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EVE) 〈타임머신〉
Time 그대와 내가 함께였던 시간
Oh time, 지금 다시 돌아가고 있어요
슬픈 헤어짐 오랜 외로움
그 시간을 지나
그댄 아주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나 아닌 나를 바라보며 웃고만 있군요
행복해 보여요
세상을 다 가진듯한 사랑이 시작됐죠
난 한마디 말도 건넬 수 없죠
그대는 나를 볼 수 없으니
이 시간의 벽이 무너지면 다칠까 봐
Oh 먼 훗날 많이 아파하기 전에
지금 그 사랑을 버리라고
이 한마디만 너에게 말할 수 있다면
Time 또 다른 시간으로 난 떠나요
Oh time 그대와 나의 이야기가 보여요
저 먼바다로 여행을 떠나며 행복해하지만
Oh time 그게 우리들의 마지막 여행인데
지금 떠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데
난 어떻게 하나요
차마 난 볼 수가 없어
시간을 되돌리죠
난 한마디 말도 건넬 수 없죠
그대는 나를 볼 수 없으니
이 시간의 벽이 무너지면 다칠까 봐
Oh 먼 훗날 많이 아파하기 전에
지금 그 사랑을 버리라고
이 한마디만 너에게 말할 수 있다면
Oh, time
내가 다시 돌아온 이 시간은
Oh time 늙어버린 나 혼자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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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소개
2009년 지금은 안타깝게도 고인이 된 휘성의 음반 "Vocolate"에 G.gorilla가 작업했던 곡으로, 당시 두 아티스트 모두 매우 애정을 느꼈던 작품이다.
참 좋은 뮤지션이었던 고인을 추모하며, 본인 생전에도 추구하는 장르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좋아해 주었던 곡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자 G.gorilla가 밴드 이브(EVE)의 곡으로 재탄생시킨 곡이다.
시간 여행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안타깝고 슬펐던 순간들을 견뎌 내며, 삶을 마무리해 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풀어낸 곡으로, Rock 보컬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섬세한 감정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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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불을 켜고, 샤워를 한 뒤 냉장고 문을 열었으며 맥주 캔을 땄다.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스마트폰으로 주말의 일정을 확인하는 동안, 바쁘게 오가는 손가락 사이로 마음이 자꾸만 흩어지고 있었다. 아마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나눈 문장, 그 문장이 놓이던 공기의 온도, 그 뒤로 더는 오지 않는 답장 같은 것들이 ‘지금’이라는 시간에 나를 두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저 살고 있지만, 나의 현재는 자꾸만 과거의 한 지점에 걸려 멈칫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만났을 때를 가끔 상상한다. 이 상상은 지금까지의 시간을 전부 바꾸는 기적이 아니라, 단지 한 문장만 더 건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그렇게 이브의 〈타임머신〉은 바로 그 소망을 허세나 미련으로 몰아붙이지 않는다. 노래는 “Time 그대와 내가 함께였던 시간”이라며 과거를 호출하고, 그 호출이 현재를 어떻게 조직하는지 차분하게 보여 준다. 상실 이후의 삶이란, 잊어버리면 배반하는 것 같고 붙잡으면 무너지는 것 같은, 그 불가능한 줄타기 위에 놓인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애도와 시간의 문제로 가사를 들여다보자.
세네카는 죽음과 상실을 삶의 바깥 사건으로 치워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유한한 존재가 세월을 어떻게 쥐고 흘려보내는지의 문제로 다뤘다. 스토아 철학이 흔히 “감정을 억누르라”는 차가운 태도로 오해되곤 하지만, 세네카의 핵심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의 질서다. 슬픔은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이 ‘남은 시간 전부’를 점령해 오늘을 살 수 없게 만드는 지점에서 멈출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로 집중할 개념은 ‘위로의 윤리’다. 위로는 슬픔을 금지하는 훈계가 아니라, 애도가 자연스럽게 밀려오되 그 슬픔이 남은 자의 삶 전체를 잠식해 버리는 지점을 경계하는 태도에 가깝다. 다시 말해 울어도 되지만, 울음이 하루의 모든 결정을 대신하게 두지 않는 일이다. 둘째 개념은 ‘시간의 소유’다. 시간의 소유는 시간을 늘리거나 되돌리는 기술이 아니라, 지나간 때에 끌려가며 현재를 잃지 않도록 오늘의 몫을 다시 손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결단을 뜻한다. 이 둘은 별개의 교훈이 아니라 서로 맞물린다. 위로의 윤리는 슬픔의 범람을 다스리는 기준이고, 시간의 소유는 그 기준이 실제 생활의 리듬으로 구현되는 방식이다.
