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가 아니다. 선택이다.

하츠투하츠(Hearts2Hearts), 〈RUDE!〉

by 문어

이어폰을 끼는 행위는 때론 방어구를 입는 것 같다. 외부의 소음이 한 꺼풀 뒤로 물러나기 때문일까? 버스 뒷좌석에서, 학교 복도 끝 계단에서, 혹은 아무도 없는 새벽 내 방 안에서, 나는 플레이 버튼 하나를 이용해 나만의 밀실을 짓곤 한다. 그 밀실 안에서 누구도 나를 정의하려 들지 않고. 심지어 기존에 붙어있던 이름표들도 잠시 사라진다. 그리고, 멀어진 이름표 뒤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들이 올라온다. 노래가 날 세상으로부터 가려주는 수 분 동안만큼은, 내 안의 꺼내지 못한 목소리가 비로소 숨을 쉬려 하는 것이다.

하츠투하츠(Hearts2Hearts)가 이번에 발표한 싱글 〈RUDE!〉는, 바로 그 밀실의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걸어 나오는 노래다. 이번 싱글에서 그들은 그간의 상큼하고 발랄한 이미지에 바짝 선 날을 하나 준비해 왔다. 곡의 가사는 일견 당당하게, 거침없는 태도를 선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거침없음 아래에는 단순한 저항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질식해가고 있던 자아가, 그 틀의 존재를 처음으로 정면에서 인식하는 순간의 떨림 같은 것 말이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남들이 기대하는 모습과 자신이 느끼는 자기 사이에서 가슴이 비좁아지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주변의 기대에 맞춰 웃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어울리는 말투를 골라 쓰다가, 문득 거울 앞의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감각 같은 것 말이다. 〈RUDE!〉의 에너지는 바로 그 감각에서 출발한다. 이 곡은 무례함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붙여준 이름표를 한 장씩 떼어내면서 그 아래의 맨 얼굴을 감히 드러내 보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 선언이 왜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몸짓이 될 수 있는지, 20세기의 한 철학자가 남긴 사유를 빌려 들여다볼 수 있다.

장-폴 사르트르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실존주의라는 이름 아래 20세기 사상의 지형을 바꿔놓은 철학자이자 작가다. 소설 《구토》(1938)로 문학적 명성을 얻었고, 1943년에 출간한 주저 《존재와 무》에서 인간 존재의 구조를 치밀하게 분석하기도 했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미리 정해진 설계도를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의 유명한 명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인간이 먼저 세상에 던져지고 그 뒤에야 자신의 선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뜻이다. 성격이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행위와 결정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다시 형성된다. 이 전제 위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 자유가 불안과 책임이라는 무게를 함께 짊어진다고 보았다.

그의 철학에서 주목할 개념은 두 가지다. 첫째는 '타자의 시선', 즉 응시(le regard)다. 이것은 단순히 남이 나를 쳐다본다는 물리적 사실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포착되는 순간 나의 존재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체험을 가리킨다. 둘째는 '나쁜 믿음'(mauvaise foi), 흔히 '자기기만'으로 번역되는 개념이다. 자기기만이란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숨기면서, 마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자신을 설득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 두 개념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디. 가령 타인의 시선이 나를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할 때, 그 이미지에 자발적으로 기대며 동시에 '이것이 원래의 나'라고 말하는 순간 자기기만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RUDE!〉가 보여주는 태도, 즉 타인의 평가에 맞서 자신의 선택을 되찾으려는 몸짓은 바로 이 두 개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가장 선명한 윤곽을 얻는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응시의 분석을 일상적 경험에서 시작한다.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나는 세계를 내 관점에서 자유롭게 조직하는 주체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나의 존재는 미묘하게 변질된다. 나는 더 이상 순수한 주체가 아니라, 타인의 시야 안에 놓인 하나의 '대상'이 된다. 사르트르는 이 경험을 수치심의 구조로 설명한다. 수치심이란 내가 '나를 바라보는 타자' 앞에서 대상이 되었음을 자각하는 감정이다. 중요한 것은, 이 대상화가 반드시 적대적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다정한 눈빛조차, 나를 '이런 사람'으로 정리하는 순간 동일한 구조를 작동시킨다. 관건은 감정의 온도가 아니라, 내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로 환원된다는 존재론적 사건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조를 염두에 두고 〈RUDE!〉의 가사를 들으면, 노래의 첫 번째 긴장이 정확히 응시의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날 향한 시선에 'Hate me?'"라는 구절에서, 화자가 건드리는 것은 미움이라는 감정 자체가 아니다. 시선이 나를 향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타인의 판단 안에 포획되어 한 장의 사진처럼 고정된다. '무례한 애', '건방진 애', 혹은 '밉상'과 같은 시선과 라벨링으로 나라는 존재를 하나의 단어로 욱여넣는다.

