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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Nov 08. 2020

2010년대 K-POP 연대결산:
21위~30위

2010년대 K-POP 트랙 총결산: 베스트 트랙 TOP30



대한민국의 대중음악계는 2010년대 들어 천문학적인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고, 2000년대 중후반 등장한 '한류'라는 단어가 이제 사어가 되었을 정도로 K-POP의 세계적인 인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앨범 판매 초동 100만 장을 넘기는 아티스트가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등장하고, 인기 그룹의 뮤직비디오는 채 이틀도 안 되어 1억 뷰를 돌파하며, 급기야는 마지막 보루인 빌보드 차트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절대로 믿지 못할 사실이다.


유례없는 황금기를 맞은 K-POP은 흥행 실적뿐만 아니라 음악의 완성도까지 급격히 성장했다. K-POP은 트렌드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도하기 시작했고, 문화와 산업의 지형은 K-POP에 의해 변화를 거듭했다. 아이돌 그룹의 음악은 기성 음악가들의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질적으로 발전했다. 론사 한겨레, 음원사이트 멜론, 출판사 태림스코어가 47인의 심사위원을 통해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f(x)의 [Pink Tape]가 포함된 것은 K-POP이 이룬 찬란한 성과의 단적인 증거다.


그야말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10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2010년대. <정라리의 케이팝 읽기>는 본 '2010년대 베스트 K-POP 트랙 결산' 기획을 통해 시대를 관통해 음악사의 흐름을 이끈 K-POP의 눈부신 음악적 성취를 되짚어 본다.


* 점수는 편의상 병기한 것으로, 순위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 <정라리의 케이팝읽기>는 음악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아티스트의 사적 논란과 범법 행위에 대해 옹호하지 않습니다.






비스트, [Fiction And Fact], 카카오M, 2011

30위

비스트, 'Fiction'


지금은 하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비스트라는 원 그룹명은 참 무시무시하다. 그룹 이름이 짐승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마초적이고 거친 음악을 하려는 걸까. 예상대로 번쩍이는 가죽 재킷과 짤랑이는 체인을 감고 나타난 그들은 파워풀한 댄스곡 'SHOCK'로 가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마침 흥행에도 성공했고 하니, 이 '짐승남' 노선을 앞으로도 쭉 이어가려나 싶었을 무렵 비스트는 드디어 첫 번째 정규앨범 [Fiction And Fact]를 들고 왔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타이틀곡 'Fiction'은 오히려 그들의 여리고 감성적인 면모를 담고 있었다.


차분한 피아노 리프 위에 애절한 멜로디가 균형 있게 어우러지는 'Fiction'의 완성도는 멤버들의 탄탄한 보컬 덕분에 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능숙하게 감정선을 잡으며 섬세한 표현력을 보여 주는 양요섭의 기량이다. 귀에 쏙쏙 꽂히는 우수한 송라이팅, 서정성 가득한 사운드, 마지막으로 뛰어난 역량의 멤버들까지, 이쯤 되면 더 바랄 게 없다. 과감한 이미지 체인지를 시도한 'Fiction'은 비스트라는 그룹을 '남자들도 좋아하는 보이그룹'의 위치에 올려 놓으며,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인 터닝 포인트가 돼 주었다.



펜타곤, [Positive], 큐브엔터테인먼트, 2018

29위

펜타곤, '빛나리'


가장 강하고 단단한 남성의 표상이었던 K-POP 남자 아이돌들은 어느새인가 조금씩 약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빅뱅은 스스로를 'LOSER'로 칭하기 시작했다. 위너라는 그룹도 있는 마당에 루저라니. 그것도 그 주인공이 '잘 노는 오빠'의 대표주자였던 빅뱅이라니. 믿고 의지할 수 있는-언제나 승리하는-여유롭게 리드하는-막연하게 이상화된 남자 아이돌들의 이미지는 점차 현실 속의 평범한 남성의 이미지로 대체되어 갔다.


이 조류를 완성한 것은 다름 아닌 펜타곤이었다. 빅뱅이 'LOSER'에서 '외톨이, 양아치, 쓰레기'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자기비하 속에서도 아직 잔재하는 마초성을 숨기지 못한 반면, 펜타곤은 자신을 '찌질이, 겉절이, 어린애'와 같은 여리고 보잘것없는 낱말들로 지칭한다. 비로소 보이그룹은 길고 긴 마초성의 그늘로부터 벗어났으며, '찌질한' 자신을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통통 튀는 피아노 반주를 타고 재기발랄하게 가창하는 펜타곤의 모습은 못 봐줄 만큼 찌질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진솔한 고백이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다소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이토록 개성적인 센스와 빼어난 작곡 감각을 가진 펜타곤의 리더 후이에게서 지드래곤의 모습이 얼핏 겹쳐 보인다. 간만에 나타난 흥미로운 재능이다.



