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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by 두근거림

상담심리사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곳에서는 전화로 상담을 문의하거나 신청하는 사람들을 응대하는 일의 비중이 컸다. 사람들이 전화기 너머로 호소하는 내용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화가 나서 쏟아내기도 했고, 누군가는 하소연하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사람들의 고유한 사연을 들을 때마다 책임감을 느꼈다. 그들의 고민을 메모하고, 숙고하고,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일이 내 생각대로 해결되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는 상황이 생겨났다. 언성을 높이는 사람을 만났다.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는 사람을 만났다. 태도를 지적하는 사람을 만났다. 사람들의 날카로운 반응을 경험할 때면, 회사에 속한 한 사람으로 말끝마다 죄송하다는 말을 붙여야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기관의 방침을 설명해야 했다. 방법이 없느냐는 질문에 눈물로 대답을 대신해야 했다. 그 밖에도 상사의 요구, 동료와의 갈등, 쌓여가던 일은 나를 지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회사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스트레스로 이어졌다.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 시기 나에게는 해방감을 느끼도록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은 회사에 들어가기 전, 음악을 듣던 10분의 시간이다. 회사 입구 주변으로 길이 하나 있었다. 그 길은 가파른 언덕의 시작과 끝을 안전바가 이어주는 통로였다. 나는 오르막 끝과 평평한 도보의 경계에 쪼그려 앉았다. 그곳에 있으면 회사 정문을 등지고 앉을 수 있었다. 출근하는 직원들이 주위를 살피며 걸으면 내 뒷모습을 볼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 앉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느꼈다. 회사로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과 만났다. 일하며 겪은 불편한 상황들이 떠오르며 불안감이 조성됐다. 또다시 겪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들을 상상하며 겁을 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회사로 들어가기 싫어하고 있구나', '이전에 겪었던 일들로 불안해하고 있구나', '앞으로 겪을지 모르는 상황들로 겁이 나는구나' 알아주었다. 내면의 복잡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거부하지 않고 인식할수록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흐르던 음악 한 곡이 마저 끝나면 회사로 당장 들어가야 하는 게 현실이었지만, 그늘진 나의 마음을 스스로 비추며 나는 노래하고, 춤추었다.


어느 날, 회사 앞에서 웅크려 있던 내게 이미지 하나가 찾아왔다. 어린아이였다. 6살 정도 되어 보였고, 라운드 반팔티에 고무줄 반바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 아이는 하늘로 솟구치듯 큰 보폭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두 팔이 번갈아가며 앞뒤로 크게 흔들렸고, 두 무릎이 순서대로 가슴 높이까지 올라갈 만큼 동작이 컸다. 아이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다 고개를 오른 방향으로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눈물을 흘렸다. 흐느끼며 울었다. 회사에 가야 했지만, 서둘러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었지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trees-9424194_1920.jpg This is Michael Pointner's image obtained from Pixabay.


나는 전화 응대 업무가 많던 직장에서 퇴사하고, 몇 번의 이직을 거쳤으며, 여전히 상담심리사로 일하고 있다. 상담실을 찾는 내담자들은 자신만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들이 고민하는 주제가 유사하게 보일지라도 개인의 성향, 역사, 환경, 태도, 가치관 등에 따라 상황을 경험하는 양상은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경험하는 어려움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상담을 위해 내가 해야 하는 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준비에 힘쓰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며, 상담의 도구가 되어야 할 나 자신을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다. 특히, 나는 나를 돌아보려고 한다. 내가 주로 어떤 상황을 불편해하고, 무엇을 얻기를 원하고, 그래서 내가 해야 하는 행동은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고찰한다. 상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나의 부분을 최소화하고, 내담자의 언어와 반응을 상담 과정을 통해 그대로 경험하기 위해서이다. 내담자를 담아야 할 상담자라는 그릇이 자신의 것으로 가득 차 있고, 무엇이 담겨 있는지 모른다면, 상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타인을 만족시키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거절에 민감하고, 실수를 두려워하며, 긴장되는 관계의 순간을 피하려고 한다. 상담에서 내담자에게 충분히 도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꿈틀거린다. 내담자가 어려움이 해소되었다고 말하는 걸 듣고 싶고, 나아진 듯한 표정을 보고 싶어 하며, 오늘 상담도 좋았다는 메시지를 접하고 싶어 한다. 궁극적으로,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대상에게 받고 싶은 걸 타인에게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누군가가 원하는, 누군가를 위한 대상이 됨으로써 언젠가 기적 같은 순간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누군가가 나에 관한 것, 이를 테면 그간의 고통, 아픔, 노력, 사투, 수고, 외로움, 불안감, 두려움, 무서움 같은 모든 경험을 알아주기를 원했다. 대상의 형태는 다양했다. 나긋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는 엄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노란빛을 내뿜는 전구가 나무들 사이로 주렁주렁 매달린 야외 평상에서 한 여름 무더위도 잊은 채 떠들썩하게 웃으며 어울리는 사람들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수용받는 느낌을 경험하고 싶었다.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통해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나에게 향하는 사랑을 실감하며, 안정감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족시키려 할수록 그들이 원할 만한 행동을 취해야 했고, 무엇이 그들에게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들까를 고민할수록 나를 스스로 소외시킬 수밖에 없었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점점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감정들이 내 의도와는 다른 행동을 촉발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느낌이나 감각이 배제된 행동에 사람들이 웃으며 환영해 주면, 내가 선택한 방식이 기적에 가까워지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으로 이어졌고, 나는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갔다.


