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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제주댁 May 25. 2020

엄마의 숨겨둔 시크릿 레시피. 메밀조배기

제주사람들의 출산 후 산후보양식-메밀 조배기

제주여성이라면 이 음식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딱 하나이다.


아이를 출산했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제주음식 중 가장 기쁘고 축복이 넘치는

음식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인륜대사로 꼽힐 수 있는 혼례 때 먹는 음식이 아닐까 싶다. 제주의 혼례문화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가문잔치라고 불리며 일뤳잔치라 하여 7일 동안 잔치를 치른다. 이 긴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긴 음식은 돼지와 술이다. 제주의 전통혼례문화에 중심이 되는 사람 중, 돼지도감과 술도감이 있는데,  

도감이라하면 지금의 수쉐프?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돼지고기와 소주(고소리술)를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이유가 그만큼 제주 혼례에서 이 두 식재료가 중요한 음식임을 의미한다.


  돼지를 추렴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똑같이 공평하게 수육 석 점, 돗수애(피순대) 한 점, 마른 두부 한 점을 올린 반(접시)을 함께 나누는 괴깃반 문화를 제주가 가진 독특한 음식문화라 꼽는다. 이렇듯 제주의 혼례문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토종돼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재래 흑돼지는 집안의 중요한 행사를 대비하여 집집마다 돗통시에서 정성으로 키운다.


그리고 이 역할을 대부분 며느리 혹은 어머니의 몫이다.


 하지만 돗통시(제주재래식화장실)는 지금 민속촌이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전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짧은 기간 동안 7일 잔치로 치러졌던 제주의 잔치는 3일 잔치, 이틀 잔치, 지금은 당일 잔치로 호텔에서, 웨딩홀에서 축소되어 진행된다.

마을 사람 모두를 설레이게 했던 솔문도 자취를 감췄고,

육지의 폐백을 대신할 만 한 신랑상 신부상도 희미해졌다.

결혼식 도감들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이렇게 제주 잔치문화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강렬하게 남아있는 또 하나의 가장 기쁘고 축복이 넘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제주 여성들이 출산 후 먹는 그것, 메밀이다.



“출산하면 시어머니가 따뜻한 물에 메밀이랑 꿀을 풀어줘 나서. 그럼 그걸 후루루 마셔. 지금은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막 보고파”
  서귀포시 서광리의 김 씨 할머니(75)의 이야기다.
  그런데 필자가 지금까지 만난 제주의 할망들 중 꽤 많은 분들이 해산 후 어머니(혹은 시어머니)가 해 준 첫 번째 음식으로 이 뜨거운 물에 만 메밀 꿀물을 꼽으신다.


숙취 후 꿀물로 아린 속을 달래주듯이 해산 후 따끈한 메밀 꿀물로 해산 후의 고통을 달래주었던 이 음식은 제주 할망들의 기억에도 강렬하게 남아있는 제주여성들만을 위한 음식이다. 메밀도 귀하고 꿀도 귀했던 시절이라 꿀을 넣지 않고 먹은 어르신들도 꽤 있었다.


 알다시피 제주사람들에게 메밀은 궂은 피를 삭혀주는 데 탁월한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연히 메밀가루는 요리를 해서 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물에 그냥 타서 후루룩 마셨다니, 또 어느 할망은 출산 직후 시어머니가 제주의 전통주인 오메기술에 메밀가루를 타서 한 대접 줬다고 한다.

귀했던 오메기술에 귀한 메밀 가루라…….

뭔가 제주인의 출산에 대한 경외와 감사를 담은 할망들의 음식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제주 음식을 거의 다 먹어보았다고 자부하는 필자도 서른 살이 넘도록 접하지 못했던, 아니 정확하게는 무슨 음식이었는지도 몰랐던 제주 음식이 하나 있었다.


  바로 메밀조배기.
  모멀조베기, 모물조배기, 궁둥조배기…….