마마무, [Pink Funky], RBW, 2015

28위

마마무, '음오아예'


마마무(Mamamoo)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녀들이 가요계에 등장한 이후로 어줍잖은 아이돌들이 '실력파 그룹'이라고 자칭하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별, 솔라, 휘인, 화사로 이루어진 4인조 걸그룹 마마무는 지극히 '탈아이돌'적인 실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이를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켜 안정적이고 단단한 팬층을 형성한 보기 드문 사례 중 하나다.


데뷔 초기, 알음알음 입소문을 탄 'Mr. 애매모호'로 보컬로서의 역량을 과시해 보인 마마무. 허나 아직은 굳건한 팬덤이 있는 아이돌이라기보다는 예쁜 아카펠라 그룹 정도의 느낌이었다.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RBW엔터테인먼트는 대중적인 신스 팝 '음오아예'를 통해 외연 확장을 노렸고, 결과적으로 이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깔끔하게 다듬은 트랙 위에 쉽고 직관적인 멜로디가 얹히고,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자신 있게 뻗어나가는 보컬은 노래의 맛을 제대로 살린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별의 랩은 지루할 틈을 채워 주고, 간드러지는 보이스로 관능적인 매력을 뽐내는 화사의 존재감은 짧은 파트에도 압도적이다. 준비된 자들에게 기회는 왔고, 마마무는 그 기회를 잡았다.



태양, [RISE], YG엔터테인먼트, 2014

27위

태양, '눈, 코, 입'


빅뱅이라는 팀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멤버 구성만 놓고 보면 참 기가 막힐 정도로 놀라운 그룹이 아닐 수 없다. 지드래곤이라는 K-POP 최고의 래퍼이자 프로듀서를 가지고 있는데 동시에 최고의 보컬까지 소속되어 있다. 그것도 흔한 한국식 발라드 보컬이 아니라, 그 드물다는 R&B 계열 흑인음악 스타일의 보컬이다. 바로 태양(TAEYANG)의 이야기다.


씬 최고의 보컬과 래퍼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던 빅뱅은 너무나도 손쉽게 천하통일을 해냈다. 하지만 이에 안주할 수 없다는 듯 지드래곤은 솔로와 유닛 활동을 통해 입지를 더욱 넓혀 갔고, 태양 역시 '나만 바라봐', '웨딩 드레스', 'I Need A Girl' 등 준수한 알앤비 트랙들을 연이어 발매하며 성공가도를 걸었지만 아직 그의 커리어에 방점을 찍어줄 만한 무게감 있는 싱글은 부재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만한 재능에겐 걱정도 사치다. 곧이어 발매된 정규 2집 [RISE]의 타이틀곡 '눈, 코, 입'은 확실한 한 방에 대한 갈증을 단박에 해소시키는 묵직한 걸작이었다. 기량을 뽐내기 위해 화려한 사운드로 치장하기보다는 단촐한 피아노 반주를 선택해 매혹적인 음색과 섬세한 보컬을 한껏 부각시키는 전략은 여느 때보다 강한 호소력으로 다가온다. 비록 머니코드를 적극 사용해 써낸 곡 자체에서 새로운 맛은 없으나 태양이라는 뮤지션은 뻔한 노래에서도 가슴을 울리는 진솔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아티스트다. '눈 코 입'은 그 사실을 대중과 평론가 모두에게 또렷이 각인시킨 우수한 작품이다.



NCT 127, [NCT 2018 EMPATHY], SM엔터테인먼트, 2018

26위

NCT 127, 'TOUCH'


SM엔터테인먼트가 야심차게 출범시킨 NCT는 참으로 '사람 냄새' 안 나는 시스템이다. 멤버를 수십 명 쌓아 놓고 유닛마다 부품처럼 바꿔 넣는다니. 시스템뿐만 아니라 음악도 마찬가지다. '소방차 (Fire Truck)'나 'Cherry Bomb' 등 그들이 보여준 음악은 줄곧 과하다 싶을 정도로 미니멀하고 반복적인 비트 위에 규격에 맞추어 출하된 기계처럼 무감정하게 디렉팅된 보컬을 얹는 작법을 취해 왔다. 때문에 NCT는 국내 최고 수준의 세련된 사운드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더불어 이제 연차도 제법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낯설고 마이너한 인상을 주는 팀이었다. 그래서 NCT의 팬덤이 손에 꼽을 만큼 커진 후에도 여전히 대중들은 그들을 낯설게 인식했다. 허나 SM엔터테인먼트는 오랜 매니지먼트 경력에서 증명해 왔듯 이러한 문제를 가만히 방관하고 있을 풋내기는 아니다.


