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영화 '헤어질 결심' 리뷰
사랑 때문에 자신을 파멸시킨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사랑에 배신당하고 기찻길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 안나 카레니나, 어리석은 사랑에 목숨을 바친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 지켜봐야만 했던 사랑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베르테르. 그리고 이 모든 사랑을 아우르는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기에’를 들으면 사랑은 마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한 마성을 부인할 수 없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문학을 통해 알고 있던 모든 사랑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오랜 여운으로 남아있는 영화다. 만든 사람의 이름이 자막으로 올라가며 정훈희와 송창식의 ‘안개’가 엔딩송으로 흐를 때 차분히 앉아 서래의 아픈 사랑을 생각한다. 평생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그녀에게 짧은 순간 삶의 기쁨과 아픔을 알게 한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서래와, 그녀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바닷가를 헤매며 울부짖는 해준의 모습은 좀처럼 좌석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먹먹한 감정을 갖게 한다.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이 사건의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은 영화 속에 등장했던 형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신사적이고 지적인 인물이다. 사건을 추적하기 위해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와 처음 마주하게 되는데
“따님이신 모양이죠?”라고 물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부부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마침내“라는 단어는 ‘드디어 마지막에는’이라는 뜻이 있기에 서래는 ”은근 남편의 죽음을 기다렸던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 더군다나 그녀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해준은 보통의 유가족과 다른 서래를 용의선상에 올리고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 탐문과 조사, 잠복수사를 통해 서래를 조사하지만,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된다. 한편 서래의 모습은 차갑지만 어딘지 모르게 외로움이 느껴지고, 깊은 눈빛을 통해 연민을 갖게 하는 신비한 여인이지만 팜므파탈의 모습도 간간이 비치기에 서래가 범인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서래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망설임 없이 해준을 대하는데 이때 해준으로부터 서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시작된다.
진실을 숨기는 서래
의심에서 관심, 믿음으로 변하는 해준의 마음
영화 헤어질 결심은 2개의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둘 다 서래 남편의 사망사건을 다루고 있다. 첫 번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3개월 전 산 정상에서 추락해 사망한 남자였고 두 번째 살인사건은 아내의 직장이 있는 이포로 전근한 해준 앞에 나타난 서래의 새로운 남편 호신(박용우)의 피살이다.
영화는 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스릴러적 장르를 사용하고 해준과 서래의 아픈 사랑을 위해 로맨스 장르가 혼재되어 있기에 이해하기 어렵게 진행이 된다. 곳곳에 숨어있는 상징을 발견해야 하고 해석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영화가 다가올 수 있기에 흥미와 오락 영화를 좋아한다면 이 영화는 수면유도제로 제격이다.
그러나 해준과 서래 두 사람의 감정을 찾아가며 그 아픈 사랑에 공감한다면 분명 내 인생의 영화로 남는다. 흥행성적은 화려하지 않지만, 이 영화를 두 번, 세 번 관람하는 마니아들이 많은 것을 보면 호불호가 분명하다.
사랑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육체로부터 시작되는 사랑과 마음으로 시작되는 사랑이다.
사랑을 지하철 환승 정도로 생각하는 요즘의 사랑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인 경우가 많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철저하게 순결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공감하지 못하지만 매도할 필요는 없다. 몸으로부터 시작한 사랑도 아름답게 묘사된 것이 많고 몸이 먼저냐, 마음이 먼저냐를 떠나 그 사랑의 순수성을 생각해보는 것이 우선이다.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이 영화 '헤어질 결심'이다. 남녀가 만나자마자 호흡이 뜨거워지며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것은 너무 흔한 스토리이기에 식상한데 이 영화는 육체가 뜨거워지는 사랑은 없다. 다만 두 사람의 사랑이 진행되는 감정에 유의해야 한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두 사람의 내면은 마치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모호하기에 대사나 배경, 심리 등을 긴장된 마음으로 봐야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해준의 사랑은 파도처럼 격정적으로 다가왔고
서래의 사랑은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은 두 가지다.
박찬욱 감독은 사랑을 정교하게 짜진 미장센을 사용하기에 화면에 가득한 상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를 보는 훈련이 안 된 관객들에게는 ”뭐야?, 뭐지?“라며 빠르게 지나가는 화면을 보며 물음표를 남발한다. 그만큼 감독은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불친절하다. 반면에 이 영화 속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담은 대화가 넘쳐난다. 연애편지를 쓸 때 인용하면 딱 좋을 명대사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박 감독과 함께 여러 작품을 협업한 정서경 작가의 힘이다.
실타래처럼 엮인 두 사람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서래의 고백이 대표적이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어요.”