〈타임머신〉이 먼저 드러내는 것은, 위로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에 대한 구조적 이유다. “그댄 아주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이라는 비유에서 고인은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니라 화면 속 이미지가 된다. 이미지는 선명하지만 결코 상호작용할 수 없는 존재다. 재생 버튼을 아무리 눌러봐도 화면 속 인물은 나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노래는 곧바로 “난 한마디 말도 건넬 수 없죠 / 그대는 나를 볼 수 없으니”라고 말한다. 상실의 핵심은 단순한 그리움의 진하기가 아니라 관계의 비대칭이다. 말은 내 안에 넘치는데, 그 말이 닿을 수 있는 곳은 이미 사라져 있다. 이때 애도는 쉽게 자기 안으로 접힌다. 말하지 못한 사과, 끝내 확인하지 못한 오해, 늦게 알아차린 고마움이 ‘현재의 시간’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반복된다. 세네카의 위로 윤리는 바로 이 반복을 지우려 하지 않는다. 떠난 이를 잊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되려 닿지 못한 말들이 오늘을 파괴하는 방식으로만 굳어지지 않도록 애도의 자리를 다시 배치하라고 요구한다. 상실이 만든 불가능을 인정하되, 그 불가능이 내 남은 삶 전체의 형식이 되게 두지 말라는 요청이다. 〈타임머신〉의 정서는 바로 그 경계선 위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서 있다.
그 경계선이 한 문장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이 시간의 벽이 무너지면 다칠까 봐”다. 시간의 벽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되돌림의 욕망이다. 하지만 노래는 그 욕망을 곧장 질주로 그리지 않고 ‘다칠까 봐’라는 조건을 덧붙인다. 이 조건은 애도의 양심을 만든다. 되감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해서, 그 마음이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다. 상상 속에서라도 고인을 흔들어 깨우는 행위가 폭력이 될 수 있고, 무엇보다 남은 자 자신이 더 깊이 파열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노래의 되돌림은 “바꾸고 싶다”가 아니라 “망가뜨리지 않고 싶다”로 기울어 있다. 그다음에 나오는 “지금 그 사랑을 버리라고 / 이 한마디만 너에게 말할 수 있다면”은 운명을 다시 쓰려는 오만이라기보다, 늦기 전에 전하고 싶었던 ‘최소한의 문장’을 품고 사는 책임감으로 읽힌다. 애도는 흔히 후회로 자신을 벌한다. 세네카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 후회를 사실로 인정하되, 후회가 오늘의 시간을 전부 빼앗는 방식으로만 굳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때로 돌아가 고치겠다”가 아니라 “오늘의 말과 행동을 무너뜨리지 않겠다”는 방향으로 후회를 전환하는 일이다.
이제 노래의 초점은 ‘슬픔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서 ‘오늘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로 이동한다. “Time 또 다른 시간으로 난 떠나요”는 일견 현 상황 진술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상실을 견디기 위해 지금을 다른 자리로 옮겨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떠남은 망각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일 수 있다. 같은 시간대, 같은 길, 같은 습관은 과거를 매일 되풀이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곧이어 “지금 떠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데”라는 절규가 등장한다. 떠나야 살 수 있지만, 떠나면 잊어버릴까 두려워 과거를 더 단단히 붙잡는 역설이다. 이 역설이야말로 시간이 ‘내 것’이 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는데도 남은 자의 현재를 계속 점유하고, 현재는 과거를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변한다. 마지막의 “늙어버린 나 혼자뿐이군요”는 상실이 남긴 고독을 말하지만, 동시에 시간의 소유가 실패할 때 삶이 얼마나 쉽게 공허로 기우는지도 드러낸다. 세네카의 시간 윤리는 여기서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시간을 늘리지 못한다면, 적어도 오늘의 몫을 다시 손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기억을 지우지 않되, 기억이 오늘을 전부 대신하지 못하게 하는 리듬을 만드는 것. 애도는 떠난 이를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남은 삶이 붕괴하지 않게 하는 훈련이 된다.
결국 이브의 〈타임머신〉과 세네카가 만나는 지점은 하나다. 되돌릴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기억을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남은 시간의 붕괴를 막아내려는 절제의 결기다. 노래는 상실의 비대칭을 감상으로 덮지 않고, 되돌림의 욕망을 윤리의 문제로 끌어올리며, 떠남과 머묾의 역설 속에서 오늘의 몫을 다시 찾으려 한다. 만약 세네카가 이 노래를 들었다면, 그는 과거를 고치는 상상에 매달리기보다 과거를 품은 채 오늘을 세우는 쪽을 선택하라고 말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해 슬픔을 없애려 하지 말되, 슬픔이 하루 전체를 점령하도록 내어주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다. 다시 어젯밤의 자각으로 돌아오면, 그 불빛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위장이 아니라 오늘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점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떠난 사람을 떠올릴 때 그 기억이 오늘의 삶을 돌보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아니면 오늘을 포기하는 방식으로만 굳어지고 있을까. 나는 남아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실의 언어를 어떻게 다루고 있었을까. 말하지 못한 문장을 붙들고 침묵 속에 숨어 있지는 않았나, 혹은 슬픔을 삭히며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손을 내밀었던가. 나는 내 시간의 소유를 위해 어떤 생활 리듬을 가져가려 했을까. 떠남과 머묾 사이에서, 나를 살게 하는 최소한의 습관과 경계를 무엇으로 정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