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데이프로젝트 〈ONE MORE TIME〉
어떤 밤은 유난히 빨리 닳아 없어진다. 시계를 보면 여유가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몸과 마음은 벌써 “조금만 더”를 외치고 있다. 음악은 점점 속도를 올리고, 친구들은 “이 곡만 더 듣고 가자”라고 서로를 붙잡는다. 어차피 해는 곧 떠오를 것이고, 오늘 밤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을 미뤄 달라며 “one more time”을 던진다. 올데이프로젝트의 〈ONE MORE TIME〉은 바로 그 순간, 끝을 예감하면서도 다시 한번 몸을 던지고 싶어지는 마음의 결을 세밀하게 따라간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사는 시대를 “유동하는 근대”라고 불렀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예전의 삶에는 비교적 안정적인 축이 있었다. 오래 다니는 직장, 평생을 함께할 것 같은 관계, 한 도시에서의 긴 거주처럼, 삶을 지탱해 주는 몇 개의 굵은 기둥이 존재했다. 인생은 느리게 페이지를 넘기는 한 권의 두꺼운 소설에 가까웠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와 다른 감각 속에 있다. 도시와 직장, 관계와 취향이 빠르게 바뀌고,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기보다 계속해서 새로운 선택지로 이동한다. 바우만이 말한 “유동성”은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킨다. 쉽게 고이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삶, 오래 버티는 약속보다 짧지만 강렬한 경험들이 중심으로 올라오는 시대.
이때 행복이나 만족을 느끼는 방식도 함께 달라진다. 과거의 행복이 마라톤 완주 후 찾아오는 긴 안도감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행복은 눈앞에서 짧게 번쩍이는 간판에 더 가깝다. 하나의 목표를 끝까지 밀어붙여 얻는 평온이라기보다, 이어지는 밤과 노래 속에서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강도를 통해 “지금은 분명히 살아 있구나”라고 확인하는 식이다. 바우만은 이를 단순한 퇴행으로만 보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시간 감각이 더 이상 “완결된 이야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삶은 이제 한 편의 장편 서사라기보다, 계속 갱신되는 “다음 장면들의 연속”에 가깝다.
이 렌즈를 들고 〈ONE MORE TIME〉을 다시 들어 보면, 이 곡은 단순한 파티 송이라기보다 이런 시대의 한 단면을 또렷하게 비추는 노래로 보인다. “느껴봐 something in the air tonight”, “빛이 나 다신 오지 않을 이 순간” 같은 가사는 이 밤이 언젠가 끝나 버릴 것을 전제하고 있다. 끝을 모른 척하지 않고, 오히려 “다신 오지 않을”이라는 표현으로 유효 기간을 분명히 표시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one more time wanna get lost in the night”, “come on just dance with me now”라고 말하며, 사라질 시간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뛰어든다. 곧 꺼질 불꽃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그 빛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는 태도다.
후렴의 “해 뜰 때까지 다 move body body”, “ready to go ya ya ya”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일의 피로, 다음 날의 일정이 아니다. 지금 내 옆에서 같은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사람들, 음악과 심장이 동시에 뛰고 있다는 묘한 안도감이 우선이다. 이 시간이 끝난 뒤에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지, 어떤 성과를 남길 수 있는지는 뒤로 밀린다. 의미는 사후에 붙는 설명이 아니라, 함께 춤추는 몸짓 안에서 먼저 만들어진다.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점점 “나중에 설명할 수 있는 삶”보다 “지금 체감되는 삶”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그렇다고 〈ONE MORE TIME〉이 현재의 쾌락만을 무작정 미화하는 곡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finally here I’m alive”, “틀어줘 song that I like”라는 고백에는, 수많은 초대와 광고, 알림과 유혹 속에서 드물게 자신과 정확히 맞는 리듬을 찾았을 때의 안도감이 배어 있다. 유동적인 세계에서 우리는 매일 같이 수많은 선택지를 스쳐 지나간다. 그 대부분은 금세 잊히거나, 내 감각과 미묘하게 어긋난다. 그런 가운데 “이건 진짜 내 노래다”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시간을 조금 더 늘리고 싶어 한다. “one more time”이라는 말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어렵게 찾아낸 조율의 순간을 쉽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표현에 가깝다.
바우만의 진단을 조금 더 밀어붙이면, 오래 지속되는 것을 약속하기 어려운 시대일수록 오히려 사람들은 “지금 이 공기와 박동을 함께 나눌 누군가”를 더 간절히 찾게 된다. 〈ONE MORE TIME〉의 화자가 결국 바라고 있는 것도 그런 동반자에 가깝다. “해 뜰 때까지”라는 표현은 마냥 밤새 놀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이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된 범위라면, 그 안에서만큼은 확실히 너와 나의 차례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에 가깝다. 내일의 보장이나 먼 미래의 안정 대신, 오늘 여기에서만큼은 분명히 우리 두 사람의 시간이라고 말해 보려는 시도. 유동하는 시대에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충성은 어쩌면 이런 문장일 것이다. 잠시뿐인 장면일지라도, 지금만큼은 확실히 함께 있겠다는 약속.
물론 이런 유동성에는 그림자도 있다. “다신 오지 않을 이 순간”만을 계속 좇다 보면, 언젠가 돌아가 쉴 수 있는 이야기의 토대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늘 다음 장면만을 향해 달리다 보면, 정작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감각을 잃어버리기 쉽다. 〈ONE MORE TIME〉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양가성을 억지로 해결하려 들지 않고, 노래의 질감 속에 은근히 함께 두고 간다는 점이다. 빠른 비트와 밝은 멜로디 사이에는, 사실 각자의 하루가 얼마나 버거웠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뒤로 미뤄 둔 채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기척이 희미하게 스며 있다. 쉽게 잊힐지도 모를 오늘이지만, 최소한 이 밤만큼은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 속에서 짧게 번쩍인다.
결국 이 노래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너는 어떤 밤에, 누구와 함께, one more time을 말하고 싶으냐”는 것. 유동하는 시대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계약도, 관계도, 취향도 언제든 업데이트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간이 다 같은 값으로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끝을 미리 알면서도 다시 한번을 청하게 만드는 장면들, 해뜨기 직전까지도 자리를 뜨고 싶지 않게 만드는 얼굴들이 있다. 바우만이 말한 유동성은, 그런 농도가 진한 순간들을 완전히 지워 버리지는 못한다.
〈ONE MORE TIME〉은 그런 밤을 음악으로 잠시 붙들어 두려는 시도로 들린다. 완벽한 내일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오늘의 박동을 끝까지 따라가 보자고 건네는 초대. 안전한 거리를 두고 삶을 해설하는 대신, “이 곡만 더 듣자”라고 말할 수 있는 쪽을 택해 보는 마음. 언젠가 이 밤이 기억에서 희미해질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우리 차례였다는 것을 몸으로 한번 더 확인해 보는 일. 어쩌면 그것이, 유동하는 세계를 통과하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