현재 근무하는 회사에서 한 동료가 "수호샘은 늘 괜찮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는 편이다.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생겨도 누군가 물으면 괜찮다고 말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직면해도 누군가 물으면 괜찮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내가 다른 동료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그는 늘 괜찮다고 대답하는 동료였다. 그날은 그가 감당하고 있는 일이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괜찮냐고 물었다. 그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는 동료에게 괜찮지 않을 때는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게 필요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에게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꺼낸 지 1년이 지났다. 마지막까지 괜찮다고 말했던 그는 퇴사하고 없지만, 나는 여전히 괜찮다고 말한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대답한다. 괜찮을 것 같다고, 괜찮아질 것 같다고 반응한다.


ginkgo-tree-2890516_1920.jpg This is the image of Mr. Kongerdesign obtained from Pixabay.


하루는 점심을 먹고 회사 주변을 산책하다 벤치에 앉았다. 가을바람이 선연하게 불어왔고, 만개한 은행나무 두 그루에서 낙엽이 느긋하게 떨어졌다. 그곳에 앉아 일을 하면서 겪은 여러 순간과 조우했다. 새롭게 도전해야만 했던 일, 추가로 진행해야만 했던 일, 수시로 발생하는 각양각색의 상황들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스트레스를 받도록 했다.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도록 했다. 나는 피아노 반주를 들으며, 가슴에 손을 얹으며, 호흡을 인식하며, 발바닥의 감각을 느끼며 나를 알아주려고 했다.

어린아이의 이미지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런데, 이 날은 좀 달랐다. 수시로 찾아오던 그 아이를 그동안 내가 멀찍이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그의 오른손을 감싸듯 잡았다. 나도 아이의 속도에 맞추어 팔을 앞뒤로 크게 흔들고, 무릎도 가슴께까지 들어 올리며 힘차게 걸어갔다. 맞잡은 손이 하늘로 함께 올라가고, 발걸음이 서로에게 맞추어져 갔다. 아이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나도 웃었다. 아이와 나란히 나아가는 길은 빨간 벽돌로 채워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다 보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구역으로 접어들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겠지만, 그 순간이 단지 감격스러웠다.

아이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을 넘어 접촉이 이루어졌고, 그 아이를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수용받는 듯한 느낌이 경험했다. 전율과 희열이 뒤따랐다. 괜찮지 않아서, '왜 살아야 하지?' 같은 생각으로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는 고개를 숙인 채 속상해하는 아이와 마주했다. 나는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었다. 밤바다라는 배경에서, 모래사장으로 밀려들던 파도가 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소리가 깔렸다. 목 놓아 통곡하던 그 아이는 나였다. 결핍과 추구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 자신이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개이치 않았다. 그곳이 어디든, 누가 지나치든 상관없었다. 울고 싶었기 때문이다. 울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를 만족시킬 수 없다. 나는 나를 만족시킬 수 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래야만 받고 싶은 무언가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과 방식도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나를 위한 대상이 스스로 될 수 있다. 그러면 받고 싶었던 인정과 사랑을 스스로 줄 수 있다.


어제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울었다. 괜찮지 않아서, 압도되는 느낌이 들어서 참지 않았다. 괜찮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괜찮지 않은 순간과 접촉하니, 도리어 괜찮아지는 느낌을 경험했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대상을 내가 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했던 건,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나'였다. 나는 기다리던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먼 길을 찾아 헤맸다. 그래도 좋다. 이제는 괜찮다. 내가 나에게 괜찮을 수 없다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괜찮지 않은 일이 내게 벌어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스스로 위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괜찮지 않은 순간을 수용하자 사람들이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도움을 받게 되었다. 나는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나부터 알아주는 게 필요하다는 걸 실감한다. 잠겨있던 수도꼭지 손잡이를 들어 올리면 물이 흐른다. 나는 스스로 손잡이를 들어 올릴 수 있다. 하지만, 물줄기가 얼마나 세찬지, 손잡이가 얼마나 세게 잠겨있는지, 물이 얼마나 담겨 있었는지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아직 누군가에 속하여, 누군가의 품에서 나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나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 나는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누군가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 그게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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