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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Nov 21. 2020

2010년대 K-POP 연대결산: 1위~10위

2010년대 K-POP 트랙 총결산: 베스트 트랙 TOP30



대한민국의 대중음악계는 2010년대 들어 그 흥행 면에서 천문학적인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고, 2000년대 중후반 등장한 '한류'라는 단어가 이제 사어가 되었을 정도로 K-POP의 세계적인 인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앨범 판매 초동 100만 장을 넘기는 아티스트가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등장하고, 인기 그룹의 뮤직비디오는 채 이틀도 안 되어 1억 뷰를 돌파하며, 급기야는 마지막 보루인 빌보드 차트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절대로 믿지 못할 사실이다.


유례없는 황금기를 맞은 K-POP은 흥행 실적뿐만 아니라 음악의 완성도까지 급격히 성장했다. K-POP은 트렌드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도하기 시작했고, 문화와 산업의 지형은 K-POP에 의해 변화를 거듭했다. 아이돌 그룹의 음악은 기성 음악가들의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질적으로 발전했다. 론사 한겨레, 음원사이트 멜론, 출판사 태림스코어가 47인의 심사위원을 통해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f(x)의 [Pink Tape]가 포함된 것은 K-POP이 이룬 찬란한 성과의 단적인 증거다.


그야말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10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2010년대. <정라리의 케이팝 읽기>는 본 '2010년대 베스트 K-POP 트랙 결산' 기획을 통해 시대를 관통해 음악사의 흐름을 이끈 K-POP의 눈부신 음악적 성취를 되짚어 본다.


* 점수는 편의상 병기한 것으로, 순위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 <정라리의 케이팝읽기>는 음악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아티스트의 사적 논란과 범법 행위에 대해 옹호하지 않습니다.




BIGBANG, [ALIVE], YG엔터테인먼트, 2012

10위

빅뱅, 'BAD BOY'


 '뱅뱅뱅'이나 'FANTASTIC BABY' 같은 강렬한 EDM 넘버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빅뱅은 대한민국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지드래곤이 타이트하고 탄탄한 래핑으로 포문을 열고, 태양대성이 시원시원하고 파워풀한 보컬로 분위기를 휘어잡은 후 터져 나오는 와일드한 전자음에 맞추어 격하게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은 의심의 여지 없이 '멋지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물론 승리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조금도 멋지지 않다) 그러나 왠지 마음은 다른 곳으로 기운다. 한국 대중가요계의 트렌드를 이끌어 온 스타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빅뱅은 오히려 빛나는 무대에서 내려와 평범한 개인으로서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 가장 멋지다.


 'BAD BOY'는 동 앨범에 수록된 강렬한 EDM 넘버 'FANTASTIC BABY'와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트랙이다. 'FANTASTIC BABY'에서 미친 듯 파티를 벌이며 뛰놀던 빅뱅은 'BAD BOY'에 이르러 비로소 둔탁한 드럼이 빚어내는 투박한 비트 위로 솔직한 진심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가장 빛나는 별인 그들 역시 다를 바 없이 연인에게 '더 잘 해주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평범한 인간임을 드러내는 노랫말은 그 주인공이 빅뱅이기에 더욱 깊숙이 와 닿는다. 자신의 실패를 전시한 가수들은 많았지만, 빅뱅이 그들과 다른 점은 빅뱅 특유의 진솔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가사가 그들을 전혀 '찌질해 보이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노래하면서도 멋있을 수 있는 아티스트는 흔치 않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엮어낸 악기 세션, 천부적인 작곡 감각으로 빚어낸 캐치한 멜로디라인, 투박한 듯 서정적인 붐뱁 비트를 타고 불필요한 기교 없이 담백하게 노래하는 'BAD BOY'는 빅뱅의 모든 트랙 가운데 가장 호소력 넘치는 작품이다. 멋지게 보이려 허세로 치장하지 않아도 멋진 그룹이 바로 여기에 있다.



