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괜찮아질 거야”란 거짓말에게

유라(youra), 〈1993년〉

by 문어

이상하게 특정한 연도가 신경 쓰인다. 주민등록번호에 유독 많이 들어있는 숫자, 출생 연도, 온 나라가 들썩이던 2002년 같은 해도 그렇다. “그때는 다들 세상이 좋아질 거라고 믿었지”라는 말을 어른들에게 한 번쯤은 들어봤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TV와 교과서와 어른들의 입에서 비슷한 문장이 반복되곤 했다. 경제는 커지고, 기술은 빨라지고, 국경은 더 열릴 거라고. 그러니 조금만 견디고 조금만 더 잘하면, 세상은 분명히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돌아보면, 그 “괜찮아진다”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뜻했는지 선뜻 말하기가 쉽지 않다. 유라의 〈1993년〉은 바로 그 불분명한 지점을 찌르는 노래다. “세상은 틀림없이 괜찮아진단다 / 1993년 1993년”이라는 구절을 반복할 때, 이 곡은 단순히 한 해를 회상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 해에 널려있었던 막연한 낙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등을 훗날의 자리에서 다시 더듬어 보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이런 감각은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20세기 초의 전쟁과 파시즘을 통과하며, 근대의 역사 이해를 비틀어 보고 제기했던 문제의식과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벤야민에게 역사는 곧장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직선이 아니었다. 그는 근대 사회에서 널리 공유되던 “시간은 흐르고 인류는 총체적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실제로는 승자의 관점에서만 그려진 것이라고 의심했다. 국가와 제도, “발전한 사회”를 말할 때, 그 뒤편에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패배와 좌절, 이름 없이 사라진 삶의 조각들이 거대한 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벤야민의 시선은 단순한 냉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때때로 과거의 어떤 순간과 현재의 경험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맞부딪히며, 오래된 약속과 지금의 감각이 서로를 향해 번쩍하고 튀어 오르는 장면을 이야기한다. 그때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배경이 아니라,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건이 된다. 〈1993년〉은 그런 충돌의 지점을 한 사람의 언어로 포착하고 있는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이 지점을 조금 더 또렷하게 이해하려면, 벤야민이 문제 삼았던 두 가지 개념을 먼저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앞에서 언급한 “진보”라는 상상 방식에 대한 의심이다. 그는 근대 이후 지식인들이 자주 그려 온 역사 서사, 즉 마치 직선 위를 전진하는 기차처럼 인류가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서술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성숙한다”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이 무너져 내렸는지에 대한 질문은 뒤로 밀려나기 쉽다. 벤야민의 눈에 역사는 대체로 승리자의 입으로 말해지는 이야기였다. 국가와 “발전”을 이야기할 때, 그 뒤에는 늘 갈 곳을 잃은 사람들, 통계에서 지워진 패배,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 삶의 계획들이 보이지 않는 잔해처럼 쌓인다. 그는 행진하는 사람들의 깃발과 구호만 보지 않고, 그 뒤편에 흩어진 파편들도 함께 보려고 했다. 이때 역사는 매끈하게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짧지만 밀도가 높은 순간들, 특정한 장면들의 응축된 집합에 가깝다. 두 번째는 시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연결되는 “지금-여기”의 감각이다. 벤야민에게 과거는 단순히 ‘한때 있었던 일들’의 더미가 아니다. 현재의 어떤 경험, 한 문장, 한 장의 사진, 한 곡의 음악이 과거의 특정한 순간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맞물릴 때, 시간은 단순한 흐름에서 벗어나 하나의 사건이 된다. 그는 이런 장면을, 흩어진 별들이 선을 이어 하나의 별자리가 되듯, 떨어져 있던 사건들이 현재와 엮이며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는 순간으로 그려냈다. 과거는 이제 박제된 기록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다시 읽게 만드는 질문으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이 궤에서의 희망은 “언젠가 저 멀리에서 도착할 더 좋은 시대”라는 거대한 약속이 아니라, 이런 충돌 속에서 아주 약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다른 가능성의 흔적에 가깝다. 벤야민은 그것을 종교적 언어로 포장하기보다, 폐허가 된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작은 방향감각, 다른 리듬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미약한 감지로 이해하려 했다.


