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전에, 빛을 잠깐 빌리는 일

시온 〈firefly〉

by 문어

새벽 두 시 오지 않는 밤, 불을 끈 채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빛으로 찾아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종종 이런 밤이 있다. 조용함이 위로가 아니라 확인처럼 느껴지는 밤. 오늘 하루를 설명할 말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입을 열면 문장들이 흐드러져버리는 밤 말이다.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모르는 감정들이 부서지고, 그저 뭔가 잘못됐다는 감각만 몸에 남아 있는 밤. 세상이 내게 무언가 말해 줄 것이라 바라는데, 도착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공기뿐이다. 그 순간을 시온의 〈firefly〉는 포착해 낸다. 이때 던져지는 파편은 폭발하거나 절규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 낮고 조용해서 귀보다 몸이 먼저 받아 내게 된다. 이어 그 파편들은 하나씩 떨어지며 사건이 아니라 상태를 그린다.

이 곡은 화려하지 않다. 큰 소리로 울지도 않고, 희망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대신 불이 나고, 다 타고 난 뒤에도 어딘가에서 숨이 이어지고, 빛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를 무언가를 잠깐 빌리고 싶다고 말한다. 시온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 언어를 가진 뮤지션으로, 재지한 감수성과 내밀한 서사가 뒤섞이는 음악을 만들어 왔다. 〈firefly〉는 그 내밀함이 가장 날것으로 드러나는 지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곡은 아주 조용하게 무너지고 있는 어떤 상태를 포착하는 곡이며, 그 무너짐은 특별한 재난이 아닌, 설명을 요구했다가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한 이후의 정서에 가깝다.

응당 반딧불이란 태양처럼 모든 것을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깜빡이는 존재다. 이 맥락에서 노래의 정서는 환하기만 한 긍정이 아니라, 어둠과 함께 있는 채로 지금을 놓치지 않으려는 미세한 지점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 노래가 도달한 순간은 삶이 잘 풀리거나 희망이 넘칠 때가 아닌, 삶이 왜 이 모양인지 설명을 요구했다가 세계로부터 아무 대답도 받지 못한 뒤의 상태와 가깝다. 그 공기 속에서 노래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같이 그 공기 안에 있어 준다. 이어폰 속 음악만이 그 공기를 잠깐 달리 만들어 주는 밤, 새벽의 그 방에서 이

글은 출발한다.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귀가 어두운 어머니,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과 가난의 냄새가 그의 사유를 빚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청년기에 폐결핵이 찾아왔고, 전쟁을 견뎌냈으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신문의 편집을 맡았다. 그는 자신이 실존주의자라 불리는 것을 거부했지만, 삶의 부당함을 직시하면서도 그 앞에서 무너지기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20세기 사유의 중심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태양 아래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은 세계와의 근본적인 불화를 이미지로 압축한 것으로 해석된다. 1957년 받게 된 노벨 문학상은 그가 철학자이기 이전에 문학가였음을 상기시키지만, 분명 그의 글은 철학적 물음과 문학적 감각이 분리되지 않는 자리에 있다. 불행히도 그는 46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짧은 삶이었으나 그 안에서 그는 부당한 세계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었다.

이러한 궤에서 그의 철학 중 주목할 두 개념은 그의 대표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출발한다. 첫 번째 개념은 부조리(l’absurde)다. 여기서 부조리는 인생이 본질적으로 텅 비었다는 허무의 선언이 아니다. 인간이 의미와 근거를 갈망하는데 세계가 그 갈망에 상응하는 명확한 답을 돌려주지 않는 조건, 그 팽팽한 긴장 자체가 부조리다. 인간의 질문과 세계의 침묵이 맞부딪히는 순간이 부조리가 태어나는 자리인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개념 B는 반항(la révolte)이다. 카뮈에게 반항은 파괴적 분노나 영웅적 결의가 아니다. 스스로 삶을 끊는 방향을 선택하지 않고, 답이 보장되지 않아도 오늘의 선택을 이어 가는 지속의 태도다. 반항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이 삶을 종결하는 방향으로 굴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버팀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개념이 〈firefly〉와 만날 수 있는 까닭은, 노래가 부조리의 조건을 해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은 완전히 꺼지지 않고, 가사의 ‘빛’은 여전히 최소한의 단위에 불과하며, 호흡은 그럼에도 계속된다. 카뮈가 그린 인간의 형상과, 이 노래가 집중하는 존재의 방식이 서로를 향해 기울어지는 자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부조리는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설명이 무너지는 순간에 나타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왜”를 묻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왜 하필 지금인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뮈는 그 ‘왜’가 메아리 없이 돌아오는 공간을 부조리라 불렀다. 세계는 침묵하고, 인간의 질문은 공중에 떠서 착지하지 못한다. 여기서의 설명은, 세계가 개인에게 적대적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세계가 근본적으로 무관심하다는 의미이다. 그 무관심 앞에서 인간의 갈망이 공허하게 메아리칠 때, 부조리는 조건이 된다. 그리고 그 조건 속에서 삶은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설명과 침묵 사이의 어딘가에 떠 있게 된다.

〈firefly〉의 “Housefire / Burn it off / Still breathing / The afterthought”는 이 구조를 정확히 담는다. 무릇 집에 불이 났다는 것은 사건이다. “Burn it off”는 그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데 “Still breathing”은 설명이 아니다. 몸은 그냥 숨을 쉰다. 사건과 의미 사이에 설명의 다리가 놓이기 전에, 몸은 먼저 움직이는 것이다. “The afterthought”는 그다음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생각이다. 이 순서가 바로 부조리의 구조를 닮았다. 삶은 먼저 일어나고, 의미는 뒤늦게 오거나 혹은 끝내 오지 않는다.