Red Velvet, [Perfect Velvet], SM엔터테인먼트, 2017

9위

레드벨벳, '피카부'


 대중뿐만 아니라 평단의 호평까지 동시에 잡아낸 명반으로 샤이니에게 정규 3집 [The Misconceptions Of Us], f(x)에게 정규 2집 [Pink Tape]가 있다면 레드벨벳에게는 [Perfect Velvet]이 있다. 앞선 두 앨범과의 차이점이라면 [Perfect Velvet]에는 타이틀곡이자 확실한 킬링 트랙, '피카부'가 있다는 것이다.


 '레드'와 '벨벳' 개의 콘셉트를 번갈아 선보이는 전략을 취한 레드벨벳이지만, 'Dumb Dumb'과 '빨간 '으로 대표되는 레드 콘셉트의 곡들이 히트에 성공한 반면 벨벳 콘셉트의 곡들은 흥행에 번번이 실패해 왔다. 음악의 완성도가 비교적으로 미흡한 것은 둘째 치고, 벨벳 콘셉트의 특징인 느릿한 서정성과 대중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Perfect Velvet]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앨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레드벨벳은 마침내 벨벳 콘셉트로 완성도와 상업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퍼펙트한' 지점을 드디어 찾아낸 듯하다.


 '피카부'에서 심장 깊은 곳을 울리며 쿵쿵대는 베이스 드럼은 곡의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멜로딕한 드랍은 감각적으로 귀에 꽂힌다. 잠깐잠깐 나타나 존재감을 표출하는 브라스 등의 악기나 메탈릭하게 긁는 신스 등 사운드의 디테일 역시 압권이다. 무표정한 레드벨벳은 어둡고 날선 사운드를 쉴 새 없이 쏟아붓고, 그 중심에는 무엇보다 쉽고 직관적인 멜로디가 자리한다. '벨벳'의 깔끔한 우아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강력한 선율의 힘으로 기어코 대중의 귀까지 사로잡는 데 성공한 '피카부'. 집념 넘치는 프로듀싱의 승리다. [Perfect Velvet] 속 레드벨벳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쿨하고 스타일리시하다.



GD & TOP, [THE FIRST ALBUM], YG엔터테인먼트, 2010

8위

GD&TOP, '뻑이가요'     


노래를 듣기 전에, 이 노래가 무려 10년 전인 2010년작이라는 것을 짚고 가야겠다. 2010년이 어떤 시대냐면, 노골적인 후크송인 소녀시대의 'Oh!', 티아라의 'Bo Peep Bo Peep', 씨엔블루의 '외톨이야'가 히트하던 시절이다. 그럼 이제 '뻑이가요'의 재생 버튼을 눌러 보라. 세계적인 DJ 디플로(Diplo)가 빚은 미니멀한 트랩 비트 위로 몽글몽글한 거품 소리가 내내 활보하고, 포르타멘토 스타일의 신디사이저는 마법처럼 귀에서 맴돈다. 말 그대로 힙하다. 2010년이라는 발매일에 의심의 눈초리가 갈 정도다.


 필요한 최소한의 악기만을 활용하여 오밀조밀하게 사운드를 채워 2020년에도 유효할 만한 비트를 만들어내는 디플로의 프로듀싱은 그야말로 신묘하다. 같은 해에 미국 본토에서 히트했던 대표적인 힙합 트랙인 루다크리스(Ludacris)의 'How Low' 등과 비교해 보아도 그 만듦새가 믿을 수 없이 현대적이다. 그 깔끔한 비트 위에서 지드래곤(G-Dragon)은 레이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수려한 플로우 디자인의 랩을 선보인다. 가히 명실상부다. 이에 맞서 탑(T.O.P) 역시 자신의 탄탄한 톤을 백분 활용한 톡톡 튀는 래핑과 재치 있는 가사로 파트너에게 결코 꿀리지 않는 빼어난 랩 퍼포먼스로 화답한다. 로우톤과 하이톤이라는 매력적인 조합, 노련하게 다져진 래핑, 그리고 시대를 앞서간 비트까지, K-POP 이전에 하나의 웰메이드 힙합 트랙으로서 손색이 없다.