이제 〈1993년〉의 가사를 다시 들여다보면, 이 노래가 “괜찮아질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비틀고 있는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인다. “세상은 틀림없이 괜찮아진단다 / 1993년 1993년”이라는 반복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부모 세대가, 선생님이, 혹은 뉴스 화면 속 누군가가 했을 법한 문장이다. 1993년이라는 연도는 단지 어느 해가 아니라, 그런 말을 믿고 자라난 세대에게 출발점이 된 상징적인 연도처럼 기능한다. 벤야민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그 시기에는 이미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그림이 당연한 전제처럼 깔려 있었다. 그런데 화자가 서 있는 현재의 자리에서 그때의 문장은 더 이상 순진한 약속처럼 들리지 않는다. “결승선을 목전에 두고 / 작은 행복 작은 차원까지 / 앗아 가고 있어”라는 고백에는, 더 나아지자는 구호가 거꾸로 지금 손에 쥐고 있던 사소한 기쁨들부터 잠식해 들어온다는 경험이 스며 있다. 더 좋은 성적, 더 나은 직장, 더 많은 성취를 향해 달릴수록, 막상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친구와 웃던 밤, 혼자 느릿하게 걷던 골목, 숨을 고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된다. 결승선은 분명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선에 가까워질수록 발밑의 땅이 서서히 꺼져가는 느낌이다. 벤야민이 봤던 근대의 행진과 이 장면 사이에는 묘한 공명이 있다. “인류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수많은 계획과 정책이 실제로는 어떤 이들에게 최소한의 삶의 기반을 빼앗아 갔는지, 그들 입장에서 세상은 과연 나아졌다고 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93년〉에서 화자는 거대한 역사 담론 대신, 잘 다듬어진 사과, 말라 버린 몸, 힘이 빠진 새의 깃털 같은 이미지를 끌어오면서, 보기 좋게 포장된 성장의 이야기 뒤에 남은 소진의 윤곽을 드러낸다.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달리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지금-여기의 숨과 살을 소모하게 만들었는지, “괜찮아진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피로의 그림자가 어떻게 퍼져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노래에서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향해 비틀리며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저 망원경은 수년간 바닥을 향했었고 / 별이라 불리던 건 실체가 없어”라는 대목을 보면, 망원경은 원래 위를 보라고 있는 도구이고 더 멀리, 더 높이, 더 밝은 별을 보라고 권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노래 속 망원경은 수년간 “바닥을 향해” 있다. 하늘을 보라는 모든 구호, “꿈을 크게 가지라”는 강조와는 반대로, 화자의 시선은 땅, 균열, 쓰레기, 부서진 삶의 조각이 모여 있는 아래쪽을 향한다. 그리고 한때 별이라고 불리던 것들, 빛나야 한다고 여겨지던 목표들이 실은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허상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한다. 벤야민이 진보의 행진 뒤편에 쌓여 있는 잔해를 보려 했던 시선이 여기서는 개인의 언어로 번역된다. 동시에 “1993년”이라는 연도는 시간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지점이 된다. 그 해를 향해 던져졌던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은 뒤늦게 현재와 마주치며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벤야민 식으로 보자면, 과거의 한 순간과 지금의 경험이 서로 엮이며 하나의 별자리를 이룬 장면이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기대, 좌절, 구호와 일상의 감각들이 “1993년”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새로운 모양을 그리는 것이다. 과거는 단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는 지점으로 되살아난다. 나아가 〈1993년〉을 듣는 현재의 청자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가사 속 연도가 실제 자신의 출생 연도와 일치하든 아니든, 각자의 마음 한쪽에는 자기만의 “199X년”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정말 다 좋아질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고 싶은, 그러나 지금의 자리에서는 쉽게 꺼내기 어려운 해 말이다. 