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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Nov 01. 2022

한양도성길에 다시 오르게 될 날을 생각하며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등산의 재미에 빠졌었다. 산에 오르고 내려오는 일보다는 한 번씩 앉아서 쉬어갈 때의 느낌이 좋아서 산을 찾았다. 산을 타며 지친 몸은 잡념을 잊게 한다. 오로지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에 집중하며 깊은숨을 내쉴 때의 쾌감은 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벅차오르게 했다.


나는 한양도성길에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창의문을 시작으로 성북동이나 삼청동 쪽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선호한다. 창의문에서 시작하는 코스는 가파른 계단으로 유명하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높고 높은 계단을 다 오르면 그때부터 내리막과 평지가 이어진다. 앞서 고생을 하면 순탄한 길을 맞이하게 되는 셈이다. 만약 성북동으로 내려가게 되면 맛있는 돈가스 집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금왕돈가스' 라든지, '오박사네 왕돈가스'는 때때로 등산보다 중요한 목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삼청동의 경우 성북동보다 긴 코스로 더 걷고 싶을 때에 주로 선택하는 길이었다.  


처음 이 코스를 경험했을 때가 생각난다. 부암동에는 한양도성길에 오르려고 가진 않았었다. 일요일이었다. 나는 뭔가라도 하며 스트레스를 풀어야 월요일인 내일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말 아침, 무기력감이 찾아왔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우선 씻고 그다음에 생각하자' '머리가 젖었으니 우선 머리부터 말리자' '다 씻었는데 안 나가기 아까우니 우선 옷을 입자' 하는 과정을 하나씩 거치며 현관을 나서는 데 성공했다.


나는 부암동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래서 경복궁 쪽으로 넘어가는 길을 걸어볼까 했다. 버스를 타고 부암동에서 내려 창의문을 지났을 때였다. 아파트 두 층 정도 되는 계단을 발견했고, 몇몇 사람들이 그곳으로 오르는 것을 보았다. 평소라면 분명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지, 저 길 너머로 뭐가 나올지 궁금하지만, 실패할까 봐.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 봐 무섭다' 하며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시 내려오더라도 한번 올라가 보자' 하는 마음이 위험을 회피하려는 마음을 물리쳤다.


그렇게 올랐던 첫 한양도성길에서 나는 행복감을 느꼈었다. 당시의 나는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끝나더라도 지금과 같은 행복을 자주 느끼고 싶다'라는 생각을 크게 가졌었다. 그만큼 행복했고, 그 순간보다 더 행복한 일은 나에게 없을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나는 그 이후로 한양도성길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처음 걸었을 때만큼 깊은 감정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내 삶이 최근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힘들었었다. 거듭되는 과중된 업무로 사적인 생각은 잠시도 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호의를 가지고 다가온다는 걸 알았음에도 하나의 일처럼 느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만큼 바빴고, 일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과열되어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주말이 되면 무기력한 시간이 줄곧 찾아왔고, 그러한 시간들 속에서 만난 산속의 자연은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 근원적인 품처럼 느껴졌다.


반면에 백수로서의 삶이 이어지는 현재에는 이렇다 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물론 취업에 대한 걱정은 있지만, 그간의 삶을 돌아보며 언젠가는 취업을 하게 될 거라는 믿음으로 금세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나는 현재 어느 정도의 규칙을 가지고 생활은 하고 있지만, 직장인만큼 엄격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나는 매일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지만, 피곤하다고 느껴지는 날에는 1시간 정도 낮잠을 자기도 한다. 이처럼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 허용적인 삶에서는 직장인으로서 제한적인 삶을 살 때보다 내면이 평화롭다. 그러나 행복감을 느낄 때의 경험 정도가 백수일 때보다 직장인일 때가 더욱 강렬하고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나는 한때 스트레스가 없는 삶을 꿈꿨다. 자극을 회피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선택하는 상황을 최소화하고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면 꿈에 가까워질 거라 상상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없는 삶은 없었고, 자극 없는 삶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살아가며 숱한 자극에 노출되었고, 그에 따라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스트레스가 두려워 자극을 회피할수록 자극을 유발한 상황이 마음에 남아 스트레스를 끊임없이 생성했다.


백수로서의 삶에 익숙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집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하며 시작하는 하루가 편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양도성길에 처음 올랐을 때의 그 감각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알고 있는, 느낄 수 있는 최고조의 행복감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괴로울 때에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나를 다시 스트레스의 굴레 속으로 밀어 넣는 학대를 자행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회사에서 겪었던 많은 어려움들을 퇴사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돌아보았으니, 이제는 업무의 굴레에 다시 빠지게 되더라도 쉼이 필요할 때를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겠다는 성찰의 열매가 나를 지켜줄 거라 믿는다.


나는 다시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고, 그 자극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나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가고 싶다. '나는 얼마나 변해있을까?'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자처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기꺼이 감당해보고 싶다. 조만간 하게 될 업무에서, 취업하게 될 직장에서 '스트레스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또한 답하는 나를 새로이 경험하며, 낯선 마음으로 한양도성길에 오를 날을 기대하게 되는 순간이다.

             

Image by djedj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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