 음악, 패션, 미술 등 2010년대의 예술 전반을 지배한 미니멀리즘이라는 사조를 지드래곤, 그리고 디플로는 이미 10년 전에 완벽하게 이해하여 우수한 트랙을 내놓았다. 트렌드세터라는 칭호는 그냥 손에 들어오는 게 아니다. 이렇게 향후 10년 동안 이어질 예술 사조를 내다보고 미리 구현해 내는 정도는 해 줘야 비로소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주어진다. 이러니 얄미워도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뻑이 갈' 수밖에 없다.



f(x), [4 Walls], SM엔터테인먼트, 2015

7위

f(x), '4 Walls'


샤이니가 'View'로 K-POP 씬에 딥하우스를 가져오고, f(x)가 '4 Walls'로 K-딥하우스를 완성했다. 두 개를 묶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4 Walls'와 'View'는 비단 딥하우스라는 장르적 성취뿐만 아니라 선율 중심이었던 K-POP 음악의 패러다임을 비트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일찍이 K-POP은 후크송에게 지배되었다. 아직까지도 팽배한 K-POP이 질 낮은 음악이라는 편견은 보통 이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테다. 이 즈음 K-POP의 목적은 '쏘리 쏘리'나 'Gee gee gee gee baby baby' 와 같은 일차원적인 훅을 끝없이 반복하며 청자를 세뇌시키는 데 있었다. 이 후크송 열풍은 머지않아 식었지만, 오래 전부터 발라드와 같은 선율 중심의 음악에 열광해 온 한국 대중들의 테이스트는 여전히 작곡가들이 후렴구 멜로디를 짜내는 데에만 집중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비트는 뒷전이 되었고, 많은 K-POP이 비트에는 장르에 어울리는 악기를 대충 때려 넣고 탑라인 메이킹에만 집중하곤 했다. 그러나 빅뱅을 필두로 하여 서서히 씬에 등장하기 시작한 EDM 뮤직은 대중들에게 서서히 비트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기 시작하였고, 그 흐름이 드디어 확실한 각인을 남긴 사건이 바로 '4 Walls'인 것이다.


이 노래가 발매된 2015년 이후로 한국 대중들은 드디어 비트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변화한 요구에 따라 세계 시장에도 꿀리지 않을 만큼 세련된 사운드를 가진 트랙들이 K-POP 씬에 점차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4 Walls'(그리고 'View')가 후렴에 익숙한 후크송의 요소를 배치함으로써 비트 중심의 딥하우스라는 낯선 장르의 이질성을 완화했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커리어 내내 난해한 실험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진통을 겪던 f(x)의 기분 좋은 마지막 성과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음악적 여정이 멋지게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그녀들은 이 앨범을 끝으로 명예롭게 박수를 받으며 떠나는 길을 택했다. 이렇게 f(x)는 K-POP 역사에서 가장 완전하고 서사적인 디스코그래피를 완성한 팀으로 남았다.



레이디스코드, [MYST3RY], 폴라리스엔터테인먼트, 2016

6위

레이디스 코드, 'Galaxy'


2014년 9월 3일 새벽, 걸그룹 레이디스 코드가 대구에서 열린음악회 방송을 녹화하고 서울로 돌아오던 중 빗길과속 운전으로 인해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멤버 중 은비리세가 사망하고 애슐리, 소정, 주니가 크게 부상당하는 비극적인 참사가 벌어졌다. K-POP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망 사고가 된 이 사건은 당시 레이디스 코드가 '예뻐 예뻐'로 서서히 인기를 얻고 있던 무렵이라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사고 이후 남은 멤버들은 너무나도 큰 정신적, 신체적 충격으로 인해 그룹을 해체하고 연예계 활동을 포기하려 했지만, 리세의 어머니는 '너희들이 꿈을 이어가야 리세도 행복해할 것'이라며 남은 멤버들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심연과도 같은 슬픔을 딛고 그녀들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1년 반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아직도 비극의 기억이 채 잊히않은 2016년 2월, 조용히 발매된 레이디스 코드복귀 앨범 [MYST3RY]는 눈이 멀어버릴 만큼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이전의 밝고 정석적인 댄스곡과는 정반대로, 작곡팀 모노트리 G-High가 빚어낸 몽환적인 앰비언트 사운드는 슬픔을 가득 머금고 느리게 침잠한다.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듯 반짝이는 소리들은 때때로 불현듯 멈추었다가 찰랑이는 물빛 피아노와 함께 움직인다. 후반부에서는 훵키한 재즈 베이스가 모습을 드러내며 황홀한 마지막을 장식한다. 멤버들의 보컬은 슬픔과 공허 사이의 어딘가를 맴도는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우주처럼 새카만 밤하늘을 유영하듯 흘러드는 노래의 농도가 너무 짙어 끝까지 듣기 힘들 정도로 몽롱하고 아름답다.