이것은,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살아 있는 주체가 타인의 응시 속에서 '즉자존재'(être-en-soi), 즉 돌멩이나 테이블처럼 고정된 사물의 존재 방식으로 환원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사 "누가 뭐래도 Can't change me"는 그 환원에 대한 거부다. 이 문장은 '나는 변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아니라, 시선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존재론적 항변으로 읽힌다. 더 나아가 "You can't make me act right"에서 'act right', 즉 '바르게 행동하라'는 요구는 중립적인 도덕규범이 아니라, 타인의 기대가 내 몸과 태도를 교정하려 드는 시선의 물질화된 형태다. 이 구절에서 화자는 시선이 부여한 규범 자체를 의식하고, 그 규범에 자신을 맞추는 것을 거부한다.

특히 "Don't call me darling / I'm too rude!"라는 구절은 응시의 작동 방식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여기서의 'darling'이란 호칭은, 일견 다정한 것 같지만, 그 안엔 분명 관계 안에서 나에게 배정된 역할, 가령 ’ 귀엽고 순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 등이 내포되어 있디. 이때 이름표가 부드러울수록 더욱 거부하기 어렵다. 나를 향한 적대적 시선은 분노로 밀어낼 수 있지만, 다정한 시선이 만든 이미지는 감사와 수용의무 등의 외피를 두르고 있어 벗어나기가 훨씬 까다롭기 때문이다. 화자가 그 호칭을 거두어달라고 말할 때, 이것은 애정의 거부가 아니라 시선이 부여한 역할 자체에 대한 선 긋기다. 이처럼 〈RUDE!〉의 가사들은, 타인의 응시가 나를 하나의 규정된 이미지로 굳히는 순간을 정확히 짚어내고, 그 굳어짐에 균열을 내려한다.

응시가 바깥에서 오는 힘이라면, 나쁜 믿음(자기기만)은 안에서 작동하는 힘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카페 웨이터의 유명한 예시를 든다. 한 웨이터가 지나치게 정확한 몸짓으로 접시를 나르고, 과장된 정중함으로 고객을 맞이한다고 가정하자. 그는 웨이터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바로 그 완벽함 속에서 자신을 웨이터라는 사물(고정된 기능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자기기만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현재 상태(사르트르의 용어로 '사실성', facticité)와 그것을 넘어설 가능성('초월', transcendance)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자기기만은 이 둘 중 한쪽에만 기대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일컫는다. 즉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며 사실성에만 매달리거나, '나는 뭐든 될 수 있어'라며 가능성만을 내세워 현실의 무게를 회피하는 것 모두 자기기만에 해당한다.

이 개념이 〈RUDE!〉의 가사와 겹치는 지점은, 노래가 겉보기의 통쾌함 아래에서 자기기만의 유혹과 그 거부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랬다 저랬다 No rule / 꽤나 뻔뻔한 Attitude"라는 가사는 화자의 일관성 없음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르트르의 맥락에서 이것은 오히려 자기기만의 반대편에 서 있는 태도다. 자기기만이 '나는 원래 이런 캐릭터'라며 자신을 하나의 일관된 이미지로 고정하는 것이라면, '이랬다 저랬다'는 그 고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 순간 새로운 선택 앞에 서 있으며, 어제의 선택이 오늘의 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르트르적 자유의 핵심이 이 가사 안에 있는 것이다.

