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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y 27. 2024

가족과 인연을 끊었다

헤어질 결심

4년 전, 나는 가족과 멀어지기로 결심했다. 정확히는 아빠의 연락은 완전히 차단했고 엄마와는 가끔 카톡으로 안부를 묻고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것이 전부다. 아빠의 번호를 차단하고 나서야 매번 나를 괴롭히던 장문의 문자와 카톡, 저주에 가까운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 삶에서 단 한 사람이 지워졌는데 삶은 굉장히 평온해졌다. 더는 아빠 때문에 기분을 망치는 일도, 언제 화를 낼지 몰라 불안해할 일도 없었고,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상냥한 딸의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내게 엄청난 해방감을 안겨줬다.


우리 집은 늘 살얼음판 같았다. 아빠는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분다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던 사람이었다. 잘 되면 자기 덕, 안되면 남 탓, 본인 뜻에 따르지 않으면 부모든 배우자든 자식이든 가릴 것 없이 내키는 대로 욕을 해댔다. 누가 옆에 있든 말든 그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견뎌야 했다. 그의 그런 패악질이 우리 집에서는 너무 당연해서 누구도 그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우리 집에서 군림하는 폭군이었다.  


나에게 집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아빠의 헛기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 사람의 발걸음 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그 사람의 온갖 짜증과 불평불만이 가득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발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이었다.


가족이라는 굴레

꽤 오랫동안 가족을 증오하는 내가 못된 거라고 자책하며 가족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수도 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평화는 오직 그 사람 앞에서 굴복하고 복종할 때만 가능한 것이며 그 또한 보장된 것이 아니었고, 언제든 그 사람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 엄마에게 아빠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을 꺼냈을 때,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부모가 잘못해도 어떻게 부모 자식 간에 연을 끊을 수 있냐며 나를 나무랐다. 내가 우울증을 겪는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용납하지 못했고, 오히려 본인의 불쌍한 인생을 보고 자랐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비난했다. 나의 우울조차 엄마는 정신력이 약하다며 내 탓으로 돌렸다.    

어느 날 또 이유도 없이 저주를 퍼붓고 욕을 하는 아빠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온갖 모욕을 뒤집어쓰며 생각했다.

‘이 사람 앞에서 죽는 것이 편할까, 이 사람을 죽이는 게 편할까.’  


나는 더 이상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즈음에는 강박과 불안이 나를 집어삼킨 상태였고, 꼬리의 꼬리를 물고 하루 종일 떠다니는 무서운 생각들을 그만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부들부들 떨며 나도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고 절절 우는 모습을 보고서야 엄마는 내게 더는 아빠를 이해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 마음 편하게 살아."


불편한 평온

아빠와 인연을 끊는 것에 엄마의 동의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당시에도 서른 중반을 훌쩍 지난 나이였고, 얼마든지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돈도 벌고 있었다. 그럼에도 쉽게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했던 건 부모를 부정하는 무거운 죄책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다른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 같은 것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무색하게 지금 나는 태어나 가장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짓누르는 죄책감을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그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잦아든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극복했지만 문득문득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슬픔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그 또한 내 선택이기 때문에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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