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길, 서문)
독재는 홀로독 獨 이 아니다. 견재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견재받지 않는다면 그들이 다수이건 소수이건 독재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은 무엇인가. 과반수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수의 의견대로만 하는 것이면, 소수는 다수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거기에는 투쟁과 분리만이 남을 뿐이다. 다수결은 토론을 통해 소수의 의견이 반영될 때만이 유효하다. 그렇지 않다면 폭정과 다를 바 없다. 선거도, 의회도 마찬가지다.
정치가는 정치이상을, 학자는 정의를 만들어 낸다. 정치이상을 실현하고, 정의의 논리를 만든다. 극도의 선의로 출발한다. 그 선의가 미래에 어떻게 변할런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다. 정치가와 학자는 자신의 정의를 중심으로 그룹을 만들고, 다른 정의를 정복해 나갈 것이다. 다른 정의는 적으로 선언하고, 하나씩 넓혀갈 것이다. 정의는 그러다 일원론의 집단주의로 흐를 것이다.
다원주의는 다양한 이익집단이 존재한다. 이익집단은 정치나 이상이 아닌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설명되지 않는다. 다원주의에서 정치가와 학자는 해설하는 조연에 지나지 않다.
일원주의, 집단주의에서는 정치가와 학자가 주인공이다. 그들은 모든 다원주의 그룹을 품평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권한이 있다. 강력한 팬덤으로 정의와 제도를 밀고 나간다. 적들이 나타나면 '정의의 위기'로 선언하고 더욱 권력을 공고히 할 것이다. 적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을 적으로, 적들의 편으로 구분 짓는다. 언제나 그랬다.
정치가와 학자들이 예언한 대로 이루어지 않는다면, 시기의 문제라거나 상황이 달라졌다고 설명할 것이다. 조금 더 참고, '정의를 향해 전진'을 외칠 것이다. 그렇게 둘러댈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악'은 자유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자유'와 '정의'가 나타나면, 선으로 성장할 지, 악으로 성장할 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다. 알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다. 악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며, 객관적 악인이란 존재도 없다. 악으로만 구성된 정치이상도 없으며, 모든 것이 악인 정치현실도 없다. '정치이상'과 '정의'는 탄생하고 확장해 갈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하는 것은 견제할 수 있는 힘과 여건을 지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어떠한 이상도 '정의'와 '선'을 독점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세상은 같아지려는 힘이 있다. 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사상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사상은 다른 사상를 흡수하려한다. 흡수하려다 흡수는 하지 못하고 서로 변형된 하나의 새로운 사상이 탄생하기도 한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생각과 정치이상이 존재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흡수하려는 사상의 도전에 버틸 수 있어야 한다. 흡수하려는 정치세력에 버틸 수 있어야 한다. 버틸 수 있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자산, 직업, 표현 모두 위정자의 힘과 상관없이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객관적 선악이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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