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박 2일~물반 고기반이라던 거문도 갈치낚시의 추억
찌는 듯한 여름이 가고 살랑살랑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사이로 느닷없이 가을 타는 전화들이 무시로 들려오는데 그중 한 통화가 내 잔 뇌에 딱 걸렸다.
"형~지금 남해바다에 은갈치가 물 반 고기반이라는데 한번 가지 않으려오?"
"야 인마, 거짓말하지 마라. 니가 여태까지 물 반 고기반이라고 했던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아직도 내가 그런 말에 속을 것 같냐"
"에이, 형.. 아니라니까. 이번엔 진짜라고요"
하긴 생각해보니 바닷속에 물 반 고기반이라는 게 뭐 사실이기는 하다. 바닷속에 뭐가 있겠는가. 고기들이지. 낚시라는 게 사실 고기를 낚으려고 가는 것보다 전설줄처험 뒤엉킨 뇌 속의 잔상들을 좍좍 풀어서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한 좋은 여행이긴 하지.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런 여행일수록 고기가 잘 안 낚이는 낚시터가 되려 좋은 법이기도 하다. 왜냐면 이런저런 잡생각들을 바닷속에 던져놓고 하나씩 정리해가며 뇌 속에 묶여있던 실타래를 좍좍 풀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 이유로 난 고기가 잘 올라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 여행을 수락했다. 무박 2일 어지간히 힘든 일정이었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남도의 정취도 느껴보고 거문도까지 2시간 남짓 배를 타고 또 거기서 한 시간가량 추자도 부근까지 나가야 한다는 힘든 설정이 왠지 맘에 들었다. 제대로 남도의 바닷가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풀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남도의 바다에는 생각지도 못한 '시경(詩經)'의 한 경구가 시퍼렇게 살아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王在靈沼하시니 於인魚躍이라
주나라 문왕이 영소라는 연못에 서 있으니 물 반 고기반이로구나
낚시터로 가는 여정은 이랬다. 일단 서울에서 출발해 전남 고흥의 외나로도항까지 가서 거기다가 차를 놓고 여수에서 출발한 '오가고호'를 다시 타고 2시간가량 거문도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문도에서 미리 예약을 해 놓은 갈치잡이 낚싯배에 승선해 대략 1시간가량 추자도 근해까지 남진해서 포인트를 찾은 다음 밤새도록 갈치를 낚는다는 시나리오였다. 외나로도는 사실 첫 방문이었다. 이젠 섬 사이로 다리가 놓여서 거의 육지나 다름없는 지역이지만 분위기는 오래전부터 그곳이 섬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풍경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이 지역은 신안-진도-보길도-완도를 잇는 고흥의 주요한 도서지역으로 여수-여천-광양으로 이어지는 다도해의 중심점을 이루는 중요한 섬이기도 하다. 여객터미널에는 시나브로 갈치낚시에 목숨을 건 사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나머지는 연세 드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로 거문도와 백도 관광을 나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햇볕은 반짝이고 바닷길은 비단길처럼 부드럽고 편평했으며 낚시를 하기엔 기상이 백퍼센트라 할 만큼 이상적이었다. 사람들은 기대감에 들떠 술렁거렸다. 외나로도항은 그렇게 거문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문도로 가는 여객선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외나로도의 마을 주변을 한참 동안 서성거렸다. 내 고향이기도 한 동해의 작은 항구 거진의 어촌 풍경과 너무나도 흡사해 동네를 몇 바퀴나 빙빙 돌며 추억에 사로잡했다. 어판장에서 고기를 나르는 사람들과 말린 고기를 걷어들이는 사람들. 그리고 갓 잡아 올린 삼치를 경매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왁자한 어판장을 돌아 방파제로 나갔을 때 멀리서 여수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뿌웅--'하는 기적을 울리며 우리를 태우기 위해 항구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볼 일을 보다가 모두 한걸음에 선착장으로 몰려들었다. 묵직한 장비로 가득한 낚시꾼들과 울긋불긋한 양산으로 도배된 노인 원정대분들이 한데 섞여 외나로도항은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동해안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그런 풍경이었다.
