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K-POP 트랙 총결산: 베스트 트랙 TOP30
대한민국의 대중음악계는 2010년대 들어 천문학적인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고, 2000년대 중후반 등장한 '한류'라는 단어가 이제 사어가 되었을 정도로 K-POP의 세계적인 인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앨범 판매 초동 100만 장을 넘기는 아티스트가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등장하고, 인기 그룹의 뮤직비디오는 채 이틀도 안 되어 1억 뷰를 돌파하며, 급기야는 마지막 보루인 빌보드 차트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절대로 믿지 못할 사실이다.
* 점수는 편의상 병기한 것으로, 순위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어느덧 데뷔 11주년을 맞은 보이그룹 인피니트는 K-POP의 긴 역사에서도 유난히 더 독특한 팀이다. 그룹의 인지도를 혼자 힘으로 끌어올릴 만큼 비주얼이 뛰어난 '얼굴천재' 멤버-대표적으로 차은우-가 있는 것도 아니며, 소속사 울림엔터테인먼트는 데뷔 당시만 해도 아이돌 육성 경력이 전무한 기획사였다. 트레이드마크인 칼군무도 팬덤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인피니트가 2010년대 초반을 풍미한 인기 그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음악이라는 기본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카라의 '미스터', 'Pretty Girl', 'STEP' 등을 작곡한 히트메이커 작곡팀 스윗튠이 조타를 맡은 인피니트의 커리어는 '다시 돌아와', 'BTD (Before The Dawn)' 등 양질의 곡들을 통해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공전의 히트곡 '내꺼하자'로 드디어 음악방송 1위를 거머쥐며 비로소 대중에게 이름을 각인시켰다. 레드오션 속에서 음악의 힘으로 기어코 트로피를 따낸 인피니트는 후속곡 '추격자'로 그 입지전적인 서사에 방점을 찍는다.
스윗튠 특유의 단단하고 속도감 넘치는 비트와 레트로한 텍스처의 신디사이저, 리얼 세션을 동원한 베이스와 기타라는 특징들이 균형 있게 어우러지는 '추격자'는 인피니트가 지금껏 보여 준 음악들의 충실한 집대성이다. 그런 와중에도 귀에 꽂히는 독특한 질감의 신스 리프와 전통 민요를 활용한 개성적인 가사로 이전의 인피니트와 차별화를 꾀한다. 다채로운 악기가 만들어내는 풍부하고 드라마틱한 사운드에 쉽고 캐치한 멜로디가 얹히니 대중가요로서 더 바랄 게 있을까 싶다. 자극적인 콘셉트와 작위적인 캐릭터가 난무하며 경쟁이 과열된 K-POP 시장에서 뚝심 있게 길러 온 개성적인 음악으로 대중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 인피니트라는 무한성을 상징하는 대표곡으로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우리 모두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두 걸그룹이 K-POP을 양분하던 2000년대 후반을 기억한다. 'Tell Me', 'So Hot', 'Nobody', 'Oh', 'Gee', '소원을 말해봐' 등 역사적인 메가히트곡들이 두 팀으로부터 경쟁하듯 쏟아져 나오던 그 시절, 경이로운 흥행 행진은 이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녀시대가 꾸준히 팬덤을 불려 나가 기어코 유일한 왕좌를 차지한 반면, 원더걸스는 JYP의 해외 진출 야망을 이루기 위해 돌연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미 대륙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얻지 못한 그녀들은 몇 년 간의 공백기로 팬덤이 와해된 상황에 뒤늦게 복귀, 'Be My Baby'를 통해 어느 정도 인기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지만 전국을 흔들어 놓았던 전성기의 화력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리더 선예가 결혼식을 올리며 탈퇴를 선언하고, 인기 멤버인 소희 역시 팀을 떠났다. 그룹의 존속이 위험해질 정도의 진통을 겪었음에도, 무려 3년 2개월 후 원더걸스는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밴드 악기와 함께.
