지난해 강원도의 작은 마을 철암을 방문했을 때 낯선 외부인들이 프로젝트 시티라는 명제를 걸고 마을을 복원해 보려고 했던 시도들이 문득 다시 생각났기 때문이다. 철암 프로젝트는 지금도 진행 중이겠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용호동의 낯선 방문자인 그도 이곳의 역사를 산 느낌으로 알지 못하고 그저 서성대는 주변인일 수밖에 없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여행이 파편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기인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다. 원래 한센병은 음성으로, 신체접촉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되지 않지만 일제 강점 시절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우리 땅의 한센병 환자들을 애초부터 일반인들과 격리하는 수용시설을 만들었다. 소록도가 그 시초인 셈이었다.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법정 전염병이다. 하지만 일제의 이러한 격리수용은 직접적인 신체접촉으로도 병이 전염되지 않는 일반 한센병 환자들을 우리 주변에서 완전히 격리시키는 씻을 수 없는 역사를 만들고야 만 것이다. 용호동 집성촌 역시 그렇게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소외되어야만 했던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으리라.    


▲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거촌의 풍경   ⓒ  다모토리


 7. 우리 시대에 사라진 동네, 용호동


그는 용호동의 이미지를 담았다. 동네엔 작은 개들이 사라질 골목을 아쉬워하며 연신 짖어대고 있었고 높은 산 봉우리에 설치된 확성기에서는 재개발조합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으로 작은 동네는 더욱 축축하게 가라앉아 보였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아쉬움을 표할 필요는 없지만 해방 이후 만들어온 작은 집성촌이 어쩌면 구성원들이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정착될 수밖에 없었던 한센병 집성촌은 이제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의 변화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의 손길이 스며있는 작은 골목길들이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한다고 생각을 하니 그때 그가 다시 돌아와 바라 본 오륙도의 풍경은 그저 삭막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부산의 역사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아웅 대며 개발논리로 무장한 한국 근대사의 역사 위에 초라하게 숨겨져 있던 부산 용호동의 역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마을 길만이 자근자근하게 대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을 뿐, 아무도 나서서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는 이곳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



8. 재개발, 마을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법을 거부당한 채 사람들의 시선에서 밀려 조그맣게 꾸며져 온 산등성이의 작은 마을 용호동은 그래서 우리의 역사와도 전혀 무관하지 않은 동네였다. 그는 용호동의 가장 높은 곳에서 이제는 사라지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애잔함을 남겨주고 있는 용호동의 작은 길들을 자꾸 떠올렸다. 


어울려서 살아가는 법을 잘 모르던 시기, 일단 내가 잘 살고 봐야만 했던 삶의 투쟁의 시기를 이제 갓 넘어온 우리네 인생에서 용호동의 작은 창문들과 골목길 위에 핀 작은 꽃들 그리고 담쟁이들은 그에게 많은 말들을 아끼고 있었다. 없앤다고 없어지지 않을 흔적들에 대해. 완치되어도 상처의 흔적은 남기고 살아야 하는 한센병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개발의 논리와 흔적을 지워야만 편안해지는 열등한 신분상승의 억지 속에서 그만큼 고통스럽게 스스로 없애버린 기억을 채우며 살아갈 것이다.


▲ 오륙도가 보이는 언덕위에서 ⓒ  다모토리


 9. 이제 마지막 느낌을 정리한다.


용호동은 즐거운 여행지가 아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작은 포구, 일상, 그리고 고단한 삶의 대화들이 가꾸어 낸 부산의 작고 외진 어떤 마을일 뿐이다. 거기엔 소외된 역사의 흔적이 있었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양계를 하고 가구를 만들면서 삶을 이어온 사람 공동체였다. 이제 용호동은 이렇게 기록된 이미지를 뒤로 하고 근사하고 멋진 바다 풍경이 보이는 아파트 단지로 바뀔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전에 이곳에 있었던 역사를 깔고 앉아 또 다른 삶의 풍경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저 그는 대단찮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 여기에 이런 삶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아름다운 작은 마을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기록하고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바로 그것뿐이었다. 그것을 여태 말로 풀지 못해 떠다니는 이미지로만 자꾸 풀어놓은 것이다. 난 생각한다. 그가 기록한 이미지들이 그곳 사람들이 오랫동안 소중하게 만들어 놓은 삶의 잔재와 추억을 언젠가 떠올릴 수 있는 작은 장치가 되길 바란다고. 아마 그도 그 여행기에서 그 바람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행을 끝내면서 궁금한 것 한 가지,  그럼 난 누구인가? 


▲ 서울로 돌아오며 ⓒ  다모토리


" 난 당신이 나를 생각하듯 다른 사람이 당신처럼 느끼는 한 어떤 사람일 뿐이다. 모든 사라지는 사물과 흔적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당신과 내가 바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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