사랑에 대한 비유 가운데 하나가 타이밍이다. 흔히 연애의 선수는 당기기와 풀기를 교묘하게 사용해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하는데 서래와 해일은 처음에 함께 사랑에 빠져들었지만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감정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유는 연애의 선수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가장 숭고한 사랑의 가치인 자기희생만이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서래는 한국말에 익숙지 않은 중국 교포기에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일에 서투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해준은 첫 만남부터 서래에게 깊은 호감을 표현하는데 사랑의 시작임을 알 수 있다. 취조를 당하는 서래에게 해준은 자신도 먹을 수 없는 비싼 시마스시를 사비를 들여 먹게 한다. 그리고 다정하게 두 사람은 치약을 짜주며 연인의 모습을 연출한다. 그러나 해준의 사랑이 끝나고 거래가 두 번째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취조를 받을 때 해일은 핫도그 하나를 식사로 건넨다. 사랑이 끝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 보고 웃었는데 해준 뒤끝 있다 ㅎㅎ)
해준은 한 번도 서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공공질서를 수호하는 형사라는 직업의식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래는 해일의 눈빛, 언어, 행동을 통해서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첫 번째 남편이 살해되었을 때 해준은 사랑 때문에 판단력을 잃었고 결국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해일의 진심을 알게 된 후 서래의 사랑이 시작되기에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되었어요”란 서래의 진심을 알게 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해준)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서래)
첫 번째 살인사건이 종결된 후 해일은 아내가 근무하고 있는 이포로 전근한다. 13개월이 지났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시장을 걷고 있는 해준 앞에 서래가 두 번째 남편 호신과 함께 나타난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남편 호신(박용우)이 살해되고 해준은 이 사건을 맡게 되는데 첫 번째 용의자는 서래다. 그녀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는 해준은 서래에게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며 화를 낸다. 서래가 자신을 이용해 살인자의 혐의를 벗었다고 생각한 해일은 이번에도 자신을 이용해 이 사건의 용의자에게서 벗어날 것이란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런 해준에게 서래는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되묻는다.
해준은 첫 번째 남편 살인사건의 결정적 증거물이 된 핸드폰을 서래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이 폰만 없으면 서래는 혐의를 벗을 수 있지만 해준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다. “난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며 내면의 아픔과 고통을 털어놓는다. ‘붕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몰랐던 서래는 인터넷을 검색해 그 뜻이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때 서래는 자신을 위해 기꺼이 붕괴된 해준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게 된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해준의 표정, 말, 행동을 통해 그의 세심하고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해준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 서래는 해준에게 직설적으로 말한다.
“당신 생각이 났어요.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서래의 이 고백은 이 사랑의 종말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를 말해준다. 서래의 핸드폰 속에 남겨진 대화를 듣고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챈 호신(박용우)은 해일의 아내에게 그 사실을 까발리려고 하고 서래는 해준을 보호하기 위해 또 하나의 살인을 계획한다. 평생 남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사랑을 받지 못했던 서래는 짧은 순간이나마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알게 한 남자인 해준을 붕괴에서 일으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해준을 그리워하며 서래는 가지고 온 양동이를 사용해 바닷가에서 웅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자신이 들어가 생을 마감할 자리를 준비하는 것이다. 뒤늦게 서래의 진심을 알게 된 해준은 서래의 이름을 부르며 미친 듯이 바닷가를 헤맨다.
이 영화가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 때문이다.
서래가 생을 마감하기 위해 파놓은 웅덩이 옆에 쌓아 올린 모래성이 바닷물에 의해 침식되며 붕괴되는 장면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서래의 사랑에 감동하기 때문이다.
세속의 삶으로 인해 순수함이 침식당할 때, 현실에 치여 이상이 보이지 않을 때, 괜히 사람이 미워지고 가슴에 상처가 있을 때 로맨스 영화를 보며 혼자 감동한다.
“삶이 메마르지 않았으면, 작은 것에도 가슴이 뛰고,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었으면”
이것이 로맨스 영화가 가져다주는 감동이다. 좋은 영화는 생각거리를 많게 해 주고 해석도 다양하게 만들어 주기에 기회가 된다면 재관람하고 싶은 영화다.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 이 영화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친다.
"이전 영화들에서 말초신경 자극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고, 그런 영화를 의도했다. 전작들은 정말 관객에게 막 들이대듯이 바짝 눈앞에 갖다 대는 류의 영화였다"며 "이번에는 감정을 숨긴 사람들의 이야기인 만큼, 관객들이 저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싶었다. 미묘하고 섬세해야 하고, 변화를 잘 들여다봐야 하므로 다른 자극적인 요소들은 낮춰야 했다“
배경음악은 '헤어질 결심'의 앤딩에 흐르는
송창식과 정훈희의 '안개'입니다.
가사)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엔딩곡 안개/정훈희 &송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