긴 공백기 끝에 발매된 정규 3집 [REBOOT]는 놀라운 작품이다. 전형적인 후크송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그 원더걸스가 댄스 아이돌을 버리고 밴드의 형식을 취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모든 멤버가 앨범 전곡에 작사, 작곡, 편곡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하다. 예은이 키보드, 유빈이 드럼, 선미가 베이스, 혜림이 일렉 기타를 맡아 독립적인 밴드 세션을 꾸려 만든 수록곡 전체가 예은을 제외하고는 작사작곡 경험이 전무한 이들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되고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80년대의 레트로 장르들을 모두 아우르며 사운드의 통일성을 성취한 [REBOOT]의 중심을 탄탄하게 잡아주는 건 역시 타이틀곡 'I Feel You'이다. 네온사인 불빛처럼 번쩍이는 신스 리프가 힘차게 포문을 열고 싱코페이션 기반의 화려한 리듬 위에 박진영의 탁월한 송라이팅이 돋보이는 캐치한 멜로디가 얹히는 이 곡은 80년대 뉴욕의 풍경을 그대로 K-POP에 이식해 온다. 데뷔 9년 차 걸그룹이 이 정도로 파격적인 변신을 하고, 한 술 더 떠 우수한 완성도의 정규 앨범을 내놓는 충격적인 사건은 아마 과거에도 미래에도 다시 보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2000년대 후반 K-POP이라는 산업의 클리셰를 완성한 그룹인 원더걸스는 2015년 그 클리셰를 자기 손으로 다시 부수었다. 아이돌은 기획사에게 마치 인형처럼 철저히 종속되는 존재인가? 아니, 원더걸스는 정규앨범을 자신들의 곡으로 꽉꽉 채울 뿐만 아니라 밴드 연주까지 도맡았다. 아이돌은 후크송처럼 일차원적이고 진부한 음악만을 부르는 존재인가? 아니, 원더걸스는 80년대 프리스타일 장르를 K-POP에 소생시켜 그 어느 때보다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단순히 왕년에 잘 나간 아이돌 정도로 인식하기엔 그녀들의 리부트는 너무나도 새롭다.
데뷔 10년 차가 되어서도 프레쉬할 수 있는 뮤지션은 흔치 않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예전과 같은 감각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아티스트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 아이돌의 경우에는 1년 내에도 대세와 유행이 빠르게 변하고 신인들이 계속해서 수급되기 때문에 평균 수명이 더욱 짧은 편이다. 7년 내로 거의 무조건 멤버 탈퇴 혹은 팀 해체가 발생한다는 '7년차 징크스'라는 말을 마냥 웃어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시장이 커지며 팀의 수명이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이나, 여전히 아이돌에게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과 같다. 롱런하기가 매우 어려운 K-POP의 잔혹성은 코어 팬덤보다는 대중적인 인기가 중요한 걸그룹에게 더욱 엄격히 적용되는데, 현재 멤버 교체나 탈퇴 없이 10년 이상 활동을 정상적으로 이어오고 있는 걸그룹이 대한민국에서 단 한 팀뿐이라는 사실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비록 한 팀뿐이지만 이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을 달성한 그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브라운아이드걸스다.
어느덧 가요계 최고참 걸그룹이 된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정규 6집 [Basic]은 단순히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놀라움 정도에서 그칠 만한 작품이 아니다. 'Fractal', '웜홀', 신의 입자'등 제목부터 독특한 10곡의 수록곡들은 물리학과 양자역학이라는 난해한 모티프를 사랑에 빗대는 흥미로운 접근법을 제시한다. 이뿐만 아니라 세심한 편곡으로 아이돌 음악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풍부한 사운드를 구축한 음악적 완성도 역시 매우 탄탄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트랙은 타이틀곡 '신세계'로, 마치 한 편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같은 역동적인 구성이 일품이다. 베이스, 브라스, 스트링 등 수많은 악기들이 적재적소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으며, 후렴에서는 파워풀한 보컬을 풍성한 코러스가 충실하게 지원사격한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드라마틱한 곡 전개에 맥시멀리즘적인 사운드까지, 이 정도면 정신없이 느껴질 만도 하건만 균형감 있게 트랙을 정돈하는 백전노장 이민수 프로듀서의 손길 덕에 '신세계'는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로 탄생했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수많은 히어로들을 조화롭게 엮어 넣어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 낸 영화 감독 루소 형제가 연상되는 노련한 솜씨다.