후배 녀석과 나는 아침 8시에 서울에서 출발해 오후 2시 40분이 되어서야 거문도행 여객선을 외나로도에서 승선할 수 있었다. 297톤 규모에 344명이 정원인 이 여객선은 나름 쾌속선으로 거문도까지 대략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평일이라 만석은 아니었지만 1층 객실은 제법 꽉 들어차 있었다. 배는 거문도를 가면서 경유하게 되는 손죽도, 초도 등에 우편물과 살림살이 짐들을 부려야 했기 때문에 화물은 사람들보다 곱절이나 많았다. 그리고 흥미로운 풍경 중 하나는 낚시꾼들이 아이스박스를 엄청나게 실어나르는 풍경이었다.
"뭐야? 저거 다 갈치로 채워가지고 오겠다는 거야. 후아, 이 사람들 정말 대단하네. 낚시꾼들이야? 어부야?"
그러자 후배 녀석이 거보라며 저 정도는 잡아야 낚시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나참 복잡한 머리를 좀 식히려고 나선 길인데, 저 정도로 많이 잡아야 한다면 오늘 밤은 꼬박 새워가며 잡아야 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도 나는 내심 '에이, 설마 저 정도를 잡을 수 있겠냐' 이러면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리곤 에라 모르겠다. 암튼 일단은 이 잔잔한 바다 위로 펼쳐진 시원한 경치나 즐겨 보자고...
어느덧 여객선이 수많은 섬을 지나 초도에 도작했을 때 거기서 난 어릴 적 나를 보았다. 뭍에서 가져온 싱싱한 자전거를 할머니가 손자에게 건네주는 광경을 본 것이다. 저 길 너머로 섬마을 아이들 몇 명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내가 본 선착장의 꼬마는 이제야 자신만의 자전거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애끓는 마음을 한다. 물론 꼬마가 새 자전거를 사달라고 할머니에게 칭얼댔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릴 적 난 칭얼대지 않았다. 사실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그냥 막 나가 자빠지며 때를 썼다. 둘째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런 나를 늘 달래주었던 이는 언제나 할머니였다. 업어주기도 하고 사탕발림도 해주기도 하고 그것도 안되면 윽박지르기도 하셨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고 할머니는 늘 그런 나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첫 자전거는 그렇게 해서 생겼다. 투쟁을 거쳐 얻어낸 산고의 선물이었다. 그 자전거 생김새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자전거가 생각날 때마다 난 할머니를 생각한다. 할머니... 읊기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단어인가? 그렇게 할머니는 줄 수 없는 것까지 모두 다 내어주는 그런 존재였다. 외딴 섬에도 할머니는 있었다.
우리가 거문도에 도착한 것은 대략 오후 5시 정도. 거문도는 갈치 낚시를 준비하는 배들로 북적였고 여기도 낚시꾼, 저기도 낚시꾼 사방이 대부분 갈치낚시를 즐기려고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우리도 멀리서 오기는 했지만 강화도에서 버스를 전세 내서 단체로 낚시를 하러 온 낚시광들도 있었다. 난 갈치낚시가 처음이라 빈손이었지만 대부분의 강태공들은 빵빵한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전동 릴에 큼지막한 아이스박스 그리고 스페어 릴까지. 바야흐로 은빛 바다축제가 어불성설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여객선에서 내리자마자 부리나케 자신이 예약한 낚싯배의 선장을 찾기 시작했고 출선 준비를 서둘렀다. 오후 6시에 바다로 나가 다음날 4시까지 낚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도 미리 먹고, 용변까지 해결하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선착장의 한 식당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이차고 이윽고 경험담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다.
