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이돌 문화의 시발점이 된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작으로, 힙합은 케이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빅뱅, 지코, 방탄소년단 등 굵직한 힙합 스타들을 배출한 보이그룹 씬에 비해 여자 아이돌은 CL 정도를 제외하면 좀처럼 힙합 음악으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블랙핑크 제니, 블랙핑크 리사, (여자)아이들 전소연
이는 여자 아이돌 래퍼들의 실력 문제라기보다는 힙합이 일반적으로 걸그룹의 메인 기획으로 채택되는 빈도가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다. 블랙핑크의 제니와 리사, (여자)아이들의 전소연 등 뛰어난 랩 실력을 보유한 아이돌이 종종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소속팀의 음악색 때문에 역량을 온전히 펼쳐보이지 못했다.
영파씨(YOUNG POSSE)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년, 걸그룹에게는 사각지대에 가까운 힙합 음악을 전면에 내세운 여자 아이돌이 등장했다. 젝스키스, 핑클, 이효리, SS501, 카라 등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한 DSP미디어가 야심차게 런칭한 신인 걸그룹 영파씨(YOUNG POSSE)가 그 주인공이다.
2장. 영파씨(YOUNG POSSE)가 특별한 이유
말하자면, 영파씨는 '진짜로' 힙합을 한다. 진짜 힙합이니 가짜 힙합이니 케케묵은 정통성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현재 힙합 씬에서 실제로 통용되고 있는 음악을 가져왔다는 말이다. 기존의 걸그룹들처럼 힙합의 요소를 부분적으로 떼와서 케이팝 문법 하에 변용하거나 접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성 래퍼의 곡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일반적인 힙합 음악의 구조를 그대로 내세우고 있다.
영파씨, "YOUNG POSSE UP" (2024)
현재에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래퍼들인 버벌진트, NSW 윤, 토큰의 피처링이 수록된 "YOUNG POSSE UP"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 미국 힙합 씬에서 가장 핫한 장르 중 하나인 저지 드릴(Jersey Drill)을 일체의 변형 없이 그대로 이식해 왔다. 한국의 대표적인 드릴 래퍼인 NSW 윤의 벌스가 비트에 아무 어색함 없이 녹아들 정도로 장르의 기본에 충실한 사운드 프로덕션이 돋보인다.
3. 영파씨의 두 번째 진화, [XXL EP]
영파씨의 과감한 전략은 지난 3월 20일 발매된 두 번째 미니앨범 [XXL EP]에 이르러 더욱 확대된다. 미국 힙합 씬 최의 트렌드메이커 플레이보이 카티(Playboi Carti)가 창시한 레이지(Rage) 장르의 "Scars", 칸예 웨스트(Kanye West)를 연상시키는 소울풀한 칩멍크 샘플링을 내세운 "나의 이름은", 한국에는 뉴진스를 통해 알려진 드럼앤베이스와 저지클럽 장르의 트랙 "Skyline", 오늘날 가장 핫한 장르 중 하나인 아프로비츠를 차용한 "DND"까지. 힙합의 과거와 현재를 두루 아우를 뿐만 아니라 영미권 팝의 트렌드까지 포용한 감각적인 큐레이팅이 돋보이는 앨범이다.
영파씨, "XXL" (2024)
그 중에서도 타이틀곡 "XXL"은 둔탁한 드럼과 높게 우는 신스가 직접적으로 서태지의 "Come Back Home"을 연상시키는 정통파 붐뱁 트랙이다. 블랙핑크가 "Pink Venom"의 2절에서 변주를 통해 비슷한 시도를 한 바 있지만, 이렇게 곡 전체를 통째로 건조한 붐뱁 비트와 타이트한 랩으로 채운 선례는 없었다. 상징성을 차치하더라도 붐뱁 사운드의 질감을 생생하게 살린 편곡과 캐치한 올드스쿨 스타일의 훅의 만듦새가 그 자체로 대단히 빼어나다. 탄탄한 발성을 바탕으로 박자 사이 빼곡히 어절들을 쏘아붙이는 멤버 정선혜의 타이트한 래핑 역시 발군이다.
4. 영파씨가 힙합과 케이팝을 공존시킨 방법
이처럼 영파씨는 진한 장르적 색채로 힙합 본연의 텍스처를 재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그들이 본질적으로 케이팝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음악적으로는 케이팝과 거리가 멀지만 캐릭터 셀링 방식에서는 케이팝의 공정을 따르며 이중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멤버들이 직접 작사한 “POSSE UP”의 가사를 살펴보면, ‘랩 배운지 딱 두달 가사 쓰기 참 어렵구나 / 팔십 억의 인구가 살고 있다 하네 지구만 / 너무 크네 우주가 난 그냥 작은 먼지일 뿐야 / 먼지 같은 내가 배운 언어로 랩하면 너는 들어줄까’처럼 다소 서툴지만 진지한 사유나, ‘샐러드 밖에 못 먹어도 / 씬을 먹은 다음에 먹을거야 밤새 / 링고 아메, 초코프라페, 애플 캬라멜, 크레페, 라멘’처럼 소박하고 귀여운 야망을 드러내는 라인들을 통해 멤버들의 캐릭터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직접 쓴 가사에 자신의 생각을 담는 힙합적 작법으로 캐릭터플레이라는 케이팝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영리하고도 치밀한 전략이다.
5. 2024년 당신이 가장 주목해야 할 신인, 영파씨
영파씨를 샤라웃한 파비오 포린과 옐로우 클로우
2022년 뉴진스의 등장 이후 케이팝 아이돌에게 음악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제 대중은 케이팝에게 이전처럼 자극적인 콘셉트나 얄팍한 성 상품화가 아닌, 무엇보다도 ‘좋은 음악’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케이팝 씬에서 가장 진보적인 음악적 기조를 선보이고 있는 영파씨는 그 흐름에 명확히 부합하는 팀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를 증명하듯 미국의 유명 드릴 래퍼 파비오 포린(Fivio Foreign)과 트랩 DJ 옐로우 클로우(Yellow Claw) 등의 거물들이 영파씨의 이름을 언급하며 호평을 내리고 있다. 그야말로 전례없는 일이다.
오래 전부터 ‘힙합 걸그룹’에 대한 논의는 무성했지만 YG엔터테인먼트도 더블랙레이블도 아닌 DSP미디어가 그 스타트를 끊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시도는 좋았다‘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장르를 충실히 구현하는 웰메이드 프로덕션과 그것을 케이팝의 영역으로 진입시키기 위한 정교한 캐릭터빌딩 전략으로 무장한 채 등장할 줄은 더더욱. “남들이 하는 거 따라할 거라면 뭐하러 예술을 하냐고”라는 ‘XXL’의 가사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입증된 DSP의 프로듀싱 역량에 과감한 도전 정신이 더해져 탄생한 영파씨는 명실상부 2024년 당신이 가장 주목해야 할 신인이자, 명가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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