예술은 언제나 고통 속에서 무르익는다. 아이돌에서 예술가가 되어 돌아온 레이디스 코드는 'Galaxy' 속에서 죽음이라는 비극에 부서질 듯 슬퍼하지도,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 짓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존재를 조용히 응시한다. 소중한 것이 사라져도 시간은 흐르고,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아직 나 자신이 지금 이 곳에 살아 있다는 사실뿐이다. 'Galaxy'는 그 숙명적인 남겨짐을 마주하는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보여 준다. 때로 꽃은 지지만 우리는 자리에서 언젠가 새로운 꽃이 다시 피어날 것을 믿는다. 그것이 우리가 꽃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이달의 소녀, [X X],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 2019

5위

이달의 소녀, 'Butterfly'


 '당신이 처음 들어 봤을 사운드, 참신한 콘셉트, 유례없는 음악'. 많은 K-POP 그룹이 이와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며 등장하지만 대부분이 마케팅적인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달의 소녀는 'Butterfly'를 통해 그 과장된 문구에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설득력을 지닌 작품을 구현해 냈다. 확실히, 그들의 사운드는 '전례 없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대중성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K-POP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프로듀싱의 중점은 명확하고 귀에 쏙쏙 박히는 멜로디를 뽑아내는 일이 된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치닫은 사례가 각종 후크송이 난무했던 2000년대 후반 무렵의 역사다. 'Oh', 'Gee', '쏘리쏘리'처럼 최대한 단순하고 뚜렷한 어휘와 멜로디를 반복함으로써 대중에게 곡을 각인시키는 전략은 비록 음악적 완성도는 일천했지만 흥행하는 대중가요를 양산하는 데에는 가장 유효했다. 이 후크송의 시대를 끝낸 것은 EDM이었다. 영미권을 점령하기 시작한 일렉트로닉 뮤직의 트렌드는 서서히 K-POP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빅뱅이 최초로 EDM 식 구성을 K-POP에 도입했다. 후렴 멜로디를 보컬에게 맡기는 대신 전자음 드랍으로 대체하는 새로운 작법은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하는' 대중음악의 정의에 역행하는 듯 보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POP은 드랍의 멜로디를 최대한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길을 택했다. 한때 아이돌 음악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트로피컬 하우스 열풍이 바로 그 일환이다. 통통 튀는 마림바가 멜로디를 뚜렷하게 드러냄으로써 세계 음악 시장의 트렌드와 한국 대중의 취향을 동시에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EDM식 드랍이 아이돌 음악에서 등장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TT'로 잘 짜인 훅의 위력을 가장 제대로 맛보았던 트와이스마저 'Dance The Night Away'와 'MORE & MORE'에서 보컬 후렴을 포기하고 드랍을 선택했으니 말이다.


 이제 K-POP이 더 진보할 구석이 있을까? 이론상 K-POP은 구성적 측면에서 더 이상 변화할 수 없는 한계 지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달의 소녀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다음 변곡점을 가지고 왔다. 'Butterfly'의 드랍의 메인 멜로디는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된다. 마치 블러(blur) 처리된 듯 흐릿한 멜로디의 비트 위로 날아오르는 휘슬 레지스터 보컬은 '대중이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하는' K-POP의 정의와 사운드적 클리셰를 모조리 부정한다. 혼란한 시대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가시적으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음악적 실험으로 그 핵심을 꿰뚫는 행보는 마치 아비규환의 인간 사회를 홀로 우아하게 노니는 나비를 연상시킨다. 나비처럼 공간감 넘치는 몽환적인 전자음 속으로 부드럽게 유영하는 이달의 소녀의 보컬을 풍부한 베이스가 받쳐 주는 'Butterfly'는 의심의 여지 없이 2010년대의 모든 K-POP 트랙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음향적 성취를 거둔 작품 중 하나이다. 나비가 날면 지구 반대편에선 그로 인해 태풍이 분다. 나비는 날아올랐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샤이니, [Sherlock], SM엔터테인먼트, 2012

