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고 우리 가족은 새집으로 이사했다. 그 집은 내가 30년 가까이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영천 시장 부근에서 홍은동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며 두 삼촌이 따라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고향인 청양으로 돌아갔다. 고모는 고모부와 결혼하고 백암에 정착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아빠는 대학생이었던 막내 삼촌을 두고 "막내를 깨워야 하는데..." 말할 때가 있었다. 나는 "알았어! 내게 깨울게!" 외치며 삼촌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미닫이 문을 양손으로 잡고 조심스레 열었다. 고개를 빼꼼 내민다. 삼촌이 코를 골며 자는 걸 확인하고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침대 모서리 위로 올라간다. 목표는 삼촌의 배다. 레슬러가 된 것처럼 힘껏 도약한다. "으악!" 하는 소리가 이내 집안 가득 퍼진다.
그 시절,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이웃을 좋아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아파트 호수나 자녀의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다. 엄마는 204호, 또는 수호 엄마였다. 빌라에 가까운 아파트 단지 한편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다. 알록달록한 꽃들과 우산처럼 펼쳐진 나무들 사이, 무릎께 오는 조경석이 인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평평한 돌 위로 204호, 105호, 113호, 314호처럼 누군가의 엄마들이 모였다. 그곳에는 늘 웃음꽃이 피어났다.
엄마한테는 친구 두 명이 있었지만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 보내는 시간을 빼면 대부분 이웃과 어울렸다. 나는 배가 고플 때면 베란다에서 화단을 내려다보거나, 엄마가 자주 가던 몇몇 아파트 호수를 찾아 가거나, 그곳에 계시냐고 전화를 걸었다.
삼촌들이 모두 결혼했다. 그들이 사용하던 유일한 방은 누나의 차지가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이 시기의 엄마는 여유로워 보였다. 우리 집에는 차가 없었지만, 이웃의 차를 얻어 타며 가족 단위로 놀러 다니기도 했다. 계곡, 바다, 봄, 가을처럼 어디든, 언제든 함께 다녔다. 삼촌네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까지는 아파트 화단 근처에서 퍼지는 엄마의 쾌활한 목소리를,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엄마의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파산하며 식당을 차리게 되었다. 엄마의 하루는 일산에 있던 감자탕 집에서 대부분 지나갔다. 아빠가 주방에서 요리하고, 엄마가 홀을 담당했다. 감자탕에서 피자로, 일산에서 동대문으로 메뉴와 장소가 바뀌는 데는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엄마는 전화 주문을 받고, 재료를 준비하고, 사이드 메뉴를 만들면서도 누나와 나를 챙겼다. 아빠는 식당에서 잠을 잘 때도 있었지만, 엄마는 밤늦게라도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힘들었던 일들을 내게 털어놓기 시작한 건 내가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다. 엄마는 결혼하고 마주해야 했던 상황들, 그보다 과거에 겪었던 장면들, 누나와 나를 키우며 경험했던 순간들을 들려주었다. 엄마가 자주 찾던 아파트 호수는 낯선 사람들로 채워져 갔다. 대부분 이사를 갔고, 소식이 끊겼다. 친구들과도 연락하지 않는 듯했다. 아파트 화단에서는 수호 엄마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햇볕을 막아주던 정원의 그늘이 수심에 잠긴 것처럼 보이게 했다. 엄마의 표정이 사라졌다. 통쾌하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하는 말을 귀 담아 들으려고 노력했다. 엄마의 화단이 되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편으로 엄마가 나에게 관심을 더 가져주기를 원했다. 확인받고 싶었다. 기대는 좌절되기 일쑤였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나는 엄마의 어떤 말이라도 허용하려고 했다. 나는 사라지고 엄마가 부각되는 형태로 관계가 발전되었다.
상담 공부를 시작하며 엄마로부터 독립하는 게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관계에서 변화를 꾀하기 위해 자기표현을 시작했다. 엄마의 고민을 가만히 들을 수 없는 경우가 생겨났다. 시들어가던 화단을 회복시키고 싶다던 바람이, 봄을 되찾은 엄마가 나를 품어줄 거라는 환상이 사라져 갔다.
엄마와 거리를 두는 시도는 고통스러웠다. 나를 드러낼수록 서운한 기색을 보이는 엄마와 직면해야 했다. 엄마와 다른 생각이나 의견을 말하며 갈등을 견뎌야 할 때면 충동에 휩싸였다. 내가 미웠다.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스스로 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자리를 당장 벗어나고 벗어나거나,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이제는 알게 된 나의 부분들을 엄마에게 전했다. 절규하면서도, 아파하면서도 말했다. 필요했으니까. 필요했다는 걸, 체험할수록 깨달았으니까.
엄마와 대화를 시도하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엄마와 갈등이 생기면, 갈등이 초래된 지점으로 가서 엄마와 다시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가 화제를 전환하려고 하거나, 그만 말하고 싶다고 해도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우리가 왜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되어가기를 바라는지 들려주었다.
엄마의 마음도 들었다. 생각도, 기대도, 불편했던 부분도 들으려고 했다. 나는 긴장으로 번지던 대화가 끝날 때마다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엄마가 속마음을 터 놓는 대화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엄마와 나는 닮았으니까. 각자의 이유로 달궈진 불덩이를 내면에 품고서도 대화에는 마침표가 찍히기 시작했다. 엄마도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가 손바닥을 마주하고 악수하는 순간이 늘어갔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생애 첫 기억이 있다. 몇 살 때였을까. 잠에서 깨어난 나는 엄마가 없는 컴컴한 안방을 발견하고 우두커니 서서 힘껏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세상이 떠나가라 울던 내 모습은 나를 떠나보내며 울던 조카 B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누나 집 거실에서 나를 떠나보내며 온 힘을 다해 울던 아이는 나였다. 조카 B가 그날 경험한 것이 무언인지 나는 모른다.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조카 B가 울던 모습에서 나는 나를 봤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형태로 사랑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바라던 사랑을 엄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물었다. 밥은 먹었는지. 어쩌면 나도 조카들이 바라던 사랑을 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가 되어 조카들의 놀이에 참여한다. 함께 머무른다.
최근 엄마가 초등학교에 취업했다. 급식을 보조하는 일이다. 조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학원까지 스스로 다닐 수 있게 되자, 엄마가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러던 참에 큰 이모가 참여하고 있던 노인 일자리가 엄마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엄마가 지원서를 쓸지 망설이던 때가 있었다. 누나는 일을 할 거면 돈을 더 버는 일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엄마에게 말했다. 차라리 식당에서 일하면 급여가 늘어날 거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원한다면 우선 지원해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큰돈은 못 벌더라도 급여도 받고, 함께 일하는 동료가 생길 테므로 엄마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엄마가 초등학교로 출근을 한다. 합격 소식을 전하던 엄마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며 "나는 당연히 될 줄 알았지" 말했다. 오늘 엄마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어떤 아이를 만났을까.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무슨 기분을 느꼈을까. 이제부터 내가 물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