NCT 127, NCT DREAM 등 다양한 팀에 소속된 멤버 전원이 모여 발매하는 초대형 프로젝트 [NCT 2018 EMPATHY]의 'TOUCH'는 드디어 NCT에게서 인간미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감격스러운 트랙이다. 편안한 미디엄 템포의 비트로 살랑이듯 불어오는 피아노로 출발한 벌스는 큰 낙차로 떨어지는 퓨처 신스와 함께 상큼한 프리코러스로 진입한다. 청춘을 오려내온 듯 출렁이는 신스에 청량한 바다 내음이 풍겨 온다. 멤버들이 다 함께 소리 높여 부르는 달콤한 후렴은 즐겁고 따스하다. 원래부터 우수했던 사운드 디자인은 더욱 발전해 강렬한 청각적 쾌감을 선사하며, 그 느낌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살짝 빼니 NCT라는 팀은 이렇게나 매력적이다. [NCT 2018 EMPATHY]의 아름다운 앨범 커버처럼 NCT에게 드디어 총천연색의 색깔이 입혀지는 듯하다. 'TOUCH'를 2018년 최고의 K-POP 트랙으로 결정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샤이니, [The Misconceptions Of You], SM엔터테인먼트, 2013

25위

샤이니, 'Dream Girl'


'누난 너무 예뻐'라고 노래하며 마냥 귀엽기만 한 연하남 이미지를 갖고 있던 샤이니지만, 보기보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소년들이 아니었다. 정규 2집 [Lucifer]는 타이틀곡의 충격으로 가려지기엔 아까운 수작이었으며, 후속곡 '셜록'은 가히 블록버스터급의 걸작이었다. 점차 음악적으로 성숙해져 가던 소년들은 정규 3집 연작 [The Misconceptions Of You/Me]로 대형사고를 치고야 만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드디어 명반이 나왔다.


지금에야 그룹별로 세계관 하나씩은 다 갖고 있고, 철저한 기획으로 앨범을 구성하지만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앨범 전체의 유기성이나 작품성을 고려해서 만든 음반은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의 인력은 좋은 타이틀곡을 만드는 데에만 집중되었다. 이런 2013년의 K-POP 씬에 샤이니는 트랙 간의 긴밀한 유기성과 일관적인 기획이 돋보이는 콘셉트 앨범을 들고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다. 하나의 주제 하에 다양한 세부 장르를 비슷한 무드로 정갈하게 묶어 정돈한 [The Misconceptions Of You/Me]는 앨범 단위의 아이돌 음악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걸작이었다. 훗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방탄소년단의 'Love Yourself' 연작과 같은 수많은 콘셉트 앨범들의 근본적인 뿌리는 바로 이 앨범에 있다.


그 명반에서 단단히 중심을 지키는 것은 역시 타이틀곡 'Dream Girl'이다. 펑키한 기타와 베이스가 박력 넘치게 내달리고 입에 착착 달라붙는 좋은 후렴구가 따라온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사운드와 보컬이 참으로 담백하다. 어깨에 힘을 꽉 주고 3분 내내 긴장감으로 터질 듯 곡을 채웠던 전작 '셜록'보다 트랙 자체의 파괴력은 약해졌지만, 담백하고 세련된 [The Misconceptions Of You] 앨범 내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앨범의 무드를 해치지 않고 뼈대를 탄탄히 잡아 주는 'Dream Girl'은 명반의 타이틀 곡으로 손색이 없는 웰메이드 트랙이다.



태민, [MOVE], SM엔터테인먼트, 2017

24위

태민, 'MOVE'


수많은 서사와 이야기로 가득한 K-POP이지만, 가장 정석적이고 성공적인 성장 스토리를 가진 인물에 대해 묻는다면 태민의 이름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2008년 고작 만 15세의 나이로 연예계에 발을 내딛은 태민샤이니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멤버는 아니었다. 변성기도 채 끝나지 않았을 정도로 나이가 어려도 너무 어린데다, 같은 팀에는 종현이나 민호처럼 음악적으로나 비주얼적으로나 존재감이 압도적인 멤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곡 내에서 파트를 10초 분배받기도 어려웠던 그 소년은 5년 후 'Dream Girl'과 'Everybody'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샤이니의 음악적 진보를 견인하게 될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샤이니 최초로 솔로 데뷔를 이루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 낸다. 솔로로 발매한 첫 번째 정규앨범 [PRESS IT]는 K-POP 남성 솔로 분야에서 앨범 단위로 이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 준 사례는 최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수한 걸작이었다. 성장이라기보다는 거의 '진화'에 가까운 가파른 발전이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태민의 성장기는 마침내 정규 2집 [MOVE]를 통해 절정으로 치닫는다.


