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유행인 두쫀쿠를 기리며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 열풍을 단순한 ‘디저트 유행’으로만 보면 본질을 놓치기 쉽다. 이 현상은 불황기의 소비심리로 알려진 립스틱 효과(Lipstick Effect)가 작동하는 동시에,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논한 과시·모방의 규범이 플랫폼을 매개로 재배치된 장면이기도 하다. 이것은 단순히 “요즘 세대가 허영심이 많다”와 같은 도덕 평가대에 올릴 사안이 아니다. 성취의 사다리가 길어지고, 중간 보상이 약화된 사회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매일 시각화해 비교하도록 만드는 미디어 환경이 만나 만들어낸(충분히 합리적인 것이라 납득 가능하지만 사실은 개인이 합리화하도록 강제된) 행동 양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불황기에는 흔히 ‘큰 사치’가 위축되고 ‘작은 사치’가 증가한다고 한다. 즉, 대규모 지출을 동반하는 주거·이동·여행·고가 내구재는 미뤄지고, 상대적으로 접근 가능한 가격대의 화장품·디저트·소형 취미재가 ‘나를 위로하는 소비’로 부상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립스틱 효과의 골격은 단순하다. 개인은 소득과 전망이 흔들릴수록 통제 가능한 범위에서 상징적 보상을 찾는다. 저렴한 비용으로도 지금의 기분을 바꿀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실제로 립스틱 효과는 불황기에 작은 사치를 통해 심리적 만족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두쫀쿠를 립스틱 효과로만 설명하면 부족하다. 지금의 ‘작은 사치’는 거울 앞에서 끝나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를 통과해 피드에 올라가고, 타인의 반응(좋아요·댓글·조회수)으로 되돌아와 다시 개인의 가치감정에 편입된다. 이때 소비는 효용이 아니라 시그널이 된다. 본래 베블런이 말한 과시적 소비는 물건의 유용성보다, 그것이 ‘나의 지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기능할 때 성립했다. 하지만 플랫폼 시대에 들어선 지금, 그 문법은 바뀌었다. 과거에는 비싼 물건 자체가 메시지의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비싸게 보이거나, 희소해 보이거나, 서사가 붙는 것이 메시지의 호소력을 높인다. 두쫀쿠의 가치가 맛에 기인한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그것의 식감만 소비하는 게 아니다. 그 이상의 것, 즉 ‘구하기 어려운 것을 구했다’라는 것을 함께 소비한다. 오픈런, 품절, 실패 후 재도전, 매장 탐색, 긴 대기시간이 하나의 ‘두쫀쿠 획득 서사’를 만들고, 그 서사가 이미지·영상으로 전환되어 유통된다. 즉, 물건보다 ‘획득 과정’이 더 중요한 시그널로 작동한다.
여기서 핵심 비용이 ‘돈’만은 아닌 것이 흥미롭다. 베블런의 언어로 과시가 성립하려면 ‘낭비’가 눈에 보여야 한다. 그 낭비에는 금전뿐 아니라 시간, 노력, 불편의 감수가 포함된다. 플랫폼은 이 비금전적 낭비를 극적으로 가시화(콘텐츠)화 할 수 있는 훌륭한 매개이다. “두 시간 줄 서서 겨우 샀다”, “세 번 실패하고 네 번째에 성공했다” 같은 문장은 일견 비효율의 기록 같지만 사실은 배지에 가깝다. 두쫀쿠는 이를테면, 과시 측면에서 통화가 화폐에서 ‘가시화된 시간’으로 부분 전환되는 것과 같다. 이 궤에서 두쫀쿠는 저렴한 사치품이면서 동시에, 희소성을 통과했다는 표식을 제공하는 지위재가 된다.
이번에는 이 현상을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라 불리는 정서에서 바라보자. 포모는 단순한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비교의 환경이 상시화 될 때 발생하는 구조적 감정이다. 지금의 SNS는 부자들과 온갖 과시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범람한 비교의 바다가 되었다. 베블런의 모방은 본래 위로 향하나, 플랫폼은 그 ‘위’와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힌다. 과거에는 비교 대상이 같은 동네, 같은 직장, 같은 학교에 있었다면, 지금은 인플루언서·셀럽·일반인(이라고 칭하지만 사실 대단한 능력자)의 일상이 매일 같은 화면에서 재생된다. 비교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개인에게 비교의 스트레스는 커진다. 그 스트레스가 포모를 낳고, 포모가 다시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작은 성취의 욕구를 밀어 올린다.
