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엔블루(CNBLUE), 〈그러나 꽃이었다(Still, a Flower)
얼마 전 집에 들어와 바로 불을 켜지 못한 채 현관에 잠깐 서 있었다. 헛헛함인지, 허무함일지 모르겠지만 그날 하루를 “괜찮았다”라거나 “견딜 만했다”라고 정리해 줄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회사 메신저인 슬랙도 다 확인했고, 그날 할 일 목록은 지워졌지만, 이상하게 텅 빈 기분이 들었다. 대개 피로는 잠을 못 자서, 일을 많이 해서, 마음이 상해서 등 이유를 찾게 한다. 그런데 어떤 피로는 이유를 파악하려 할수록 더 허전해진다. 한편, SNS에는 “오늘도 잘 해냈다”라는 문장들이 떠돌고, “이 또한 지나간다”라는 말이 회전목마처럼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문장들은 오히려 내 상태를 낯설게 만들고 만다. 나는 내 마음이 약한 건지 의심하고, 동시에 남들이 소비하는 위로가 지나치게 성급하다고 느껴졌다. 그럴듯한 문장들에 먼저 화가 나고 이내 조금 슬펐던 것 같다. 오늘 들은 씨엔블루의 〈그러나 꽃이었다(Still, a Flower)〉가 그날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 곡은 상처를 감상적으로 장식하거나 ‘결국 좋아질 거야’와 같은 결론으로 나를 데려가지 않는다. 도리어 사라진 자리가 남기는 감각을 그대로 남겨 두고, 위로 문장들이 실패하는 순간을 숨기지 않으며, 그 실패를 인정한 뒤에도 몸이 다시 숨을 고르는 과정을 끝까지 따라간다. 무엇보다 가사에서 반복되는 “그러나”는 감정의 전환을 위한 접속사가 아니다. 포기 쪽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을 매번 되돌려 세우는 작은 기둥이며, ‘이미 무너졌다’와 ‘그래도 살아 있다’ 사이를 잇는 버팀목이 된다.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와 반항을 떠올리면, “그러나”는 위로가 아니라 태도의 선언으로 들린다. 그래서 이 노래는 세계가 내 의미 요구에 응답하지 않을 때도, 나는 오늘을 통과하겠다고 말하는 최소한의 문장으로 현관의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는 듯하다.
카뮈가 던진 질문은 ‘삶은 의미가 있는가’보다, 의미가 흔들리거나 끝내 확정되지 않는데도 ‘왜 계속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의 현장에서 도망칠 수 없는 질문에 가깝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전쟁과 폭력, 전체주의와 이념의 확신이 인간을 쉽게 소모하던 시간이었다. 그 세계를 통과하며 카뮈는 인간이 의미를 갈망하는 방식과, 현실이 그 갈망을 번번이 받아주지 않는 방식을 끝까지 바라보려 했다. 여기서 그가 강조한 첫 번째 핵심 개념이 ‘부조리’가 등장한다. 부조리를 가장 쉬운 말로 정리하면, ‘왜’라고 묻는 마음과 ‘대답하지 않는 현실’이 부딪칠 때 생기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감각을 지각하는 것은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다’라는 선언이 아닌, 오히려 인간이 의미를 강렬하게 요구한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우리는 상처의 이유, 상실의 원인, 노력의 보상, 관계의 결말을 묻고, 그 질문을 통해 현실을 관리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종종 ‘그냥 그렇게 되었다’라는 식으로만 나타난다. 이때 생기는 불일치, 곧 기대와 침묵의 마찰이 부조리이다. 카뮈가 경계한 것은 이 마찰을 견디기 어렵다고 해서, 긴장을 서둘러 봉합하는 태도였다. 고통을 견디기 위해 확신의 문장을 급히 끌어와 덮어 버리면, 현실의 무게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그럴듯한 결론만 갖게 된다고 그는 의심했다. 그래서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의 중심에는 ‘명료함’이 놓인다. 이것은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괜찮다고 꾸미지 않고, 확정할 수 없는 것을 확정된 것처럼 포장하지 않으며, 불확실한 세계를 불확실한 채로 견디는 능력이다. 한편, 두 번째 핵심 개념은 ‘반항’이다. 반항은 분노의 폭발이나 영웅적 결단이 아니라, 부조리를 본 뒤에도 삶을 포기하라는 유혹을 되풀이해 거절하는 지속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반항이 단순한 버티기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반항은 ‘여기까지는 허용할 수 없다’라는 한계를 세우는 거절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 너머에서 지키고 싶은 존엄을 긍정하는 태도다. 그리고 그 긍정은 혼자만의 결심으로 끝나기보다, 결국 타인과 함께 살기 위한 최소한의 ‘우리’를 호출한다. 이 글에서 나는 부조리를 ‘명료함의 인식’으로, 반항을 ‘한계를 세우고 존엄을 긍정하며 관계로 이어지는 지속’으로 잡고, 이 곡이 그 두 층위를 음악 안에 어떻게 세워 두는지 따라가 보려 한다.
