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자딸, 김진경. 그리고 엄마와 나를 이어준 멜
몇 주 전이었다. 매주 패널로 참여하고 있는 라디오방송의 원고 주제를 찾다 “멜”을 주제로 정했다.
책, 사전, 뉴스 등등을 찾아서 수집한 멜에 대한 정보들은 마음에 썩 들지 않는다. 바로 전화기를 들어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엄마는 멜 전문가이니까......
20년 전, 많은 집이 그랬지만 우리 집도 IMF라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피해 가지 못했다.
부유한 집은 아니었지만 나름 제주에서 아버지는 실력 있는 전기 기술자셨고
제주의 태풍이 한 번 씩 휘몰아치면 항상 전기 복구의 전두지휘는 아빠의 몫이었다. 자랑스러운 제주의 전기 장인이셨다.
그런 아빠가 한창 탄탄대로 가야 할 40대 중반의 1997년 어느 날, 실직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꽤 충격을 받으셨는지 집 밖으로 좀체 나가시질 않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셨다
나의 엄마는 가파도 토박이다.
가파도, 모슬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스무 살에 서울에 취직하겠다고 올라가서는 아빠를 만나 결혼을 하셨고
곧 아빠와 함께 제주에 내려오셨다. 제주의 여성들이 생활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엄마는 IMF 전까지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나의 기억에도 엄마는 한 번도 직장을 다니지 않으셨고, 하교 후 집에 도착하면 늘 우리를 반겨주셨다.
그런 엄마는 아빠가 갖다 주는 월급봉투를 받으면 쪼개고 쪼개 살림을 하시며 집도 장만했고 새는 살림 없이 알뜰살뜰하게 가정에 헌신하셨다.
그런데 아빠의 실직은 그런 엄마의 30대 후반 인생을 바꿔놓았다.
IMF가 닥쳤던 그 시절, 나는 고등학생, 여동생은 중학생, 남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나와 여동생의 학비도, 남동생의 학원비도, 한창 자라날 나이에 우리 세 아이들이 먹어야 할 식비도 당장 들어가야 하는 돈이 한 두 푼이 아니었다.
앞이 깜깜해진 엄마는 무슨 생각이신지 아빠가 타고 다니던 차를 중고로 넘기고 여기에 아빠의 퇴직금을 조금 더 보태 트럭 한 대를 사셨다.
우리집 차가 바뀌었다. 승용차에서 트럭으로.
지금도 기억이 난다. 파란 포터를 사셨는데 며칠 후 그 포터는 예쁜 초록색 뚜껑을 달고 다시 나타났다.
초록색 뚜껑을 단 파란 트럭이 집에 온 이후 엄마는 매일매일 전화기를 들어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확인하시고는 밤마다 사라졌다.
그리고는 새벽 혹은 아침에 들어왔다. 엄마의 옷에서는 쾌쾌한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그리고 그 쾌쾌한 비린내는 엄마의 파란색 트럭에서도 똑같이 진동했다.
그리고 그 이후 예쁜 초록색 뚜껑의 파란포터는 나에게 예쁜 트럭이 아닌 보고 싶지 않은 초록색 뚜껑의 파란 포터가 되었다.
등교할 때는 친구와 함께 버스로 등교를 하지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면 부모님이 학교에 오셔야 했다.
그 비린내 나는 파란 트럭을 타야 하는 나는 야간 자율학습 종이 울리기 무섭게
교문으로 가장 빨리 백 미터 달리기 하듯 늘 달려가 일등으로 교문밖을 통과했다.
다른 친구들이 교문으로 나오기 전에 먼저 엄마의 파란 트럭에 탑승하기 위해서다. 혹은 일부러 가장 늦게 나와 여유 있게 타던가!
예쁜 옷을 입고 세련된 엄마 대신 늘 작업복을 입고 향수 대신 비린내가 배어 있는 엄마가 나는 사실 부끄러웠다.
그래서 혹시 길을 걷다가도 찻길에 초록색 뚜껑이 있는 파란 트럭이 저 멀리서 보이면 황급히 골목으로 숨어버리고는 했다.
그것들과의 만남
어느 주말, 역시나 낮에 엄마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저녁밥을 차려 식구의 밥을 차린 후 주섬주섬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집에 있으면 공부하라고 잔소리할 게 뻔하고 엄마가 도대체 밤마다 어딜 가는지 궁금했던 나는 엄마한테 조심스럽게 따라간다고 이야기했다.
“엄마 나도 같이 가서 도와줄까?”
“아이고, 밤에 안 된다게. 집에 이시라.”
“아냐. 엄마 도와줄게. 나 옷 갈아입는다.”
사실 이때는 엄마가 뭘 하는지 궁금하기보다는 공부가 더 하기 싫어서 따라가는 게 맞다.
설마 트럭에서 공부시키겠어하는 생각에 무작정 엄마의 외출에 따라나섰다.
