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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Mar 09. 2020

발터 벤야민으로 읽은 <스톤>

<스톤(STONE),2010_존 커랜>

                                                   

<스톤(STONE),2010_존 커랜>


영화, 알게 모르게 흥행에 실패하며 기억에서 사라져 갔지만 되새김질이 필요한 영화다. 심상치 않게 등장인물부터 먹어준다. 로버트 드니로, 에드워드 노턴, 밀로 요보비치로 호화롭다. 특이한 건 또 한 가지 있다. 영화의 전개, 즉 스토리가 매우 특이하다는 점이다. 제목은 스톤. 스톤은 에드워드 노튼의 극 중 이름이다. 아무래도 중요한 키워드로 봐야 한다. 



줄거리를 보자. 퇴직을 앞두고 마지막 일감으로 스톤(에드워드 노튼)의 가석방 심사를 맡게 된 잭(로버트 드니로). 기분 나쁜 눈빛과 거친 말투의 스톤을 보며 혐오감을 느낀 잭에게 어느 날 스톤의 부인 루세타(밀라 요보비치)가 찾아온다.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유혹하는 루세타의 거듭된 육탄 공세 앞에 경건한 기독교 신자인 잭은 마침내 허물어진다. 결국, 긍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쓴 잭 덕택에 스톤은 석방되지만 도덕적 죄책감에 시달리는 잭은 점점 타락의 길로 물들어간다는 내용이다. 


로버트 드니로와 에드워드 노튼은 그 인상만으로도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두 사람의 대립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스톤>은 분명 뭔가가 있어 보이는 영화다. 그러나 끝내 그 있어 보이는 분위기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 메시지는 짐작이 간다. 프롤로그로부터 짐작되는 속내는 죄의식을 품은 자가 심판자의 위치를 취하고 있는 형태에 대한 문제제기로 읽힌다. 하지만 그 읽힌다라는 의미 이상의 공감을 부여하지 못한다. <스톤>은 자신이 취한 설정 이상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범작이다. 선악의 경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같지만 모호한 선문답에 다다를 뿐, 그 고민에 관객을 동참시킬만한 자질을 얻지 못했다. 그저 물결처럼 상황이 흐르는 가운데서 바닥에 가라앉은 돌처럼 관객의 사고를 정지시킨다. 인상적인 출연진은 그만큼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지만 그 연기만으로 이 영화를 구원하기에는 너무도 버겁다. 그저 묵묵하게 감흥 없이 흐르는 사연의 끝에 무거운 공허함이 감상을 짓누르는 기분이다.  (무비스트)


비평가들은 감독이 걸출한 배우들을 앞세워 모호한 선과 악의 경계를 다룬 그저 그런 심리 스릴러를 만들었다고 평가했지만. 다시 보니 감독의 생각은 좀 다른 듯하다. 먼저 프롤로그를 보자. 여기엔 영화의 복선이 좀 깔린다. 지루한 일상생활을 벗어나려는 아내의 동요를 가족의 자해로 막아내는 잭(로버트 드니로)의 젊은 시절이 잠깐 나온다. 그리고 늙은 현재의 일상으로 바로 오버랩된다. 시간이 지났지만 잭이 하는 짓은 젊었을 때와 똑같다. 잭이 독실한 신자라는 설정이 무색한 이유다. 잭과 부인은 교회를 다니고 하느님을 믿는 성공회 신자지만 잭은 독실하지 않은 것처럼 표현된다. 

                                                                              


겉으로는 독실하게 교회를 다니지만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잭과 가상 종교지만 특정한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종교관에 눈뜨는 스톤은 영화 속 내내 대비된다. 잭은 몸이 자유롭지만 마음이 닫혀있는 현실상의 죄수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변질되고, 이에 반해 스톤은 갇혀 있는 공간에서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가석방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스토리 전개는 이렇듯 다소 시니컬하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뭘 말하고 싶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느낀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정도의 성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매우 심각한 듯 하지만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질리지 않게 재밌기도 하다. 하지만 그 위트가 영화의 지루함과 무거움을 살려내진 못한다.

                                                                                                                                                                   


다만, 이것저것 다 때려치우고 이 영화를 되새김질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뜬금없게도 영화 속에서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생각이 문득문득 읽혔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모든 예술작품의 모더니티는 '자기 지시성'이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자기 지시성이란 삶에 대한, 인식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태도인데, 말인즉슨 신화적인, 종교적인,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 스스로 내면의 가식을 지울 수 있는 그러한 태도들이 작품 속에서 보여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보여질 때만이 모더니티를 획득(관객을 설득할 주요한 메시지나 장치쯤 되겠다)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지루하지만 상당히 묘한 모더니티를 획득하고 있다.  

     

영화 <스톤>의 주제가 '시간이나 인물 등 주변에 의해 변질되는 삶의 진리'를 당사자 스스로 깨우치고 알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화두라고 명제했을 때, 잭과 스톤이 지니는 상대적인 이념(종교관과 일탈)들이 충돌하고 서로의 알레고리로 엮어지면서 각자 새로운 이념을 결정해나가고 있는 점은 잭 커랜 감독의 독특한 시선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건 탈 모더니티의 영역이다. 어떻게 보면 잭이 믿는 종교관, 삶의 가치관은 그의 삶의 역사 이전에 결정된 [그리스 비극]이고, 이에 반해 스톤이 가지게 된 종교관과 깨우침은 자신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 상태로 극적으로 등장한 [바로크 비극]이 지니는 성격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삶(역사)의 세속적인 전개는 인간(세계)의 고통의 역사다"라고 말한 발터 벤야민의 이념적 성찰로 주제를 개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또한 감독이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잭이란 인물이 마지막 장면에서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죽임을 당하는 벌'이 다시 윙윙 날아다니는 소리로 매듭지은 것은 이러한 메시지를 완성해주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린 허접한 결론은, 이 영화 자체는 무지하게 난해하고 지루하지만 거기서 하나라도 억지로 뭔가를 건져내 본다면, 그것은 인간이 지니는 진정한 삶의 가치, 진리의 삶이라는 것이 벤야민이 이념을 결정할 때 늘 강조하는 화두에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역사라는 것은, 혹은 인간 개인의 삶이란 "영원한 과정이 아니라 끝없는 해체의 과정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 한 편이 미세하게 변하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면 그건 지루하지만 조금은 좋은 영화일 수도 있겠다 싶은 구석이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는 후문이다.

 


존 커랜 John  Curran 감독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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