K-POP을 사랑한 모든 이들의 가슴 깊숙히 지워질 수 없는 멍으로 남은 그녀는 떠났고, 그로부터 1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 곳은 소란스럽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귀가 먹먹해질 듯한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달아나려 해도 소음은 언제나 안개처럼 쫓아오고 어김없이 밤은 찾아온다. 차가운 방에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도 외로움이라는 괴물에게서 몸을 숨기기란 불가능하다. 뾰족한 천장은 점점 더 어둡고 좁아져만 간다. 모든 것이 끝나 간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설리(SULLI)의 마지막 이야기가 담긴 앨범 [Goblin]을 들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녀의 감성과 내면이 고스란히 담긴 3곡이 수록된 [Goblin]은 빼어난 음악의 완성도에 더해 설리라는 아티스트가 가진 내러티브가 합쳐지며 보기 드문 호소력을 자아내는 수작인데, 수록곡 '온더문'은 노스탤지어틱한 기타가 인상적인 시티팝 트랙이며 '도로시'는 몽환적인 앰비언트풍의 아트팝 곡이다. 허나 이 선명한 수록곡들보다 우리가 주목할 트랙은 타이틀곡인 '고블린'이다. 신비롭게 반짝이는 글로켄슈필의 음색을 시작으로, 발랄한 피아노 반주 위에서 설리의 보컬은 허밍하듯 가볍게 유영한다. 후반부에는 하모니카와 클랩을 비롯한 다채로운 악기들이 더해지며 노래는 악보 위에 아름답게 수놓아진다. 흐르는 개울가 징검다리를 사뿐사뿐 건널 때처럼 후렴 가사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조심스레 발음하는 설리의 섬세한 보컬 표현력은 빛을 발한다.
'온더문'과 '도로시'의 추상화된 시어들과는 달리 '고블린'은 보다 직접적으로 설리라는 개인과 그 삶을 드러낸다. 현실은 '늪'과 같지만 이미 그 차갑고 끈적한 온도는 지겹도록 익숙해져 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이들을 '나쁜 날은 아니야. 그냥 괜찮아'라며 안심시킨다. 물론 그 피곤한 일상이 '지긋지긋한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허나 그녀 자신도 '뭔가 잘못됐다'고 직감하였듯, 그녀가 기르던 반려묘 고블린(Goblin)처럼 털이 없는 '새하얀 살굿빛'의 맨얼굴을 꾸밈없이 내보이는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는 사람 하나가 없었다는 사실은 어딘가 분명히 잘못되어 있다. 이 심연과도 같은 세계의 어둠을 마주하며 그녀는 '무서워하지 마. 그냥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싶을 뿐'이라는 추신을 남기고 노래를 끝맺는다. 다분히 K-POP적인 화려한 댄스곡도, 애절한 현악기를 동원해 감정을 폭발시키는 발라드도 아닌 제3의 길을, [Goblin]의 설리는 택했고 그 낯선 음악 속에 꾸밈없는 진심을 꾹꾹 눌러 적었다. 그녀처럼 세상과 자아의 괴리 속에서 눈물을 떨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결코 잊히지 않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줄 아름다운 복숭아빛 소리들과 함께.