4위

샤이니, 'Sherlock. 셜록 (Clue+Note)'


'전사의 후예'의 HOT로 시작해 동방신기, 빅뱅, 2PM, 그리고 이후에는 엑소방탄소년단까지. 대부분의 보이그룹은 강렬하고 마초적인 남성의 초상을 그려 왔다. 허나 K-POP 최고의 액션 블록버스터가 다름 아닌 '누난 너무 예뻐'라고 노래하며 무해한 소년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샤이니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마이클 잭슨을 연상시키는 긴박한 비트는 벌스의 긴장감을 꽉 조이고, 백그라운드 보컬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곡의 빈틈을 적절하게 메꾼다. 무려 1분 30초라는 긴 시간 동안 손에 땀을 쥐는 벌스가 진행된 끝에 터져 나오는 후렴은 조화로운 화성과 직관적인 멜로디로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한다. 첫 번째 후렴이 끝난 후 간결한 랩과 종현의 파워풀한 보컬이 짧은 벌스를 채우고 곧바로 다시 후렴이 등장하는데, 이 타이트한 구성은 청자로 하여금 샤이니가 빚어내는 드라마틱한 추리극에 더 몰입하게 한다. 잠시 숨을 돌리는 브릿지 파트의 보컬이 끝나면 이제 구성상 마지막 후렴이 터져 줄 타이밍인데, 이게 웬걸. 후렴이 아닌 랩 파트가 등장하며 예상치 못한 반전을 안긴다. 의심받지 않았던 용의자가 진짜 범인으로 밝혀지며 경악스런 대반전을 자아내는 추리 소설의 결말과 닮아 있다. 비전형적인 전개에 청자가 당황한 틈을 타 곡은 마지막 후렴을 터뜨리며 절정으로 치닫고, 불꽃놀이가 터지는 듯한 화려한 효과음과 함께 블록버스터의 막이 내린다.


샤이니동분서주하며 고뇌하는 셜록 홈즈의 서사를 완벽하게 'K-POP화' 시키는 성공했다. 그래서 두 수록곡 'Clue'와 'Note'를 마법처럼 조합해 탄생한 '셜록'은 노래보다는 한 편의 영화처럼 다가온다. 긴박한 수사 장면으로 도입부를 열고 기나긴 추리 끝에 장렬한 최후의 액션 활극을 벌이는 드라마틱하고 탄탄한 구성과 디테일 넘치는 사운드로 가득한, 서사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흠잡을 없는 역작이다.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액션 상업영화로서는 드물게도 대중적 흥행뿐만 아니라 평단의 호평까지 잡아낸 마블의 <어벤져스> 시리즈처럼, 두 개의 곡이 모여 완전한 하나의 트랙을 만들어냄으로써 압도적인 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셜록'은 의심의 여지 없는 K-POP 최고의 블록버스터 작품이다.



Red Velvet, [Russian Roulette], SM엔터테인먼트, 2016

3위

레드벨벳, '러시안 룰렛'


SM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계보를 돌아보자. 소녀시대는 대중성에 집중해 아이코닉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f(x)는 과감한 독창성으로 100년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Pink Tape])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녀시대는 K-POP 씬에 단순하고 평면적인 후크송이 범람하게 한 원인으로 지목당하며 비평적으로는 외면받았고, f(x)는 지나치게 실험에 치중한 탓에 선배 그룹만큼의 대중적인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이 두 그룹의 오답노트로부터 SM엔터테인먼트는 비로소 적정 지점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는데, 바로 소녀시대 f(x)의 오리지널 블렌딩 레시피, 레드벨벳(Red Velvet)이다.