꿈틀대는 PB R&B풍의 베이스와 태민의 촉촉한 보이스는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청자를 깊은 몰입으로 이끈다. 아주 능숙하게 비장한 무드를 아슬아슬하게 이끌어 나가는 보컬이 가히 압권이다. K-POP에 남우주연상이 있다면, 그 영예는 'MOVE'의 태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중성적인 보이스로 섬세하게 빚어내는 감정 표현은 숨소리 하나하나 의도된 듯 완벽하게 작용하며, '무브병'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이례적인 몰입감을 자아낸다. 미니멀한 사운드를 목소리 하나로 완벽히 장악할 정도로 원숙해진 기량을 증명하는, 태민이라는 유일무이한 서사의 완벽한 마무리다.



오렌지캬라멜, [까탈레나],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 2014

23위

오렌지캬라멜, '까탈레나'


카리스마 넘치는 장신 이미지의 걸그룹 애프터스쿨 나나, 레이나, 리지로 이루어진 유닛 오렌지캬라멜은 원 그룹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충격적인 B급 콘셉트를 들고 나타났다. 뽕끼 넘치는 트로트풍 멜로디를 전면에 내세운 '마법소녀'와 '아잉♡', 복고풍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활용한 '샹하이 로맨스', '방콕 시티', '립스틱'에 이르기까지, 당황스럽지만 신선한 콘셉트로 오렌지캬라멜은 연이어 흥행을 이어가며 오히려 원 그룹인 애프터스쿨보다 더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일관성 있는 기획과 꾸준한 대중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음악성에 대한 논의는 전무했다. '병맛'스러운 콘셉트 때문일까, 모두 오렌지캬라멜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도 그녀들을 '아티스트'라고 칭하는 것은 꺼려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허나 기존의 B급 감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한층 깔끔해진 사운드 구성과 여전히 캐치한 멜로디가 돋보이는 '까탈레나'가 발매된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오렌지캬라멜의 눈부신 성취를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었던 개성적인 콘셉트에 음악적 완성도가 더해지니 '아티스트' 이외에 어울리는 호칭은 없다. 


불필요한 무게감과 신비주의를 걷어 내고도 오렌지캬라멜은 결국 독보적인 상징성을 획득했다. 인도의 코미디 영화 <세 얼간이>가 쟁쟁한 예술영화들을 제치고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듯, 한국 가요계에서 등한시되었던 웃음과 가벼움의 미학을 완성한 오렌지캬라멜의 행보는 K-POP이 가진 무한하고 포용적인 가능성을 시사한다.



NCT U, [일곱 번째 감각], SM엔터테인먼트, 2016

22위

NCT U, '일곱 번째 감각'


2010년대 중반 북미에서는 PB R&B(피비 알앤비)라는 장르가 등장했다. 빈티지하고 둔탁한 드럼으로 느린 템포를 구성하고 겹겹이 쌓은 신디사이저로 몽환적인 무드를 만드는 PB R&B는 사운드의 잔향이 은은하게 떠다니는 듯한 앰비언트풍 믹싱과 미니멀한 구조가 돋보이는 트렌디한 장르로 얼터너티브 R&B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계 최고의 팝스타인 드레이크(Drake)더 위켄드(The Weeknd)를 필두로 하여 프로듀서 하우 투 드레스 웰(How To Dress Well), 싱어 프랭크 오션(Frank Ocean), 미겔(Miguel) 등 우수한 아티스트들의 활약으로 PB R&B는 힙스터만의 장르에서 트렌드를 지배하는 주류 음악으로 떠올랐는데, 국내 알앤비 씬에서는 딘(DEAN), 박재범(Jay Park), 크러쉬(Crush) 등이 이 흐름에 올라타 우수한 PB R&B 작품을 발매한 바 있다.


이처럼 국내외 음악계를 휘어잡고 있는 대세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PB R&B와 K-POP은 여전히 유의미한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식 발라드에 익숙한 국내 대중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뿐더러 우울하고 몽환적인 장르의 무드가 아이돌이라는 산업의 속성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아무런 전조도 없이 K-POP 최초의 PB R&B가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 그 이름은 '일곱 번째 감각'이다.