또 "철이 없대도 재밌으면 That's okay"라는 구절은 자기기만의 구조를 더 섬세하게 드러낸다. 철이 없다는 평가는 타인의 시선이 부여한 규범인 동시에, 자기 자신도 은연중에 내면화하기 쉬운 기준이다. 철이 들어야 한다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선택은 '아직 미성숙해서 그런 것'으로 격하되고, 결국 '성숙한 내가 되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기만의 서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자는 그 서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재미와 쾌감이라는 자신의 감각적 판단을 선택의 근거로 삼되, 그 선택을 미성숙의 증거로 해석하는 외부의 틀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 것이다. "어른이 없는 세상"이라는 구절 역시, 유치한 공상이 아니라 어른 시선의 평가기준이 잠시 동작을 멈추는 순간에 대한 상상으로 읽힌다. 이때 '어른'은 나이가 아니라 규범의 언어를 쥐고 있는 시선의 은유이며, 그 시선이 느슨해진 틈에서 가능한 다른 리듬의 삶을 가리킨다.


정리하자면, 응시가 나를 대상으로 고정하는 외부의 힘이라면, 자기기만은 그 응시를 통해 산출된 고정을 내부에서 용인하는 행위다. 따라서 두 개념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되려 하나의 연쇄 안에서 순차적으로 작동한다. 타인의 시선이 나에게 이름표를 붙이고, 나는 그 이름표를 '원래의 나'로 받아들임으로써 선택의 책임에서 도망친다. 〈RUDE!〉가 흥미로운 것은, 이 연쇄의 양쪽 모두를 동시에 끊으려 한다는 점이다. 밖에서 오는 시선에는 "Can't change me"로 맞서고, 안에서 올라오는 자기기만에는 "이랬다 저랬다 No rule"로 응수한다. 'RUDE'라는 낙인 자체를 다시 자기 선택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는 이 곡의 전략은, 사르트르가 말한 '진정한 자유' 즉 자신의 선택을 선택으로 인식하고 그 결과를 끌어안는 태도를 대중음악적 시선에서 번역했다고 할 만하다.

하츠투하츠의 〈RUDE!〉는 3분 남짓한 팝송 안에, 타인의 시선이 만든 이미지에 갇히는 경험과 그 이미지를 자발적으로 내면화하는 자기기만의 구조, 그리고 그 두 겹의 속박에서 빠져나오려는 분투를 담고 있다. 사르트르의 응시 개념은 이 노래가 포착하는 불편의 정체, 다시 말해 남의 눈에 걸리는 순간 나의 유동적인 존재가 한 장의 사진으로 납작해지는 체험을 언어화하는데 도움이 되고, 그의 자기기만 개념은 그 납작해진 이미지를 '원래의 나'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자유가 어떻게 스스로를 배반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두 개념 사이에서 〈RUDE!〉의 화자는 시선을 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붙인 이름표를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선택의 행위로 증명하려 한다. 그리고 그 증명은 한 번의 선언으로 완료되지 않는다. 곡 전체에 걸쳐 후렴이 반복되는 것은, 이 선택이 매 순간 다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다시 이어폰을 끼는 장면으로 돌아간다. 버스 뒷좌석에서, 계단 끝에서, 새벽 방 안에서 음악을 틀던 그 순간. 처음에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라고 생각되었다. 이 순간 도피처는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밀실, 아무도 나를 규정하지 않는 안전한 공간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RUDE!〉의 가사를 몰입하여 이해하고 난 지금의 나는, 같은 장면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음악을 틀고 이어폰을 끼는 행위는 도피가 아닌 준비였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의 준비는, 시선의 세계로 걸어 나가기 전 자기 안의 목소리를 한 번 확인하는 의식을 의미한다. 남들이 붙여놓은 이름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박자로 몸을 움직이는 시간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로부터 도망칠 수는 있어도, 자유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고 말했다. 〈RUDE!〉가 제안하는 것도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시선은 사라지지 않고, 이름표는 계속 붙을 것이며, '바르게 굴라'는 요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모든 것 앞에서 자신이 지금 이 태도를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무례라 불린다면, 그 무례 속에서야 비로소 자유의 떨림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난 오늘도 재생버튼을 누르고 이어폰을 낀다. 이내 귓속으로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달라진 것은, 그것이 나와 세계 사이에 한 겹의 막을 생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이제 그것은 세상의 시선 한가운데 눈을 감지 않은 채, 나만의 리듬으로 걷기 위한 단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