엄마는 외갓집을 가는 방향으로 차를 운전했다.
우리 집은 제주시내라서 외가인 가파도를 가려면 서부산업도로(지금의 평화로)를 경유해 약 한 시간 동안 운전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길이 잘 만들어질 때가 아니라 길이 무척 고불거리고 어두워 사실 밤 10시 넘어가기에는 무서운 길이다.
그렇게 그 어두운 길을 통해 한라산을 넘어 엄마는 모슬포항에 도착했다.
밤의 모슬포항은 낮에만 보았었던 내가 봤던 모슬포항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배들이 화려한 불을 단 채로 시시각각 항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상인들은 부둣가 선착장 바로 앞에서 컨테이너를 수십 개씩 쌓아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중에 젊은 여자는 엄마밖에 없었다.
거친 남자들이었고 혹은 더 나이 드신 아줌마들(대부분 남자와 같이 동행했다)이 간혹 계셨다.
엄마는 나보고 트럭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 두꺼운 작업복 잠바와 머플러, 모자를 쓰고(날씨가 꽤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생물을 받기 위해 거친 남자들 틈에 끼어 배가 뭍에 닿기 전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모슬포항은 엄마의 외가여서 아는 친척들도, 삼촌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한테 먼저 우선권을 주는 건 그 세계의 상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물론 열 컨테이너, 스무 컨테이너를 사면 삼촌들이 젊은 애기 엄마가 고생한다며 한 컨테이너 서비스(?)로 더 주기는 했지만
엄마도 똑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가격을 흥정하고 가격 흥정을 했다.
몇 번의 흥정 후 계약이 성사되면(?) 엄마는 그 배 앞으로 컨테이너를 가지런히 줄을 세웠고
삼촌들이 반짝반짝 거리는 그것들을 엄마의 컨테이너에 촤르르 쏟아냈다.
맞다. 그 반짝이는 그것들은 바로 멜이었다.
엄마는 매일매일 전화기를 들어 123번을 눌러 날씨를 확인해 혹시 풍랑주의보가 내려 배가 뜨지 않는지를 확인하고 밤마다 모슬포항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멜 컨테이너를 트럭에 가득 싣고 밤 11시부터는 한림, 애월, 하귀, 외도를 돌며 집집마다 배달하러 다녔다.
그 집은 엄마가 배달해 준 멜을 가지고 동이 트는 새벽에 조업하러 나가는 집이었다.
엄마한테 어떻게 이렇게 조업하는 집으로 배달을 하게 되었냐고 물어봤더니 몇 명은 소개해줘서,
몇 명은 무작정 마을을 돌며 조업하는 집인 것 같으면 들어가서 팔아달라고 해서 그렇게 알음알음 배달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슬포에서 해안마을을 따라 배달을 하며 집에 오면 새벽 3시나 4시.
혹은 더 늦으면 6시가 되니 내가 맡는 엄마의 냄새는 비린내 냄새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엄마가 원하는 만큼 멜 컨테이너를 받으면 그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갑자기 기상이 악화돼서 멜 잡이 배들이 멜을 못 잡고 일찍 온다거나, 양이 넉넉지 않으면 허탕 치고 그냥 돌아가는 일도 허다했다.
혹시 몰라 마지막 배까지 기다리는 초조한 엄마의 모습도 아직도 나에겐 선명하다.
다른 삼촌들이 모두 가고 혼자 남아 저 멀리 수평선에 있는 배가 항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 불 하나만 바라보았다.
엄마의 그 멜은 우리 집 생계가 달린 멜이었다. 허탕을 치는 날이면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그 자정이 넘은 시간 깜깜한 한라산을 혼자 넘어오시기도 했다.
졸리고 피곤하고 어둡고 무서운 그 길을 그렇게 혼자 다니셨다.
엄마는 그렇게 배달까지 마치고 새벽에 들어와 잠깐 눈을 붙인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일어나 우리 셋을 등교시킨 후 컨테이너와 트럭을 깨끗이, 아주 깨끗하게 청소하셨다.
아마 본인의 성격이 워낙에 깔끔해서 일수도 있지만 본인도 본인한테 비린내가 나는 걸 싫어하시지 않으셨을까.
밤낮이고 멈추질 않는 엄마의 하루
그리고 가끔 삼촌들이 넉넉하게 멜을 주거나 멜이 남으면 다시 그 멜들을 다시 트럭에 싣고 낮에는 중산간 마을로 무작정 운전하고 다녔다.
이런 날 엄마의 점심은 늘 빵에 우유였다. 그래서 엄마의 파란 트럭에는 늘 먹던 빵 봉지와 우유갑이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내가 매점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수다 떨며 먹었던 빵과 우유는 그 시절 엄마의 외로운 점심이었다.
엄마는 혼자 트럭을 타고 중산간 마을 여기저기를 다녔다.