SM의 적통을 이어받은 세 번째 걸그룹 레드벨벳. '행복', 'Automatic', 'Ice Cream Cake', 'Dumb Dumb', '7월 7일'... 데뷔 이후로 꽤나 많은 곡들을 발매했지만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찬찬히 뜯어보면 하나하나 무난하게 좋은 곡들이고, 'Dumb Dumb'이나 'Ice Cream Cake' 같은 곡들은 꽤나 상업적인 흥행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5번의 컴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레드벨벳이라는 그룹이 어떤 음악을 하려는지 감이 오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여전히 레드벨벳의 이미지는 선배 그룹들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커피 원두의 배합 비율을 한 번에 알아낼 수는 없는 법.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SM엔터테인먼트는 드디어 레드벨벳을 궤도에 올려 놓는 걸작을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러시안 룰렛 (Russian Roulette)'이다.


쨍하고 비비드한 색감의 뮤직비디오 세트에서 오브제처럼 서 있는 레드벨벳. 이 기묘한 영상 위로 레트로의 향기를 잔뜩 머금은 환상적인 신스팝 사운드가 펼쳐지는 '러시안 룰렛'은 레드벨벳 커리어 최고의 곡이자 2010년대 뉴웨이브 K-POP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마스터피스이다. 마법처럼 중독적인 멜로디, 컨셉츄얼한 레트로 사운드 디자인, 장인정신 넘치는 디테일, 깔끔하게 꾹꾹 눌러 조립한 믹스마스터에 더해 작정하고 내달리는 후반부의 현란한 신스 독주까지, 마치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풍성하고 눈부시게 화려하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을 쉴 틈 없이 쏟아 내며 강렬하고 선명하게 청자를 사로잡는 압도적인 매력을 가진 트랙. 만약 누군가 K-POP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러시안 룰렛'을 재생하라.



G-Dragon, [One Of A Kind], YG엔터테인먼트, 2012

2위

G-Dragon, 'One Of A Kind'


K-POP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한 명의 인물만 뽑아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별 고민 없이 지드래곤(G-Dragon)의 이름을 꺼낼 것이다. 이는 단지 그의 우수한 음악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K-POP 아이돌과 기성 음악계 간의 높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K-POP은 얼굴밖에 가진 게 없는 이들이 연예인이 되고 싶어 택하는 수단일 뿐 제대로 된 음악이 아니라며 멸시하던 사회적 풍조와, 큰 음악적 욕심 없이 팬들의 인기를 누리는 데에만 만족하고 안주하던 아이돌들의 직업 관념 모두를 한꺼번에 부수어버린 주인공 지드래곤은 그래서 역사적인 존재다. 그를 앞세운 그룹 빅뱅은 국내 대중음악 전체로 확대해 보아도 눈에 띌 만큼 훌륭한 작품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쉬지 않고 쏟아냈고, 결국에는 '아이돌'이라는 단어의 인상을 바꾸어 놓았다.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을 완전히 역사에서 지워낼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빅뱅지드래곤은 여전히 아이돌이라는 바운더리 내에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는 '아이돌 중에 제일 잘 하는 애'일 뿐이었던 지드래곤은 칼을 갈고 돌아온 'One Of A Kind'로 비로소 완전한 '탈아이돌'을 이루게 된다. 속도감 넘치는 트랩 비트 위로 특유의 재치 넘치는 스웨거를 맘껏 발산하는 그의 모습은 어디로 어떻게 봐도 '힙합'이다. 물 흐르듯 유연한 플로우로 스킬풀한 랩을 뱉는 솜씨가 여간내기가 아니다. 2012년작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올드하게 느껴지지 않는 래핑과 비트는 물론이거니와 훗날 국내 래퍼들의 가사에서 지겹도록 등장할 'young & rich'라는 가사까지.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지드래곤은 더 이상 K-POP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둬놓을 수 없는 'One of a Kind', '난놈'이다. 콧대 높은 힙합 씬이 드디어 지드래곤씬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의 래퍼 씨잼은 국내 힙합 씬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대표곡 '신기루'에서 "아이돌은 까고 따라하려 하네 GD를" 이라는 가사를 썼다. 같은 해에 한국 힙합의 걸작인 빈지노의 [24:26], 오케이션의 [탑승수속]이 발매되었음에도 결국 한국 래퍼들의 궁극적인 워너비는 다름 아닌 [One Of A Kind]의 지드래곤이었다. 수많은 아이돌들의 롤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명의 래퍼로서 거친 힙합 씬에서까지 아이코닉한 존재로 자리잡은 그에게는 단순히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없었던 길을 혼자 힘으로 만들어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 자리를 빌려 그 눈부신 재능과 성취에 다시금 경의를 표한다.



