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야만 한 것이 아닌, 괜찮음에 대하여

하성운, 〈Tell The World〉

by 문어

언젠가부터 “괜찮아?”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 않아 졌다. 상대가 진짜로 내 상태를 묻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해 불필요하게 대화가 길어지지는 않을까, 혹은 내가 지금 어디가 얼마나 괜찮은지를 설명하려다 스스로를 더 흐트러뜨리지는 않을까 등의 생각이 스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먼저 짧은 답을 보낸다. “응, 괜찮아.” 그렇게 보내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기보다 오히려 찝찝해진다.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괜찮다’라는 답이, 내 컨디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유지하려는 자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루가 무난히 지나간 날에도, 쓰라림이 분명한 날에도, 나는 같은 한 줄로 그날을 봉합한다. 그때의 내가 붙들고자 하는 것은 감정의 사실이라기보다 사회적 리듬이다. 불안은 설명이 길어지고, 우울은 주변의 반응을 불편하게 만들고, 피로는 이유를 요구받는다. 그러니 “괜찮아”는 대화를 매끄럽게 닫는 요령이 된다. 그런데 하성운의 〈Tell The World〉의 가사가 나의 습관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노래는 먼저 “그늘 가득한 표정”과 “It’s so painful”을 숨기지 않은 채로, 그다음 “Tell The World I’m fine”을 꺼낸다. 그래서 여기서의 “fine”은 감정을 덮는 기술이 아니라, 흔들림을 포함한 채로도 삶을 다시 고르겠다는 다짐에 가까워진다. 나는 이 차이의 실마리를 독일 철학자 니체의 말에서 찾았다. 니체적 관점에서 ‘괜찮다’는 ‘안정을 확인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의 조건을 다시 평가하고 그 위에서 삶을 재결정하는 말’ 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삶을 고통과 결핍이 섞인 채로 받아들이되, 그 조건을 단지 참고 견디는 수준에서 끝내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흔히 ‘고통을 줄이면 삶이 좋아진다’고 믿는 방식 자체를 의심했다. 삶은 통증이 줄어들수록 자동으로 의미를 얻는가, 아니면 내가 무엇을 값진 것으로 두고 무엇을 하찮은 것으로 분류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가. 니체는 고통을 줄이는 처방보다, 우리가 고통을 어떤 말과 기준으로 평가해 왔는지를 집요하게 되묻는 쪽에 더 가까웠다. 여기서 핵심적인 태도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모르파티, 즉 운명을 사랑하는 적극적 긍정이다. 이것은 ‘좋은 일만 사랑한다’는 낙관이 아니라, 불편한 사건과 결핍까지도 내 삶의 일부로 두고 “이 조건과 함께 나는 어떤 삶을 만들 것인가”를 묻는 힘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극복이다. 자기 극복은 지금의 나를 혐오해 지워 버리는 자기부정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발판 삼아, 나를 규정하던 판단의 습관을 한 단계 더 정확한 쪽으로 갈아 끼우려는 움직임이다. 여기서 ‘강함’은 공격성이나 성취의 과시가 아니라, 나를 꺾는 잣대를 바꿀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이를테면 ‘흔들리면 실패’ ‘설명이 길어지면 민폐’ ‘피곤하면 나약’ 같은 생활의 규칙을, 내가 어떤 말로 다시 세울지의 문제다. 아모르파티가 삶의 조건을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는 태도라면, 자기 극복은 그 조건을 의미 있게 다루는 방식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둘은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못한 조건 위에서 넘어서는 일은 공허해지기 쉽고, 넘어설 의지가 없는 긍정은 금세 체념으로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Tell The World〉은 바로 그 경계에서, 긍정과 운동이 동시에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노래가 먼저 보여주는 것은 아모르파티의 정서와 닮아 있다. “그늘 가득한 표정”이라는 말은 삶의 어느 구간이 일시적으로 어둡다는 정도가 아니라, 표정이라는 일상적 몸짓에 어두운 결이 이미 배어 있다는 상태를 보여 준다. 우리는 대개 표정을 ‘컨디션의 결과’로 생각하지만, 표정은 시간이 쌓여 생기는 태도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늘이 표정에 배었다는 말은, 삶이 늘 밝기만 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드러낸다. 보통 여기서 많은 위로의 말들은 서둘러 수습으로 향한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문장으로 현재를 잠정적 예외로 만든다. 그 말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 문장으로 ‘지금’을 빨리 지나가 버리려 하고, 지나가는 동안 무엇이 나를 아프게 했는지 이름 붙이지 못한 채로 남겨 두곤 한다. 하지만 이 곡은 이러한 예외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It’s so painful”은 고통을 기교로 포장하지 않고, 그 자체로 남겨 둔다. 아픔을 말하는 순간에도 ‘그래도’의 문장을 덧붙이지 않는 태도는, 오히려 고통을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겠다는 결심처럼 들린다. “소리 없이 날 스쳐 가는 Flame”이라는 이미지는 특히 중요한데, 통증과 불안이 언제나 뚜렷한 사건으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잡아내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스쳐 가는 것은 이유를 특정하기 어렵고, 그래서 더 쉽게 무시되거나 더 쉽게 축적된다. 아모르파티는 바로 이런 종류의 애매한 고통 앞에서 시작된다. “이건 별일 아니야”라고 축소하거나 “이건 절대 일어나면 안 돼”라고 부정하는 대신, ‘이미 내 안을 통과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갈 언어를 찾는 것이다. “상처뿐인 기억도 / 빛나 조금씩”이라는 구절은 상처가 지워져서 빛나는 게 아니라, 상처가 머무는 자리를 삶에서 다시 배열할 때 빛이 새어 나온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때 빛은 긍정의 방식이 바뀌며 생기는 미세한 변화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조건을 지워 달라는 소원이 아니라, 그 조건까지 포함해 ‘내 삶’으로 긍정하겠다는 쪽에 더 가깝다.