“멜 삽써, 멜 삽써, 싱싱한 멜이 와수다. 멜 삽써”
“멜 삽써, 멜 삽써, 싱싱한 멜이 와수다. 멜 삽써”
이때 엄마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2020년 지금 내 나이도 서른아홉이다.
내가 기억했던 트럭 장수들은 나이가 많은 아줌마 거나 아저씨 거나 혹은 노부부이거나.
그렇게 밤낮으로 엄마가 부지런히 움직였는데도 돈으로 바뀌지 않았던 멜들은 결국 우리 집 밥상으로 올라왔다.
멜국도 올라오고 멜조림도 올라왔다.
그래도 남으면 멜을 꾸덕꾸덕 말려 멜 지짐을 해주기도 하고 그래도 남으면 멜젓을 담그기도 하셨다.
그때는 그런 엄마의 멜을 사실 밥상에서 만나기가 싫었다. 고기반찬이 더 좋았던 시기였다.
우린 그렇게 엄마의 멜로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했다.
아빠는 미안하셨는지 외가 친척들이 많이 있는 모슬포항에 단 한 번도 같이 가지 않았다.
본인도 박탈감이 너무 크게 오기도 했고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한 미안함이 있으셨으리라.
소위 잘 나가다 하루아침에 일을 잃으신지라 마음고생도 많고 또 나름 일을 찾아보려고
이것저것 알아보시려고 밖에 자주 나가기도 하셨지만 쉽지 않았다.
엄마의 밤 여정을 함께 다녀온 그 날 이후, 나는 학교에 안 가는 토요일은 늘 엄마와 함께 모슬포로 동행했다.
그날 엄마의 모습을 본 후, 엄마를 도와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반, 역시나 공부가 하기 싫어
좋아하는 연예인이 진행하는 라디오를 들으며 넘어가는 그 밤 시간을 즐기겠다는 마음이 반이었던 것 같다.
(사실 공부가 하기 싫어 함께 갔던 게 조금 더 크다)
배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엄마가 트럭에 있으라고 했지만 나는 목장갑을 끼고 트럭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엄마 옆에 섰다.
추울 줄만 알았던 바닷바람은 꽤 상쾌했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이 시원했다.
상인들이, 삼춘들이 나보고 기특하다며 엄마한테 내 칭찬을 했다. 엄마의 얼굴은 저 환한 멜 배의 전등처럼 밝게 차올랐다.
(삼춘:제주에선 여자 사촌 어른들을 삼춘이라 부른다)
난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2학기가 되기 전까지 토요일 밤, 엄마 트럭의 동승자가 되었고 엄마의 멜 컨테이너를 실은 파란 트럭은 내 아지트가 되었다.
엄마가 운전해서 멈추면 난 트럭에서 내려 짐칸에 있는 노란색 멜 컨테이너를 할아버지네, 삼촌네 집 앞에, 혹은 창고에 놓고
트럭에 올라타는 엄마의 파트너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엄마와 파란 트럭을 타고 엄마의 파트너가 되는 시간은 단지 친구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밤 시간뿐이었다.
여전히 친구들이 있는 곳이거나 학교 앞에서의 엄마의 파란 트럭은 나에게 빨리 숨어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아니었나 보다.
어느 날엔가 남편한테 멜 장사 이야기를 해 주었더랬다.
엄마는 그 시기에 내가 고등학생이라 부끄럽고 창피했을 텐데 엄마 도와준다고 그 밤에 잠도 안 자고 같이 다녀 준 진경이가 너무 고마웠다고,
옆에 있어 주는 것만 해도 너무 든든했다고 고백하셨다. 그 외롭고 깜깜한 밤에 함께 해 줄 딸이 있어 토요일이 기다려졌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 내가 어른이 되고,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되니
그때의 그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
10대여서 나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였지만 엄마도 한창 꾸미고 싶고 예쁘게 다니고 싶을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행여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는 부끄럽고 창피할 시기였고 엄마는 심지어 한 번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전업주부였는데
그렇게 트럭 하나를 타고 멜 삽 써를 외치며 제주도를 방방곡곡 누비셨다.
나도 우리 집에 전화기가 사라지기 전까지 습관이 하나 생겼다.
습관적으로 전화기를 들어 123을 눌러본다.
엄마의 멜 장사는 2000년이 돼서는 아빠의 재기로 그만두셔서 3년 정도였지만 난 20대 후반까지도 습관적으로 123번을 눌러 날씨를 확인하게 되었다.
“엄마. 나 고등학교 때 생각해 보면 엄마 정말 대단한 것 같아. 그때가 내 나이 정도였잖아”
“아이고, 그때야 나도 무슨 용기였는지 창피하지도 않고 겅 했던 거 닮아. 지금 하라고 하면 챙피행 못하켜”
“멜은 꽃멜이 최고고, 왕멜은 별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