음향적인 면에서 지적할 구석을 도저히 찾기 어려운 [Odd]는 가히 K-POP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겠다. SM엔터테인먼트 특유의 결벽적일 정도로 균형감 있게 정돈된 사운드는 물론이요, 트랙마다 새롭고 다채로운 악기를 활용해 다양한 장르를 전혀 어색하지 않게 아우른다. 멜로디는 직관적이고 정직한 듯 귀에 꽂히면서도 곡 전개는 예상을 뒤엎는다. 실험성에 천착하지도, 대중성에 치우치지도 않은, 기가 막힌 솜씨다. 우리가 K-POP에서 기대하는 모든 요소들을 가장 세련된 모습으로 차려 놓은 11곡의 코스 요리 [Odd]의 수록곡들은 한 곡도 빠지지 않고 고르게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그러나 유난히 더욱 밝은 빛을 내뿜는 한 트랙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View'이다.
전작 'Sherlock', 'Dream Girl', 'Everybody'와 같은 트랙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View'는 힘을 많이 뺀 트랙이다. 사운드와 멜로디로 노래를 빼곡하게 채웠던 전작들과 달리 확실히 여백이 많고 확실히 '빵' 터지는 구간도 없다. 그럼에도 K-POP에서 이렇게 장르의 작법을 그대로 따른 사례는 최초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꾸밈없는 정통 딥하우스 스타일을 선보였다는 사실만으로 'View'의 인상은 오히려 전작들보다도 또렷하게 다가온다. 청량한 소리들로 차분하게 텐션을 쌓아 올리다 둔탁한 베이스가 쏟아지며 직관적인 후렴 멜로디가 내려앉는 사운드로부터는 지금껏 한국 아이돌 음악에서 들어본 적 없는 '본토'의 향기가 풍겨 온다. 이토록 색이 강한 수록곡들 사이에서 타이틀로 선정된 이유가 어렵지 않게 납득되는 마법 같은 트랙.
이제는 무의미한 용어일지도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연예계의 3대 기획사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YG, SM, JYP 세 개의 기획사의 음악색은 흥미롭게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YG엔터테인먼트는 힙합을 기반으로 하는 기획사답게 아티스트의 개성이 극대화되어 나타날 수 있는 음악을 지향하고, JYP엔터테인먼트는 YG처럼 아티스트의 음악적 역량 자체를 부각시키지는 않지만 트와이스의 '샤샤샤' 열풍에서 알 수 있듯 기본적으로는 멤버 개개인의 존재감을 또렷이 각인시키고자 하는 기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SM엔터테인먼트는 조금 다르다. 해외 작곡가들에게 곡을 사 오기 때문인지, SM의 음악에는 아티스트의 기량보다는 비트와 사운드에 더욱 귀 기울이도록 부추기는 듯한 경향이 있다.
레드벨벳은 그러한 기조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팀으로, 대표적으로 '피카부'나 '러시안 룰렛'에서 그녀들은 곡의 주인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짜여진 퍼즐의 조각과 같은 인상을 준다. 아티스트의 보컬을 하나의 악기로 취급하여 튀지 않게 깎아내는 SM 특유의 믹싱 기법 역시 이와 같은 감상에 일조한다. 그래서 음악 자체는 가히 압도적으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레드벨벳이라는 팀이 가진 역량에는 늘 의문 부호가 따라왔다. 냉정히 '피카부'와 같은 트랙은 굳이 가창자가 레드벨벳이 아니더라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만한 곡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음악적 성취를 만들어낸 주역은 작곡팀과 엔지니어들이지, 레드벨벳이 아니다. 그녀들을 비난하는 이들의 이러한 주장에는 다소 어폐가 있으나, 이를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마땅한 근거를 찾기 어려웠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2017년, '빨간 맛'이 발매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빨간 맛'은 잘 만든 멜로디가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지는지에 대한 답을 보여주는 노래다. 대중성을 위해 멜로디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K-POP 걸그룹 지형에서 이런 트랙이 다름 아닌 멜로디에 의존하는 정도가 가장 낮았던 레드벨벳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놀랍다. 게다가 강박적으로까지 느껴졌던 화음 활용을 버리고 합창 형식으로 후렴구를 채우기까지. 우리가 알던 레드벨벳이 맞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도, 그 당혹감은 이윽고 기분 좋은 신선함으로 변한다. 멤버들의 보컬은 더 이상 틀 안의 퍼즐 조각처럼 머물지 않고 힘차고 자유롭게 뻗어 나간다. 피날레를 강렬하게 장식하는 웬디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것은 덤이다. 캐치한 후렴 멜로디는 드라마틱한 구성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 와중에도 악기들 간의 균형을 섬세하게 조절하며 다채로운 퍼커션을 부각시키는 감각적인 사운드 디자인 역시 여전하다. 레드벨벳이라는 팀의 선명성을 극대화하면서 유니크함까지 챙겨 가는 '신의 한 수',