"어제가 대박이었다니까. 사람들이 박스가 없어서 고기를 다 버리고 갈 정도였다네. 아~어제 왔어야 하는데"
"오늘도 조황이 좋다고 합디다. 날씨는 더 좋다지 아마. 바다에 너울도 없고, 오늘 함 대박 쳐 보자고"
드디어 출항이다. 우리는 12인승 거문도의 비너스호라는 오영옥 선장의 배에 올랐다. 하지만 그날 5명의 예약자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졸지에 단촐하게 7명만 출조를 나가게 되었다. 배의 갑판을 널널하게 쓰게 된 우리는 기분이 좋았지만 느닷없이 5명이 펑크 난 선장의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리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비너스호의 선장님은 끝까지 기분 좋은 출조가 되도록 전문가답게 다양한 배려를 해주었다. 물론 갈치낚시 초보였던 나에게 낚시 방법을 자세하게 알려준 이도 바로 비너스호의 오영옥 선장이었다. 일단 2조가 한 배에 올라 방파제를 빠져 나가 다른 배에 올라서 각자 헤어지기로 했다. 포인트라는 배는 약간 신형이었는데 그 배를 탄 이들이 바로 강화에서 온 골수 낚시꾼들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낚시채비를 꾸리고 거문도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가량 더 내려가야 했다. 사람들은 마치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이동 중에 장비를 꺼내서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신중해서 충무공의 지휘를 받는 말단 선박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바야흐로 갈치의 노래가 온 바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낚시꾼들은 비장했다. 자기가 오늘 바다에 나온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도 있었다. 그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했다. 고기를 많이 잡고 못 잡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면 만사 시름이 다 잊힌다는 것이다. 그럴듯했다. 나도 그럴 것 같았다. 사람들의 입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건 제주 연안의 갈치들이 죽는 소리였다.
갈치 낚시는 해가 지고 난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갈치는 오징어처럼 불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집어등을 켜고 낚시를 해야 많이 잡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낚시 타임도 저녁시간에 주로 이동을 하고 어두워지면 포인트에 닻을 내린 후 본격적인 낚시를 시작하게 된다. 낚시가 끝나는 타이밍은 새벽 4~5시 정도다. 너울이 심할 때면 멀미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멀미약을 부착하거나 복용해야 한다. 멀미를 심하게 해서 낚싯배를 되돌려 오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 또 한 가지는 달빛이다. 달이 차는 보름에는 달빛 때문에 고기들이 바다 전역으로 다 흩어지게 되어 낚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물론 이런 날은 예약도 안 받는다. 하지만 오늘은 기상적으로는 완벽한 조건이었다. 바다는 너울도 하나 없는 장판지 수준이고 달은 아예 구름에 가려 먹먹하다. 배에 탄 낚시꾼들은 천운이라며 좋아했다. 너도 나도 만선의 꿈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분위기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 있지 않으면 절대 느낄 수 없는 묘한 감정이다.
갈치 낚시는 단순하지만 순서를 잘 지켜야 쉽게 할 수 있다. 먼저 릴에 낚싯줄을 메고 낚시 바늘을 단다. 낚싯바늘은 대부분 7개 정도를 매어 단다. 낚싯줄의 맨 아래쪽에는 무거운 추를 달아 물속에서 미끼가 빠르게 내려갈 수 있도록 한다. 미끼는 꽁치를 져민 것을 바늘 두 코로 꿰어 쓰기도 하고 갈치를 가늘게 비껴 썰어 바늘에 한 번만 꿰어 쓰기도 한다. 이렇게 갈치낚시에 갈치를 미끼를 쓰는 이유는 잘게 썰은 갈치는 바닷속에서 멸치처럼 보이기 때문에 갈치들이 잘 물기 때문이다.
이제 낚시추를 바다에 던진다. 왼쪽에 릴대를 놓고 차례대로 1번에서부터 7번까지 미끼를 꿰어 뱃전에 올려놓은 다음 맨 오른쪽에 있는 추를 바다로 휘리릭하고 던지면 낚싯바늘들이 차례대로 퐁퐁퐁 바다에 빠져 들어간다. 이때 릴대에서 낚싯줄이 줄줄이 빠져나가는 낚싯대를 여덟에서 열 번 정도 털어내면 대략 수심이 25-30미터 정도로 유지가 된다. 그 정도에서 릴을 닫아 추를 멈추고 입질을 기다린다..... 입질을 기다린다...... 입질을 기다린다....라고 여기까지 들었는데. 결과는 이게 아니었다. 입질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문다. 마구 문다. 뭔지도 모를 것들이 마구 물어댄다. 낚싯대가 휘청한다. 이리저리 마구 쏠린다. 감는다. 올라온다. 7개의 낚싯바늘에 힘 좋은 삼치 2마리 나머지는 다 갈치가 매달려 덜렁덜렁 올라온다.