마을마다 집집마다 특색 있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음식은 앞 서 이야기했던 윗세대가 먹었던 메밀 꿀물을 요리로 승화시킨 음식인 듯 보인다. 메밀조배기를 언제부터 먹었는지는 아직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해산 후 메밀 꿀물과 메밀조배기를 같이 해서 먹었었는지, 메밀 꿀물만 먹다가 이후 메밀조배기로 요리를 해서 먹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해산 후 먹은 메밀음식을 여쭤보면 60~70대 이상 제주의 할망들의 기억에는 주로 메밀 꿀물이었고, 지금 30대~50대의 기억에는 메밀조배기다. 언제부터 제주여성의 산후 보양식으로 메밀이 선택되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필자가 32살에 첫 아이를 출산하고 집에 들어온 날,

식탁위에는 난생처음 보는 알 수 없는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회색빛이 도는 탁한 국물에 둥둥 떠 있던 몽글몽글한 수제비, 그리고 무와 약간의 미역이 들어간 낯선 음식.


  오합주부터 돼지고기엿, 새끼보회까지 제주 맛 미식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제라진 제주 음식은 다 먹어보며 커왔다고 자부했는데 이 음식은 낯설어도 너무 낯설다. 출산하고 힘들게 식탁에 앉았는데 옥돔미역국, 성게미역국도 아닌 뜬금없는 수제비가 뭔 일이냐 하며 한 술 떠 보았는데 세상에, 생각했던 밀가루의 쫀득함은커녕 너무나 부드럽게 잘리면서 술술 목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간다. 여기에 허한 속을 꽉꽉 채워주는 폴폴한 뜨끈함까지 배어 있다. 쌉싸래하고 구수한 메밀 향과 어우러지는 달큰한 무와 바다 향 가득한 미역의 조합은 자청비가 제주의 자연을 그대로 담아 제주의 여성에게 주는 출산선물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내 바닥을 싹싹 긁어내게 된다.

  벌어진 뼈와 치아에 무리가 가지 않게 수제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방법도 육지의 그것과 다르다. 메밀가루에 물을 개어 숟가락으로 섞어 숟가락으로 제법 묵직하게 반죽이 되었다고 느낄 정도로만 반죽한다. 육지의 수제비의 맛은 수타 식이라면, 제주의 메밀조배기의 맛은 숟타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옛날 방식을 따르면 따로 육수도 내지 않은 물에 무만 넣고 끓이다 이 묽은 메밀반죽을 숟가락으로 뚝뚝 떼어 넣는다. 이때 숟가락에 반드시 육수 물을 묻혀가며 메밀반죽을 떼어내야 숟가락에서 미끄러지듯 육수로 들어가는 재미있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메밀반죽이 묽을수록 산모의 치아에 무리가 가지 않는 부드러운 메밀조배기가 완성이 된다. 여기에 약간의 미역과 간장만 들어간 메밀조배기는 제주를 대표하는 제주여성들의 산후보양식이 된다. 따로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자연이 준 천연 MSG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한 그릇이 된다. 심지어 제주의 산후조리원에도 이 메밀조배기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나온다. 그만큼 제주 여성들에게 이 음식은 산후 보양식으로 중요하다.

 내 인생 첫 메밀조배기를 만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문득 든 생각,

친정엄마는 이 메밀조배기를 왜 하필 그날,

딸이 출산한 다음 집에 온 날 처음 만들어 상에 올렸던 걸까?


 메밀조배기는 제주여성들에게 평상시에는 보여주고 않고 꼭꼭 숨겨 두었다가 딸이 출산을 하면 가장 먼저 정성으로 꺼내는, 할머니가 된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히든카드 같은 건 아니었을까?


집안의 혼사가 정해지면 제주여성들이 자릿도새기(새끼돼지)를 마련해 돗통시에서 정성으로 키워 결혼을 준비한 것처럼 출산일이 정해지면 제주도에서 가장 좋은 메밀을 집으로 들여와 정성으로 마련해두었던 제주의 할망들은 각각의 집에 들어온 여신들, 자청비이다.



 엄마가 해 준 음식 중, 여러분을 위한 가장 소중한 음식은 무엇인가요?
 오늘은 엄마의 부엌에 들어가서 엄마를 위한 나만의 가장 소중한 음식을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



메밀반죽을 숟가락으로 떠 넣어가며 만든 메밀100% 제주식 출산보양식 조배기


일러스트<이로이로>


딸~

조배기는 국물까지 후루룩 다 마셔야 해!

그래야 젖도 잘 나오고 몸안에 굳은 피가 다 빠져나가.

남기지 말고 꼭 다 먹어야 해

(엄마에겐 여전히 늙은 딸도 애기인가 봅니다)




 콘텐츠는 작가가 <제주의 소리> 제주댁, 정지에書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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