PB R&B가 언젠가 K-POP에 들어오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런 건 예상 밖이다. 국내 최대의 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에서 사운을 걸고 출범시키는 야심찬 신인 그룹이 무려 데뷔곡으로 이렇게 실험적인 시도를 하다니, 얼핏 보면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과감한 출발이다. 그러나 악곡의 기본적인 완성도가 받쳐주니 당혹감은 이윽고 즐거움으로 변한다. 미니멀한 비트의 만듦새는 세련된 디테일이 살아 있으며 곡 끝까지 몽환적인 그루브를 잃지 않는 뛰어난 완급 조절이 돋보인다. 후반부에는 분위기를 환기할 마크의 당찬 랩을 배치하며 가창자존재감 역시 잊지 않고 챙겨 간다. 장르를 충실히 이해하고 아이돌 음악 산업에 자연스럽게 접합시키려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2020년 현재까지도 '일곱 번째 감각'은 PB R&B를 K-POP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K-POP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데뷔다.



가인, [Talk About S.], 카카오M, 2012

21위

가인, '피어나'


남녀노소 고루 즐기는 행복하고 즐거운 음악, K-POP은 '전체이용가'다. 그래서 K-POP은 지겹도록 사랑에 대해 노래하면서도 그 표현 방식은 언제나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의 이야기처럼 극도로 이상적이고 추상화된 형태를 취해야만 했다. 가사에 욕이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방송과 라디오에서 송출이 금지된 방탄소년단 슈가의 솔로곡 '대취타'의 사례만 보아도 K-POP은 참으로 많은 금기 사항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산업이다.


인간으로서의 불완전성과 욕망은 도려내진 예쁘고 아름다운 부분만을 보기 좋게 전시하는 우리네 아이돌 시장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키워드는 아마 섹슈얼리티(Sexuality)일 것이다. K-POP의 화자는 언제나 손만 잡아도 얼굴이 빨개지는 순수한 소년-소녀이며, 교과서 속의 바르고 건전한 사랑을 지향한다. 빅뱅을 비롯한 힙합 아이돌의 영향으로 다행히 남성 아이돌은 이 족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으나, 여성 아이돌에게는 여전히 금기가 엄격하게 적용되어 걸그룹 음악의 화자를 천편일률적인 '앳되고 순진한 소녀'로 획일화시켰다.


그런 기형적인 K-POP 씬에서 2012년, 브라운아이드걸스가인은 제목부터 지극히 도발적인 솔로 앨범 [Talk About S.]를 들고 나타난다. 여성 작사가인 김이나 작사가가 대부분의 트랙 작사를 맡은 이 앨범은 여성의 주체적이고 당당한 섹슈얼리티를 담고 있는데, 노골적인 주제를 시적으로 표현해 내는 김이나의 서정적인 가사 덕에 저속성보다는 미학적인 예술성이 느껴진다. [Talk About S.] 안에는 타인이 가인에게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 자신이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은 솔직한 감정과 욕망이 꾸밈 없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앨범은 특별하다.


가인의 앨범이 가진 강력한 설득력은 역시 탄탄한 음악적 완성도로부터 비롯된다. 타이틀곡 '피어나'의 기타 리프는 가히 매혹적이라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펑키한 기타와 피아노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그루브와 함께 가인은 관능적인 보컬을 마음껏 뽐낸다. 매끄러운 벌스와 짧은 프리코러스를 지나 터져 나오는 후렴은 풍성한 백그라운드 보컬과 보코더를 사용해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아이유의 '좋은 날', '너랑 나' 등을 작곡한 베테랑 작곡가 이민수가 악기들을 균형감 좋게 손질하여 조화롭게 배치한 사운드는 그 여느 때보다 수려하다. 멋진 음악을 타고 가인 역시 뛰어난 곡 해석력으로 최대의 기량을 발휘한다. K-POP의 금기를 과감하게 건드리면서 세련된 사운드와 가사리스너를 매혹시키는 '피어나'는 제목 그대로 황무지에 피어난 한 송이의 향기로운 꽃 같다.


역사는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가인이 이 앨범을 통해 과감하고 당찬 메세지를 던진 2012년에서 8년이 지난 오늘날 2020년의 K-POP이 더욱 포용적이고 자유로운 산업이 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유일하게 단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K-POP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든 [Talk About S.]는 역사 속에서 더욱 밝은 빛을 발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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