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사랑하고도 잊지 못하는 사람

영화 '페인티드 베일' 리뷰

by 이세일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는 책 제목처럼 남녀는 태생부터 삶의 방식과 생각이 멀리 떨어져 있는 별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이라 할지라도 남녀가 사랑을 만들고 키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멀리 있던 남녀가 갈등을 이기고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 가기에 엔딩 크래딧이 올라갈 때 쉽사리 영화관을 떠나지 못하는데 이것이 감동의 힘이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은 사랑 없이 시작한 남녀의 결혼이 가지고 있는 갈등과 추함을 극복하고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답게 변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아쉬운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 짧았고 비극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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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갈색으로 처리된 화면의 첫 장면은 자욱한 안갯속에서 항해하는 배들을 보여준다. 정적인 아름다움이 표현된 화면은 현란하게 움직이면서 많은 장면들을 일거에 보여주기에 어지러운 느낌조차 있다. 이윽고 초록색으로 가득한 중국의 농촌이 나타나며 주인공인 월터와 키티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남편 월터는 양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무거운 얼굴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고 아내 키티는 남편과 120도 정도 틀어진 방향을 바라보며 서있는 뒷모습만 보인다. 이 첫 장면만으로도 이들 부부가 어떤 갈등 속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춤과 예술적 감성을 즐기는 키티(나오미 왓츠)는 일상의 무료함속에서 살고 있다. 더군다나 엄마는 결혼은 생각도 없는 딸을 보며 못마땅해한다. 이런 시선 때문에 키티는 사랑이 없는 결혼을 즉흥적으로 결정한다. 상대는 영국 정부에 속해있는 세균학자 월터(에드워드 노튼)다. 사교 모임에서 만난 월터는 키티에게 춤을 청하고 바로 키티의 부모를 만나 청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도 청혼을 받아들이지만 현실 도피나 마찬가지였다. 월터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진실하고 착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은 무척 서툴다. 춤과 테니스를 좋아하는 아내의 특성을 모르고 그는 아내를 위한다며 미술관으로 끌고 가고 비가 내리는 날 키티는 창밖을 바라보며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있어요?”

라고 말하지만 월터는 타자기를 두드리며 자신의 할 일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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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두 사람은 부부지만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다. 어느 날 매력적인 외모와 부영사관이란 신분을 가지고 있는 찰리 타운센트(리브 슈라이버)로부터 파티 초청을 받고 두 사람이 참석한다. 이때 키티는 세련된 매너와 생각이 통하는 찰리와 불륜에 빠진다. 아내의 부정을 눈치챈 월터 앞에서 자신은 찰리를 사랑한다며 이혼해 줄 것을 요구한다. 똥 싼 놈이 성낸다고 그녀는 월터 앞에서 당당하다. 이때 찰리는 키티에게 이렇게 말한다.

"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찰리가 반드시 자신의 아내와 이혼을 하고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해야지만 조용히 이혼을 해주겠소."

키티는 찰리를 믿었다. 그는 당연히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과 새로운 출발을 할 줄 믿었다. 그러나 찰리는 비겁했고 그녀는 월터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월터는 드러나지 않는 잔인한 방법으로 키티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절대로 키티의 눈을 쳐다보며 이야기하지 않고 모든 일에 건성이고 부부관계도 없다. 더군다나 그는 키티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 콜레라가 번지고 있는 중국 남서부의 오지 마을 메이탄푸에 자원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보이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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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중국에서 찰리는 콜레라에 감염된 메이탄푸 주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다. 그 마을의 콜레라가 사라진 것은 순전히 그의 힘이었다. 반대로 키티에게는 그곳에서의 삶은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고 집안에서 무료하게 하루를 보내며 내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녀님이 운영하는 보육시설로 자원봉사를 나간 키티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기쁨을 얻는다. 곁눈으로 흩어본 남편 월터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내로서의 측은한 감정을 느낀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어야겠다는 키티의 생각은 서서히 두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게 되고 드디어 부부로서 누리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너무 짧았다. 월터는 콜레라에 감염이 되고 그는 키티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말한다. 사랑의 위대함은 상대방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그 옆에 있어주는 것이 아닐까? 키티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한다. 이때 윌터가 키티에게 말한다.

”용서해 줘“
“당신은 잘못 없어요. 정말 미안해요”

키티의 눈물은 오열로 변하고 두 사람은 뒤늦게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 늦게 깨달은 사랑은 아픔이 있다. 후회가 99%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월터는 아내의 불륜을 용서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하게 아내를 무시하며 무관심으로 대했고 심지어는 콜레라가 만연하는 오지로 아내를 끌고 왔다. 그것이 월터의 복수 방법이다. 키티는 자신의 마음을 들뜨게 했고 대화가 통하는 남자를 참사랑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에게 온 줄 알았던 남자는 비겁했고 키티의 사랑은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다. 그녀는 아팠기에 월터에게 용서받고 싶었고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랑은 때로 어긋나지만 그것이 참 사랑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요즘처럼 황혼 이혼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보면 많은 시간이 지나도 완성되지 못하는 사랑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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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키티는 장미 한 송이를 손에 잡고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쓸데없는 일이야 일주일이면 시들 텐데 돈이 아깝잖아?”
“그래도 예쁘잖아요?”

아들의 한마디 말에 그녀는 웃으며 장미가 포함된 꽃을 산다.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은 어쩜 일주일 정도밖에 생명력이 없는 장미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장미꽃이 시든 다고 해서 호박꽃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장미처럼 시간과 상관없이 영원히 아름답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들려지는 아이들의 노래는 그러기에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프랑스 민요라고 하는데 ‘A La Claire Fontaine’번역하면 ‘맑은 샘에서’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노래 속에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오랜 세월 그대를 사랑했고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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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티는 비록 늦었으나 ‘오랜 세월 그대를 사랑하고,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랑’을 알았기에 그녀의 표정은 밝고 빛난다. 연인보다 부부끼리 앉아서 보면 좋을 영화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중국의 풍경들은 동양화처럼 은은한 아름다움이 있고 랑랑의 피아노는 영화 속에서 춤을 추며 놀고 있다. 그리고 약간 어눌해 보이지만 진정성이 느껴지는 에드워드 노튼의 모습은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킹콩’에서의 아름다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나오미 와츠의 모습은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지만 그녀는 이제 배우보다 여자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는다. 꾸미지 않은 모습의 아름다움이 넘치기 때문이다. 이 영화 극장에서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클 정도로 가슴에 남는다. 기회가 된다면 꼭 넓은 화면으로 보고 싶은 매력이 있기에 추천하고 싶다.

배경음악은

영화 '페인티드 베일' OST 중에서 사티의 - 그노시엔느 1번입니다.

https://youtu.be/J17Wlk-Wl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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