이제 〈그러나 꽃이었다(Still, a Flower)〉의 가사에서, 부조리는 먼저 ‘사라짐’을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노래는 “누군가의 발자국이 / 지워져 가 그 자리엔 / 그림자만 남았고”라고 말하며, 떠난 사람을 즉시 이야기로 복원하려는 충동을 멈춰 세운다. 발자국은 한때 그 사람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흔적이지만, 지워지는 순간 그 증명은 쉽게 무력해진다. 남는 것은 그림자뿐이다. 그림자는 원인을 말해주지 않고, 다만 남겨진 쪽의 시간을 길게 늘린다. 우리는 이런 빈자리 앞에서 흔히 ‘설명’을 만들어낸다. 떠난 이유를 추정하고, 그럴듯한 교훈을 붙이고, 미래의 보상을 약속하는 문장을 찾는다. 이러한 설명은 불안을 줄여주지만, 동시에 사라짐을 ‘해결된 사건’으로 만들면서 상실의 현재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선명해진다. 의미를 찾는 마음은 계속 움직이는데, 현실은 그 마음에 맞는 답을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망으로 기울거나, 반대로 더 강한 확신의 문장으로 자신을 진정시키려 한다. 이 곡은 후자의 유혹을 아주 정직하게 거절한다. 화자는 “한 줄기의 빛이란 말은 / 노래 가사일 뿐 / 누군가가 쓴 허구일 뿐 / 위로되지 않았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희망 자체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쉽고 빠른 확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빛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상징이지만, 상실의 한가운데에서는 그 보편성이 오히려 고통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가 있다.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문장은 내가 느끼는 괜찮지 않음을 무효화하고, “너만 힘든 게 아니야”라는 문장은 고통을 비교하게 만든다. 노래의 화자는 그 무효화와 비교를 멈추고,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한다. 카뮈의 명료함은 바로 이런 태도와 닮았다. 납득되지 않는 것을 서둘러 해석으로 봉합하지 않고, 의미를 강요하는 문장들에서 한발 물러서서, 현실의 통증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 그래서 이 곡의 전반부는 ‘희망 없음’이 아니라 ‘허구의 위로에 대한 분별’로 들리며, 그 분별 덕분에 상처는 오히려 더 정확한 윤곽을 얻는다.
