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취한 김에 _ 오즈 야스지로

오즈 야스지로가 지금, 이 시대 영화관에 자기 영화를 걸었다고 치자

by 다모토리


보이는가? 요란한 예고편도, “이번 주 박스오피스 1위!” 같은 붉은 글씨도 없이, 제목부터가 마치 오래된 달력의 날짜처럼 담담할 것이다. 포스터 한쪽에 누군가가 서 있고, 그 옆에 텅 빈 방이 있고, 창문 밖으로는 계절이 슬쩍 지나가 있다. 별것 아닌 듯한데, 그 “별것 없음”이야말로 오즈가 건네는 인사일 것이다.


나는 그 인사를 받으러 극장에 들어간다. 스크린은 크고, 좌석은 푹신한데,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딱딱해진다.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내 속에서 어떤 계산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90분이면 밥을 먹을 수도 있고, 일을 더 할 수도 있고, 사람을 한 명 더 만날 수도 있다. 90분이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쪼개 쓰는 자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무의식중에 장부를 펼친다. 내가 이 시간을 들였으니 무엇을 돌려받을 것인가.


그런데 오즈는, 그 장부를 찢어버리는 데 천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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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카메라는 낮다. 다다미 높이에서 사람들을 본다. 세상을 낮춰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앉아서 바라본다. 인물들은 큰 일을 벌이지 않는다. 누가 죽는다고 해서 울부짖지도 않고, 누가 떠난다고 해서 시끄럽게 싸우지도 않는다. 차를 따르고, 밥상을 치우고, 아이를 타이르고,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가 접는다. 그 사소한 동작들이 쌓여, 어느 순간 가족이라는 이름의 관계가 얼마나 무겁고 또 얼마나 허술한지 보여준다.


오즈 영화가 오늘 개봉하면, 관객들은 아마도 중반쯤에서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왜 이렇게 길지?”
그런데 그건 영화가 길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90분을 견디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즘 ‘맡김’을 잘 못 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내 손으로 조절할 수 있다. 속도를 올릴 수도 있고, 중간에 끊을 수도 있고, 마음에 들면 다시 돌려볼 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관은 그렇지 않다. 시작하면 끝까지, 남의 리듬을 따라가야 한다. 오즈는 특히나 그 리듬이 완강하다. 음악으로 등을 떠밀지도 않고, 사건으로 손목을 잡아끌지도 않는다. 그저 사람과 방과 계절을 놓아두고, 관객이 스스로 바라보게 한다.


그러면 관객은 ‘지루함’보다 먼저 불편함을 느낀다. 내가 쥔 통제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는 재미마저 내 뜻대로 나오길 바란다. 그런데 오즈는 말한다. 재미는 쥐고 흔드는 게 아니라, 앉아 있는 동안 스며드는 것이다. 그 말이 얼마나 낯선지, 우리는 90분 내내 몸으로 배운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을 못 견딘다는 사실이다. 오즈 영화에는 주전자, 복도, 전봇대, 빈 마당 같은 것들이 끼어든다. 누군가는 그걸 보고 “아무것도 안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장면들이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숙성시키는, 일종의 숨 고르기다.


문제는 우리가 요즘 숨을 고르는 걸 잘 모른다는 데 있다. 우리는 늘 다음 일을 준비하고, 다음 결과를 요구한다. 무엇이든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오즈의 여백은 발효가 아니라 정지로 오해된다. 관객은 영화 속 침묵을 기다리는 대신, 침묵을 심사한다. “이 침묵은 쓸모가 있나?” 같은 질문을 마음속에서 굴린다. 그러니 90분이 길어지는 게 당연하다. 영화가 길어서가 아니라, 관객이 계속 채점하고 있어서 길어진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오즈는 감정을 크게 폭발시키지 않는다. 대신 나중에, 아주 늦게, 관객을 따라 집까지 간다. 극장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집에 와서 전등을 켜는 순간 문득 가슴이 내려앉는다. 오래 못 본 부모의 얼굴이 떠오르고, “전화 한번 드릴걸” 같은 문장이 목에 걸린다. 오즈의 눈물은 상영관에서 터지는 게 아니라, 현관문을 닫고 난 뒤에 고인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감정도 빨리 확인하려 든다. 지금 울지 않으면 감동이 없는 줄 안다. 지금 웃지 않으면 재미가 없는 줄 안다. 늦게 오는 감정은 없는 감정으로 취급해버린다. 오즈가 건네는 잔열을, 우리는 ‘미지근함’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판단을 내려버린다. “별로다.” 그 판단이, 오즈가 가장 싫어했을 급한 결론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같이 앉아 있는 법’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영화관이 생활의 한 부분이었고, 함께 조용히 있는 일이 그렇게까지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영화관이 오히려 특별한 행사가 되어버렸다. 특별해질수록 사람은 ‘잘 보고 와야 한다’는 부담을 갖는다. 집중도 과업이 된다. 과업이 된 집중은 오래 가지 못한다. 오즈 영화는 과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함께 앉아, 사람을 보고, 방을 보고, 계절의 결을 느끼라고 한다. 우리는 그 단순한 요구가 이상할 만큼 힘들다.


그러니 “왜 90분이 힘들어졌나”라는 질문은 사실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왜 우리는 시간을 ‘사는 법’보다 ‘쓰는 법’에 익숙해졌나.
왜 우리는 경험을 맡기기보다 조절하려 하나.
왜 우리는 여백을 발효로 읽지 못하고 정지로 오해하나.
왜 우리는 감정의 잔열을 기다리지 못하고 즉시 확인하려 하나.
왜 우리는 같이 앉아 있는 일을 낯설어하나.




오즈의 영화가 지금 개봉한다면, 흥행은 장담 못 할 것이다. 대신 이상한 일이 하나 일어날 것이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누군가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자리에 잠깐 더 앉아 있을 것이다. 스크린이 꺼진 뒤의 빈 어둠을 바라보며, 마치 자기 집의 공기가 바뀐 것처럼 숨을 한번 고를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걸지도 모른다. “잘 지내?” 같은, 별것 아닌 문장을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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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영화는 언제나 별것 아닌 문장과 별것 아닌 침묵으로 사람 사이를 다시 잇는다. 우리가 90분을 힘들어하게 된 건, 영화가 변해서만이 아니라—그 별것 아닌 문장과 침묵을 너무 오래 잃고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