f(x), [NU ABO], SM엔터테인먼트, 2010

1위

f(x), 'NU 예삐오'


패션쇼는 크게 두 개의 종류- 오트쿠튀르(Haute Coutre)와 프레타포르테(pret-a-porter)로 나뉜다. 오트쿠튀르는 소위 말하는 '하이 패션'으로, 예술성에 초점을 맞추어 창작된 의상을 선보이는 쇼다. 패션쇼 하면 떠올리는 기괴하고 난해한 패션의 이미지는 바로 이 오트쿠튀르에서 비롯되었다. 오트쿠튀르가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날것으로 진열해 제시한다면, 이 아이디어를 일상생활에서 입을 수 있도록 적당히 정제해 현실적인 레디-투-웨어(Ready-to-wear) 기성복으로 내놓는 쇼가 프레타포르테이다. 말하자면 오트쿠튀르가 원액 그 자체라면 프레타포르테는 적절한 비율로 원액과 물을 섞어서 마실 수 있는 음료로 만드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f(x)라는 팀, 그 중에서도 'NU 예삐오 (NU ABO)'는 가히 K-POP의 오트쿠튀르라고 칭할 수 있겠다.


'NU 예삐오'는 아무리 들어도 기묘한 곡이다. 이펙터를 잔뜩 먹인 거친 전자음과 환호 소리가 뒤섞인 난잡한 사운드를 미니멀한 리듬의 육중한 비트가 견인한다. f(x)는 마치 말하는 것처럼 랩을 하고, 아이돌이라기보다는 로봇처럼 무감정하게 가창한다. 가사는 "독창적 별명 짓기, 예를 들면 꿍디꿍디" 같은 4차원 센스를 노래한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거의 모든 여자 아이돌이 소속된 대분류-큐티, 청순, 섹시, 걸크러쉬 등-로는 이름붙일 수 없는 새로운 무엇이다. 이것이 바로 SM엔터테인먼트가 제시하는 새로운 혈액형, 뉴 ABO인 것인가.


오트쿠튀르를 관람할 때의 당황스러움과 닮아 있는 이 혼란을 가라앉히고 투명한 눈으로 다시 바라본 'NU 예삐오'는 가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대중음악으로서의 실용성과 보편성에 대해 반기를 들고 불친절한 사운드와 멜로디를 앞세워 행진한다. 정갈하게 정돈된 가사들에 반항하며 문장 간의 인과 관계를 온통 헤집어 놓고 지극히 추상적이며 파편화된 가사를 내던진다. 'NU 예삐오'는 구슬픈 사랑의 서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랑에 빠진 소녀의 막연하고 연속적인 감정들을 날것 그대로 쏟아 낼 뿐이다.


이처럼 K-POP의 속성들을 낱낱이 해체하여 전부 뒤집어 놓고, 정작 겉 만듦새는 보편적인 장르인 일렉트로 팝의 형태를 띤다. 일단은 K-POP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K-POP이 아닌 이 낯설고 불길한 무언가를 마주하며 청자는 당혹감과 불쾌감에 빠진다. 그리고 이윽고 f(x)는 고글을 쓴 무감정한 얼굴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K-POP인가?". 당신은 대답할 수 있는가?


본래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것에 질문을 던져 담론을 생성하는 것까지가 후기구조주의가 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역할로 충분하나, f(x)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과 함께 자신들이 생각하는 답을 노래 안에서 살짝 보여 준다.


"이런 모습 어때, 이게 나인 걸 어떡해"


f(x)가 2010년의 오트쿠튀르에서 제기한 질문의 답을 찾아 K-POP은 10년 동안 유랑하였고, 이제서야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여정의 끝은 일찍이 그녀들이 제시했던 답과 닮아 있는 듯하다. K-POP은 좌표평면에 존재하는 모든 수들을 아우르며 유영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함수이다. 모든 음악과 신념과 지향과 정체성을 싣고, K-POP이라는 함수는 끝없는 무한을 향해 날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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