이게 뭐여?
또 넣는다. 똑같다. 심지어 추가 내려가는 동안에도 마구 물어 재낀다. 주나라 문왕이 납시셨다. 해가 지고 집어등이 밝게 빛나는 바다 너울에 그가 나타나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뭐랬냐? 물 반 고기 반 이랬지. 암튼 많이 잡아라..."
그날 내가 밤새며 한 것은 낚시가 아니었다. 그건 어부들이 늘 하는 그런 일이었다. 갈치와 삼치들이 밭을 이루고 있는 포인트에서 내가 한 것은 그들을 그냥 뭍으로 꺼내어 내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복잡한 머릿속이나 한번 풀어보겠다며 반신반의했던 이 낚시 길은 물 반 고기 반의 놀라운 상황에서 그만 애초의 다짐이 초과 달성되는 기이한 효과를 거두었다. 거의 하룻밤 동안 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 무념의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놀랍고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낚시가 선의 경지라고 하면 그것은 기다림이라고 알고들 있겠지만 멈출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올라올 경우도 역시 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밤 깨달았다.
무념무상. 나는 바다에서 뭔가를 건져 올리고 있는 육신 그 자체였고 그런 나를 스스로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건 분명한 관찰이었다. 푸른 갈치가 낚여 올라올 때마다 나는 웃고 있었고 갈치는 나에게 얘기했다.
"어때 재밌냐? 너도 언젠가는 낚이게 될 거야. 알고 있지?"
"당근이지 이놈아.. 그래도 지금은 그냥 재밌다고. 안 그러냐?"
그날 밤, 후배랑 둘이서 아마도 대력 일인당 갈치와 삼치를 합해서 160마리 정도를 잡은 것 같았다. 스티로폼으로 된 아이스박스 대자 분량으로 3개 정도를 꽉 채웠으니 하룻밤 치고는 대단한 조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손가락 3~4마디 정도의 씨알 굵은 갈치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 많이 잡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고, 힘 좋은 삼치가 날카로운 이빨로 낚싯줄을 끊어놓는 통에 여러 번 낚싯대를 교체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을 빼면 필시 즐거운 만선의 낚시경험이었다. 특히나 잡아 올려지는 갈치를 물고 따라 올라오던 큼지막한 참문어가 거의 배에 올라올 즈음 바닷속으로 풍덩하고 빠져버려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문어까지 수확했으면 누구라도 부러워할 그야말로 대박이었을 터인데.
밤새 반복되던 갈치잡이 노동은 슬슬 낚싯바늘도 떨어져 나가고 몇몇 강태공들이 잠이 들기 시작하면서 열기가 잦아들었다. 아이스박스에 더 이상 갈치를 재워놓을 때가 없어지면서 드디어 마침표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 4시, 아직도 지구력 짱인 낚시꾼들은 꾸준하게 삼치와 갈치를 끌어올리고 있었고 선장과 나는 이제 슬슬 항구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바로 그때, 30미터 수심에 잠겨져 있던 갈치들이 물 위로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날이 밝고 있었다.
낚시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전리품은 갈치와 삼치가 가득 담긴 3개의 대자 아이스박스였다. 그날 밤 이태원 올댓재즈의 옥상에서 생선 파티가 열렸다. 식객의 저자 허영만 화백이 직접 삼치회를 뜨시겠다며 부랴부랴 달려 오셨다. 삼치회와 갈치구이 그리고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이 그날 밤의 성찬을 북돋아주었다. 갈치 여행의 뒷맛은 개운했다. 누군가가 말한 '물 반 고기 반'이란 개념은 멀쩡하게 바닷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갈치낚시는 추석 언저리가 피크타임이라며 씨알 좋은 갈치를 만나려거든 추석 연휴 때 꼭 한번 더 오라는 선장님의 말씀이 귓가에 정정하게 메아리친다. 언제 또 갈치낚시를 갈지는 아직 미정이지만 한 여름 밤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이보다 더 강렬한 게 있을까 싶은 멋진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