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하여 생활한 지도 1년이 넘었다. 혼자 삶을 꾸려나가는 일이 이토록 번잡한 일일 줄 몰랐다. 집안에 존재하는 모든 도구가 소모품이다. 연한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은 녹슬고, 닳고, 해진다. 침대 밑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걸 발견했을 때, 내 표정은 케첩을 처음 먹던 조카 A가 지었던 표정과 꽤 높은 일치율을 보였을 것이다.
겨울에는 패딩 점퍼를 세탁기로 빨았다. 한 푼이라도 아껴볼 심산이었다. 빨래를 돌리고 패딩을 꺼내 드는데 옷깃의 감촉이 이상했다. '어.. 어라?!' 패딩을 펼쳐보니 내부 소재가 가슴 부근으로 단단하게 뭉쳐져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표현이 있었다.
조.. 조졌다!
손바닥으로 문질러 봐도 소재는 펴지지 않았다.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더해 두드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뒤, 친구에게 패딩 점퍼가 운명을 다한 썰을 풀었다. 친구는 패딩을 세탁기로 돌리면 원래 그렇다고, 계속 문대고 두드려야 펴진다면서 "아마 그동안은 너희 어머니께서 펴지 않으셨을까?"라고 말했다.
그랬다. 침대 밑에 먼지가 쌓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방바닥에 너저분하게 깔린 머리카락도, 세면대에 생긴 물때도 생활하다 보면 생기는 불가피한 일이다. 나는 다만 대신 치워주는 존재가 있었으므로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다. 우리가 누리는 삶은 누군가의 노고를 반드시 포함한다. 부족한 자기 경험으로 나만의 생각에 사로 잡혀 고집 피우면서도, 외부 생활에서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마음에 눌러 담으면서도, 거리를 배회하면서도, 울면서도 그런대로 살아간 데는 부모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마흔이 다 되도록 사회에서 겪은 경험과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 전념했다. 집안에는 소홀했지만, 부모님이 살펴주었다. 나는 누군가가 좋아해 줄 것 같은 모습으로 꾸미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착하다고 불리던 옷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알게 되면서부터, 각가지 옷을 왜 만들어야 했는지 받아들이면서부터, 옷을 벗은 알몸 상태의 나를 환영해 보려고 노력하면서 마음은 안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성찰하고, 숙고하며, 시도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었던 데는 부모님의 헌신이 큰 버팀목이 되었다."라고 적을 수 있는 까닭은 독립생활로 부모님의 부재를 여실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터전을 일구어가던 내게 가장 먼저 찾아온 변화는 체중 감소였다. 50킬로그램 대가 되었다. 그중 얼굴은 끼니를 대충 때운 결과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입꼬리를 가볍게 말아 올려도 팔자 주름이 선명하게 잡힌다. 자고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중년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낯선 사내가 들어서있다.
왜소해진 체격과 야윈 얼굴, 눈에 띄는 흰머리를 민감하게 알아차린 건, 엄마였다. "아이고, 챙겨줄 게 없어서 어떡하지" 엄마가 말했다. 엄마가 싸준 냉동 볶음밥, 만두, 반찬이 쇼핑백에 한 가득이다. 그런데도 줄게 없는지 집안을 서성인다. 오늘 가면 또 언제 올지 모르니, 깜빡한 게 있는지 찾아보는 거라고 한다. 부모님 집과 내가 독립한 곳은 걸어서 한 시간 거리다. 버스로는 40분, 차로 이동하면 20분이면 도착한다. 같은 서대문구에 있으므로 집은 가깝지만, 연락은 뜸하다. 필요할 때만 연락한다. 안부를 묻지 않는다.
한 집에 살 때도 그랬다.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 않았다. 표면적인 대화는 있었다. 밥은 먹었는지, 아니라든지. 밥을 먹으라든지, 알겠다든지. 그러나, 생활에 필요한 간단한 대화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특히, 엄마는 나에게 하고 싶은 걸 묻지 않았고, 필요한 걸 묻지 않았으며, 기분을 묻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 관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엄마라고만 생각했다. 엄마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딸이자, 한 가족의 동생이자 누나, 아빠의 아내, 우리나라에서 먼저 살아온 아이였고, 소녀였으며,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에 관하여, 엄마의 삶에 대하여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엄마가 나의 하루를 궁금해하고, 조잘조잘 떠드는 나를 기다려주며 '그랬구나', '괜찮아' 같은 말을 들려주기를 원했다. 나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고, 등을 토닥이지 않고, 안아주지 않을수록 엄마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나는 엄마를 즐겁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웃게 할 수 있을까?
엄마는 나의 우스꽝스럽고 천진난만한 모습을 좋아했다. 짱구가 어른을 대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관찰하고 엄마 앞에서 흉내 내기도 했다. 학교에 우산을 놓고 오거나, 실내화 가방을 잃어버렸거나, 친구에게 괴롭힘 당할 뻔한 일이 엄마를 괴롭게 한다는 걸 알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놀라거나 걱정할 수 있으니 어떤 말이라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엄마가 어떻게 나의 엄마가 되어주었는지 차츰 듣게 되었다. 엄마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오빠가 두 명, 언니가 두 명,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할머니가 수완이 좋아 엄마가 중학생 때까지는 부유하게 지냈다고 한다. 시대는 정확히 모르지만 1970년대 즈음 집에 전화기와 텔레비전이 있었고, 할아버지는 슈퍼마켓을 열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도 할아버지가 슈퍼마켓을 운영했고, 만화가 그려진 풍선껌이나 치토스처럼 간식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며 집안 분위기가 바뀌어갔다고 했다. 할머니는 주변 사람에게 돈을 많이 빌려주었다고 했다. 그날도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갔는데 누군가 할머니를 밀쳤다고 했다. 며칠을 고열로 앓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돈을 빌려갔던 사람들이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할머니가 빌린 돈을 주지 않았다며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빌려준 돈은 못 받고, 달라는 대로 돈을 주고 나니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빈자리가 나머지 가족에게 큰 영향을 준 듯했다. 언니와 오빠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갔다고 했다. 엄마는 눈치껏, 알아서 살아가야 했다고 한다. 남동생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마가 중학생 때 일이다. 엄마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할지, 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등대 없는 어두운 바다를 엄마는 어떻게 헤쳐왔을까?
그 사이, 엄마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취업하지 않았다. 엄마의 시계는 어김없이 흘렀다. 아빠와는 소개로 만났다고 했다. 아빠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밥값을 내는데 쭈뼛거렸다는 얘기를 웃으며 들려주기도 했다.
결혼한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누나가 태어났다. 그때 집안에는 할아버지, 고모, 삼촌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시댁 식구들이 한 데 모여있는 집안으로 엄마가 들어갔다. 그것도 혼자. 할아버지의 입맛은 까다로웠고, 가정 형편은 어려웠고, 아빠는 식구들을 책임지기 위해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엄마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아빠가 부재한 상태로, 고사리 같은 누나의 손을 붙잡고 남의 집 식구들을 챙기며 보내야 했다.
누나가 3살이 되던 해에 나를 임신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친할아버지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대신하여 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엄마를 연신 찾았다고 한다. 시장까지 채소를 가져다 달라는 식이다. 엄마는 누나를 등에 업고, 채소를 양손으로 들고 할아버지를 찾아가야만 했다. 나를 뱃속에 품은 상태에서도 몸을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던 엄마. 엄마는 그간, 그날, 그곳에서 무엇을 경험하며 살아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