'BAE BAE'의 사운드는 트랩의 장르적 쾌감을 충실히 재현하면서도 흔한 트랩 뮤직과는 결이 다른 개성을 뽐낸다. 피아노, 기타, 보컬 찹 등 다채로운 악기들을 변화무쌍하게 버무려 만든 비트는 때로 관능적으로, 때로 서정적으로 다가오면서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흥을 선사한다. '유니크'하다는 표현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는 신선함이다. 그 비트를 타고 G-Dragon과 T.O.P이 커리어 최고의 벌스를 구사하는 'BAE BAE'는 K-POP이 아니라 그 해의 한국 힙합 씬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힐 만한 트랩 힙합 싱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섹슈얼한 은유가 가득한 가사를 '찹쌀떡'과 같은 한국적 요소로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노련한 센스 역시 일품이다. 메인스트림의 최전선에 서 있는 대중음악 아티스트가 장르적 색깔이 짙은 곡을 타이틀로 내건 것만으로도 이례적이건만, 'BAE BAE'처럼 장르음악으로서의 완성도까지 잡아낸 사례가 K-POP에서 과연 다시 등장할 수 있을까?
옛말에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게 어렵다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K-POP 씬에서는 더욱 그렇다. 허나 왕관의 감촉을 충분히 느껴볼 새도 없이 추락해 버린 팀이 셀 수 없이 많은 이 시장에서 빅뱅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최정상의 위치를 유지하였고, 그 바탕에는 무엇보다 프레쉬하고 도전적인 음악이 있었다. 수많은 논란과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을 K-POP의 역사에서 결코 지워낼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리라.
간단히 말해, 'Free Somebody'는 걸그룹 멤버의 솔로 작업물 중에 이만한 트랙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다. 속도감 넘치는 퍼커션을 타고 감각적인 텍스처의 피아노가 올라탄다. 루나는 그야말로 트렌드의 최전선에 서 있는 스타일리시한 비트에 전혀 밀리지 않고 역동적으로 음을 넘나드는 청량한 보컬로 맞서 낸다. 드랍에서는 보컬 샘플이 비트와 착착 달라붙으며 청각적 쾌감을 제대로 선사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사운드의 향연에 이미 정신이 어질어질한데,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구성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타이트하다. 작정하고 만든 뱅어 트랙(Banger Track)이다. 이 정도의 압도적인 사운드를 지닌 트랙이 미국도 유럽도 아닌 한국에서 나오다니, K-POP 씬의 발전이 새삼 놀랍다.
루나는 타이틀곡뿐만 아니라 'Keep On Doin''과 같은 앨범 수록곡에서도 화려하고 다채로운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밀리지 않고 파워풀한 보컬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결과적으로 미니 앨범 [Free Somebody]는 루나라는 아티스트의 역량과 잠재력을 200% 증명해 보인 작품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티파니의 'I Just Wanna Dance', 태연의 'Why', 종현의 '좋아 (She is)' 등 우수한 일렉트로닉 수작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2016년의 베스트 트랙은 단연코 루나의 몫이었다. 비록 이 이후로 뚜렷한 작업물을 내지 않고 있어 아쉬울 따름이지만, 'Free Somebody'를 부르던 시절의 루나는 보아(BoA)의 뒤를 이을 대형 여성 솔로 아티스트로 부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