노래는 그 연도를 다시 호출해, 발전의 언어와 자기 삶의 감각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벤야민이 비판했던 직선적인 발전 서사는 〈1993년〉의 장면들과 촘촘히 얽히며, 과거가 현재를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멈춰 서는 곳은 완전한 허무나 냉소가 아니다. 가장 인상적인 구절 중 하나인 “절망만 아홉 번 천천히 세어 놨는데 / 딱 한 번 손톱 같은 희망이 자라난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여기서 희망은 거창한 구호나 장밋빛 설계도가 아니다. 아홉 번을 세어도 대부분은 절망이고, 겨우 한 번 남는 것은 “손톱 같은” 아주 작고 연약한 징후일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희망은 공허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는다. 벤야민이 붙들었던 가능성도 이런 종류에 더 가깝다. 그는 폐허가 된 시간 속에서 “언젠가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슬로건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여기에서 간신히 자라나는 다른 방향의 감각, 다른 리듬의 삶, 다른 식의 연대를 감지하려 했다. 이런 것들은 너무 작고 미세해서, 관심 있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금세 사라질 것 같은 것들이다. 한 사람의 표정, 아주 짧은 문장, 엉성하지만 진짜인 제스처 하나. 〈1993년〉의 화자가 절망을 “아홉 번 천천히 세어 본” 뒤에야 겨우 손톱만 한 희망을 발견하는 모습은, 이런 감각을 잘 보여 준다. 중요한 것은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서둘러 덮어 두지 않고 끝까지 세어 본 뒤에도 포기되지 않는 어떤 감각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이 작은 희망은 거대한 역사의 기차를 단번에 다른 선로로 돌릴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무너져 내린 자리에서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다른 가능성의 잔향이다. “세상은 틀림없이 괜찮아진단다”라는 말에 더 이상 순진하게 동의할 수 없으면서도, 그 문장을 완전히 폐기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화자는 그 말이 실제로 어떤 삶의 결을 깎아 왔는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아진다”는 말을 다른 뜻으로 다시 말해 보고 싶어 한다. 지금-여기의 숨과 몸을 갈아 넣는 방향이 아니라, 서로의 피로를 인정하면서도 견딜 수 있게 하는 리듬으로 바꾸어 쓸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더듬는다. 손톱 같은 희망은 바로 그런 다시 쓰기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작은 표식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벤야민이 이 노래를 들었다면, 그는 아마 〈1993년〉을 “진보 신화를 향한 세대의 반격”이라고만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1993년”이라는 연도가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어떤 별자리를 이루는지, 그 해를 둘러싼 기대와 환멸이 지금의 감각과 어떻게 부딪히는지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세상이 점점 나아질 것이라는 말에 기대어 달리다가, 어느 순간 그 말이 자기 삶의 결을 어떻게 지워 왔는지 마주 서는 장면. 하지만 그 자리에서 화자가 완전히 냉소로 떨어지지 않고, 손톱만 한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는 태도. 벤야민에게 이 노래는, 폐허를 응시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방향을 향한 미약한 몸짓을 포기하지 않는 한 편의 세속적인 기도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노래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남기는가 하는 점이다. 각자의 삶에서 “1993년”에 해당하는 해는 언제일까. “세상은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을 믿었던 시기가 한 번도 없었다고 정말 말할 수 있을까. 그 말을 더 이상 그대로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지금, 나는 그 문장을 어떤 식으로 다시 쓰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가. 또 한편으로, 내 삶에서 “손톱 같은 희망”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나. 거창한 성공이나 눈부신 계획이 아니라, 무너질 것 같은 하루를 간신히 버티게 해 준 아주 작은 장면들, 예상하지 못했던 누군가의 말 한마디, 나조차 금방 잊어버릴 만한 사소한 숨의 순간은 무엇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