한편 “I guess I don’t have to think since I’ve blown the fuse”에는 또 다른 차원을 다룬다. 당연히 퓨즈가 나가면 집 전체가 어두워진다. 그 어둠은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다. 이때 생각을 멈추고 싶다는 말은 포기의 선언이 아니라, 설명을 만들어 내기 위한 정신적 노동 자체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고백에 가깝다. 세계가 침묵한다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 된다. 그리고 부조리란 그 생산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순간에 출몰하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Could you give me a minute of your light? “는 세계에 대한 큰 요구를 내려놓고 남은, 가장 작은 단위의 요청이 된다. “Just wanna hold my time”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현재가 경사면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지탱하려는 몸짓인 것이다. 노래는 그 필요를 ‘해석’ 대신 ‘호흡’의 형태로, ‘의미’ 대신 ‘리듬’의 형태로 전달한다.


반항을 오해하기 쉬운 지점은, 그것이 분노의 폭발이나 저항의 극적인 몸짓을 의미한다고 여기는 데 있다. 카뮈의 반항은 그것과 다르다. 되려 카뮈에게 반항은 세계가 갈망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스스로 삶을 끊는 선택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답이 없는 내일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 반복을 의미한다. 이때 반항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존재를 스스로 종결하는 선택이다. 그 선택을 하지 않는 것, 오늘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 그것이 카뮈적 반항의 핵심이다. 이 반항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만 더”를 반복하는 보통의 이야기다.

이 관점에서 “Stay with me / A little longer.” 이 문장은 영원을 요청하는 약속이 아니다. 오히려 끊어지려는 리듬을 한 박자 더 이어 달라는 요구이다. 그리고 “Just wanna hold your light”로 대상이 ‘내 시간’에서 ‘너의 빛’으로 이동하는 순간, 붙들려하는 것은 자신의 리듬이 아니라 타자의 현존이다. 이것은 타자가 나를 완성해 준다는 의존의 서사라 볼 수 없다. 그저 무너질 듯한 주체가 완전히 고립되지 않도록 잠깐 기댈 수 있는 공동의 자리를 만드는 방식이다. 카뮈의 반항이 본질적으로 개인의 결단처럼 보이지만, 그 결단이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Stay with me”라는 문장이 그 진공을 채운다.

이어 “Breathing, breathing as I fall / I can be someone new”에서 추락은 실패의 결말이 아니다. 떨어지면서도 숨을 쉰다는 것은 추락 중에도 살아 있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며, 그 추락이 변형의 통로가 된다. “Fireflies, fireflies glowing up”에서의 점멸은 이 모든 것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반딧불은 사라짐과 다시 켜짐을 반복한다. 답이 있을지 모른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켜는 행위, 카뮈의 반항이 “현실을 미화하지 않기”를 포함한다면, 반딧불의 빛은 바로 그 미화 없는 빛이라 해석될 수 있다. 어둠을 지우지 않고, 어둠이 있음을 전제한 채 그 안에서 깜빡이는 것이다. 부조리가 긴장의 조건을 설명한다면, 반항은 그 긴장 속에서 삶의 방향을 다시 잡는 방식이다. 부조리를 직접 마주한 이후에야 반항이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는 점에서, 이 둘은 대립이 아닌 심화의 관계를 이룬다.


〈firefly〉는 부조리와 반항이라는 두 개념을 가사에서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래가 그린 세계는, 카뮈가 오랜 사유 끝에 도달한 윤리의 형태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의미를 만들려 하지 않고,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며, 그러나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 태도, 그것이 부조리 안에서 반항하는 인간의 형상인 동시에 그것이 이 노래가 최소한의 빛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시온의 목소리는 부조리의 조건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 조건 속에서 “한 번 더”를 선택하는 리듬을 들려준다. 만약 카뮈가 이 노래의

가사를 읽었다면, 그는 이 빛을 위안의 장치로만 보지 않았을 것이다. 되려 세계의 침묵을 삭제하지 않은 채 그 침묵 속에서 계속 선택을 이어 가려는 작은 윤리로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철학 서재가 아니라 새벽의 이어폰 안에서, 어떤 사유가 이미 몸으로 살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새벽의 방으로 돌아온다. 가로등 빛은 여전히 창문 틈으로만 들어오고, 차마 밝혀지지 않은 어둠은 방 안에 그대로 있다. 처음, 나는 그 어둠에게 무엇이든 설명해 주기를 바랐다. 오늘 하루를 정리해 줄 문장이 이내 도착하길 기대했단 것이다. 하지만 세계는 침묵했고, 질문은 공중에서 아스라이 사라졌다. 그런데 나는 지금, 같은 어둠 앞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 설명이 아니라 1분의 빛. 의미의 완성이 아니라 현재를 붙드는 박자. 내 질문에 세계가 침묵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삶을 끝낼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이 노래를 들은 뒤에는 조금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반딧불은 어둠을 지우지 않는다. 다만 어둠 안에서 깜빡인다. 사라졌다가 다시 밝아진다. 그 점멸이 부조리의 조건 속에서 선택을 이어 가는 반항의 형태라면, 이어폰을 꽂는 행위 속에는 이미 그 의미가 녹아있을 수도 있겠다. 시온이 가사를 통해 건네는 말은 “다 잘 될 거야”가 아니다. “한 번 더 빛낼 수 있어”에 가깝다. 그런 그의 말이 새벽의 방 한켠 가로등 빛 한 줄기기 밝힌 구석에 소리 없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