하지만, 이 노래가 거기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차가운 기록에 머물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꽃이었다(Still, a Flower)〉의 두 번째 층위는, 부조리를 인정한 뒤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 곧 반항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데 있다. 화자는 “얼룩지고 / 상처만 남았고 / 오래도록 잔향만을 / 껴안은 채 버텨 / 숨 쉬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상처가 사라졌다는 서사가 아니라, 상처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숨을 이어간다. 이때의 견딤은 성취감이 아니라, 숨이 끊기지 않게 하는 생활의 기록에 가깝다. 카뮈의 반항을 떠올리면, 이 “숨 쉬어”라는 단순한 회복탄력성이 아니라 “여기서 끝내라는 유혹에 동의하지 않겠다”라는 한계 설정으로 읽힌다. 곧, 삶을 포기하라는 압력에 선을 긋는 거절이다. 동시에 그것은 “그래도 내가 지키고 싶은 무엇이 있다”라는 긍정이기도 하다. 꽃의 이미지가 바로 그 긍정을 맡는다. “그러나 나는 / 그러나 끝내 / 향기를 품은 / 세상 속에 핀 꽃”, “눈물로 젖은 땅 위에 / 피어난 따뜻한 봄” 같은 선언은 고통을 미화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꽃은 상처가 끝난 뒤에 주어지는 상장처럼 등장하지 않고, 상처의 한가운데에서 ‘향기’라는 최소한의 감각으로 남는다. 다시 말해 꽃은 순수함이 아니라 잔향의 지속이다. 또한 이 지속은 개인의 고집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노래는 사랑과 믿음이 “수렁에 빠져”도, 외로움이 “피하지 못할” 것으로 남아도, 그 상태를 지워버리지 않는다. 대신 “날 꼭 안아 줘 / 너와 같은 꽃”이라고 말하면서, 버팀의 가능성을 관계의 한 장면으로 옮겨 놓는다. 누군가를 안는 행위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안는 순간, 세계가 주지 않는 응답을 사람 사이에서 아주 작게나마 만들어 낼 수 있다. 카뮈가 반항을 개인의 결단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공동의 감각으로 확장하려 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구절은 단순한 청원이 아니라 “서로의 한계를 존중하면서도 함께 살기 위해 확인하는 몸의 언어”로 읽힌다. 결국 이 노래의 ‘꽃’은 홀로 피는 승리의 상징이 아니라, 대답 없는 세계에서 서로를 붙들며 계속 살아가겠다는, 작고도 단단한 연대의 형태에 가깝다.
정리하자면, 이 곡의 가사는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한다. 첫째, 사라진 자리의 공백과 위로의 불능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부조리의 자리를 정확히 드러낸다. “발자국”이 지워진 자리, “그림자”만 남는 시간, 그리고 “빛”이라는 문장이 더는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은, 왜라고 묻는 마음과 침묵하는 현실이 정면으로 마주치는 장면들이다. 둘째, 그 부조리 위에서 “버텨 / 숨 쉬어”라고 말하며, 결말이 보장되지 않아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반항의 지속을 제시한다. 여기서 반항은 단순히 견디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끝내라”라는 유혹에 선을 긋고, 그 선 너머에서 지키고 싶은 존엄을 긍정하며, 그 긍정을 타인과 나누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만약 카뮈가 이 노래를 들었다면, 그는 “한 줄기의 빛이란 말은 / 노래 가사일 뿐 / 누군가가 쓴 허구일 뿐 / 위로되지 않았어”라는 고백을 절망으로 단정하기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는 명료함의 증거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꽃의 이미지를 초월적 보상의 상징으로 읽기보다, 의미가 비어 있는 세계 안에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최소한의 감각, 곧 잔향과 호흡의 연속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다시 주말 밤의 현관으로 돌아오면, 내가 필요로 한 것은 ‘괜찮다’라는 단정이나 ‘곧 좋아진다’라는 약속이 아니라, 괜찮지 않은 상태에서도 다음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작은 규칙이었다. 이 곡은 그 규칙을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반복되는 숨과 “그러나”라는 짧은 문장으로 가르쳐 준다. 다시, 나는 요즘 어떤 상실을 서둘러 설명으로 봉합하려 하고, 어떤 빈자리는 끝까지 바라보는 일을 피하고 있을까. 누군가에게 “안아 달라”는 말이 내게 의미하는 것은 구원의 요구일까, 아니면 서로의 한계를 존중하면서도 함께 살겠다는 확인일까. 대답이 오지 않는 세계에서 나는 어떤 선을 긋고, 무엇을 지키겠다고 말하며, 그 결심을 누구와 나누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