또 이 노래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늘을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늘 속에서 방향을 세우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기 극복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The light is sign”은 빛을 ‘구원’으로 제시하지 않고 ‘표지’로 제시한다. 구원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완성된 답처럼 들리지만, 표지는 그저 방향을 제안할 뿐이다. 방향을 따라갈지 말지는 결국 내가 결정해야 한다. “어둠 속에 밀려온 Satellite”도 비슷하다. 위성은 가까이서 손에 잡히는 빛이 아니다. 멀고 희미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기준점이 된다. 자기 극복은 이런 기준점을 발판 삼아, 다음 선택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지금의 나를 한 번에 새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다음 선택을 조금 더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기억 속의 눈부신 어느 날”을 단지 그리움으로 소비하지 않고 그 안에서 “날 찾아 헤매”는 장면은, 과거를 미화된 피난처로 삼는 방식과 다르다. “I always run my youth”는 흔히 젊음을 불태우는 구호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 글의 흐름에서는 ‘멈추지 않기 위해 달린다’라기보다 ‘달리며 잣대를 바꾼다’에 가깝다. 자기 극복은 결국 속도의 문제가 아닌, 평가의 문제다. 무엇이 나를 꺾는지, 무엇이 나를 살리는지에 대한 판단을 다시 짜는 순간, 같은 고통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 〈Tell The World〉은 고통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고통이 삶을 전부 규정하게 두지 않겠다는 태도로 그 판단을 조정한다.


이제 “Tell The World I’m fine”라는 가사의 무게를 다시 느끼게 된다. 일상에서 “I’m fine”은 대화를 닫는 자동응답이 되기 쉽다. 괜찮지 않은 것을 숨기는 말, 혹은 더 설명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말. 그런데 이 노래는 그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 먼저 “그늘”과 “painful”을 꺼낸 다음에야 “fine”이 나온다. 그 순서가 ‘fine’의 의미를 바꾼다. 여기서 ‘fine’은 감정의 안정이 아니라 자세의 선택이다. 나는 지금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이 나의 전부가 되게 두지는 않겠다. 나는 상처를 지니고 있지만, 상처가 나의 미래를 선고하게 두지는 않겠다. 여기서의 기억은 피난처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다시 읽기 위한 자료가 된다. 나는 어떤 순간에 가장 나다웠고, 어떤 순간에 나를 잃었으며, 무엇을 중요하게 둘 때 내가 견딜 수 있었는가를 다시 묻게 된다. 이런 다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괜찮다’고 말했으면, 그 말을 지탱하는 생활의 리듬과 관계의 방식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이 곡이 그리는 ‘함께’는 구원에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삶을 대신 살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최소한의 기준을 건네는 방식에 가깝다. 다만 이 부분을 니체 쪽으로 더 엄격하게 끌어오면, 핵심은 ‘함께 있음’의 미덕이라기보다 ‘내가 나를 다시 선택하도록 만드는 거리와 긴장’에 있다. 타인은 때로 나를 대신 살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내 삶을 대신 살게 두지 않도록 나를 흔들어 깨우는 존재에 가까울 수 있다. 그때 “Tell The World”의 대상인 ‘세계’는 거대한 군중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관계와 일상 전체가 된다. 나는 그 세계 앞에서 “fine”을 말함으로써, 내 우선순위의 배열을 다시 공표하는 셈이다.


정리하자면, 〈Tell The World〉은 어둠을 삭제하지 않은 채로 어둠을 포함한 삶을 긍정하는 아모르파티의 태도를 먼저 세우고, 그 긍정을 발판 삼아 ‘나를 꺾는 기준’ 자체를 재편하는 자기 극복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상처뿐인 기억”이 “빛나 조금씩”으로 이동하는 변화는 감정의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의미를 붙이는 습관과 선택의 재정렬에 가깝다. 만약 니체가 이 노래를 들었다면, ‘fine’이 편안함의 보고가 아니라 삶을 다시 고르는 행위로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처음의 장면으로 돌아가면, “괜찮아?”라는 메시지 앞에서, 손가락이 움직이려는 순간, 그때 이 노래는 ‘괜찮다’를 감추는 말로 쓰지 말고 선택의 말로 다시 쓰라고 내게 요구하는 것 같다. 다음의 질문들을 던지면서 말이다.

1. 나는 지금 내 안의 그늘을 ‘고장’으로 취급하며 서둘러 수습하려고만 하는가, 아니면 그늘을 포함한 채로도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인정하고 있는가.

2. 내가 맺고 있는 관계는 나를 대신 구해 주기를 기대하는 구조인가, 아니면 내가 내 삶을 다시 고르게 만드는 거리와 표지를 제공하는 구조인가.

3. “괜찮아져야 한다”는 규범의 문장 대신 “괜찮다”를 선택의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오늘 어떤 잣대 하나를 바꿔 세울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