문제는 이 정서가 특히 현재 대한민국의 주거 영역에서 강한 압박으로 번역된다는 점이다. ‘집은 살 수 없는 것’이라는 감각은 개인의 비관이 아니라, 가격·대출·임대료·경쟁이 결합해 일상에서 체감되는 구조적 압력이다. 공공 통계에서도 매매가격 변동과 지수 흐름이 지속적으로 관측된다. 주거가 ‘삶의 기반’에서 ‘자산 게임의 전장’으로 인식될수록, 뒤처질 수 있다는 공포는 정서가 아니라 생존감으로 변한다. 이때 포모는 유행을 놓칠까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지금 못 올라타면 영영 못 올라탄다”는 계급적 예감에 가깝다.
여기서 두쫀쿠 같은 작은 사치가 갖는 의미는 달라진다. 그것은 ‘대체재’이자 ‘모사물’이다. 대체재라는 건, 주거·자산 같은 큰 성취가 멀어질수록 사람들은 통제 가능한 영역에서 성취감을 찾는다는 뜻이다. 모사물이라는 건, 큰 성취의 외피를 작은 형태로 재현한다는 의미이다. 희소한 것을 확보하고(구매 성공), 그것을 전시하고(인증), 반응을 획득한다(좋아요). 이 3단계는 주거·자산 게임에서 승리했을 때 사회가 부여하는 인정의 구조를 축소판으로 모사한다. 그래서 이 행위는 달콤하지만 가볍지 않다. 작은 사치가 심리적 진통제로 기능하는 동시에, 사회적 비교를 재생산하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불안 요인은 자본의 이동 자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담론은 부동산에서 주식시장으로의 ‘머니무브’를 읽어내고, 다른 담론은 주식시장에 쌓인 유동성이 다시 부동산으로 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이 정답이냐가 아니다. 대중의 체감은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인가’라는 혼란에 가깝다. 어제의 상식(부동산은 유일한 해답/주식은 위험)이 오늘의 상식(부동산은 진입이 봉쇄/주식이 대안)과 충돌하고, 그 충돌이 다시 불안과 포모를 키운다. 자산 시장의 유동이 아닌 자산 시장의 규칙이 유동적일수록 사람들은 장기 계획보다 단기적 신호에 더 민감해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플랫폼이 단기 신호를 증폭시키는 중요한 매개란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세대의 조건’을 다시 봐야 한다. 큰 성취를 경험한 경험이 없고 동시에 더 나은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세대는 장기 서사에 투자하기가 어렵다. 주거·자산·경력의 상승 경로가 불투명하면, 성취는 멀리 있는 목표가 아니라 가까운 보상이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나아가기 위한 원동력을 위한 미시적 성취가 반복적으로 요구된다. 두쫀쿠는 “오늘 내가 해냈다”는 짧은 성취감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구매 성공은 퀘스트이고, 인증이 보상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사회적 인정은 장기 성취(학위, 승진, 자산)보다 단기 성취(획득, 인증, 반응)로 더 자주 공급된다. 나아가 알고리즘은 이 짧은 보상 루프를 강화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가치’를 축적하기보다 ‘가시성’을 갱신하는 쪽으로 사회적 에너지를 쓰게 된다.
그럼 ‘이 시기에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사회학은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만약 개인에게 ‘현명하게 투자해라’와 같은 처방을 한다면, 그건 사회학이 아니다. 여기서 필요한 건 질문의 재배치다. 두쫀쿠 열풍이 말해주는 건 디저트의 힘이 아니라 중간 보상의 붕괴 문제의 단면이다. 삶이 ‘한 방’(집값 상승, 종목 급등, 코인 폭등)과 ‘소확행’(작은 사치, 인증, 반응) 사이로 양극화될수록 사람들은 그 사이의 안정적 경로를 잃게 된다. 그래서 내 생각에, 사회에게 요구되는 일은 세 가지다.
첫째, 성취의 시간을 되돌리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주거가 단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의 기반이 되도록 예측 가능한 임대·금융·공급·도시정책이 결합돼야 한다. 주거 불안은 포모의 엔진이기 때문이다. 둘째, 노동과 경력의 중간 보상을 복원하는 조직·산업의 규범이다. ‘오래 버텨도 달라지는 게 없다’라는 감각이 강해진다면 사람들은 자산 게임과 플랫폼 게임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셋째, 플랫폼의 가시성 경쟁을 ‘자기표현’이라는 말로만 미화하지 않는 문화적 성찰이다. 지금의 과시는 개인의 나르시시즘만이 아니라 비교를 강제하는 환경의 산물이다. 환경을 그대로 둔 채 개인에게만 절제를 요구하는 건 윤리로 구조를 가리는 방식에 불과하단 생각이 든다.
두쫀쿠는 결국 내게 질문을 남긴다. 왜 쿠키가 이렇게까지 중요해졌을까. 내가 내린 답은 쿠키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성취·미래·가시성의 구조에 있다. 불황기에서 위로는 필요하고 나아가 중요하다. 또 그 과정에서 작은 사치도 필요하다. 다만 그 위로가 우리를 더 잦은 비교와 더 짧은 보상으로만 밀어 넣을 때, 사회는 더 큰 질문을 미루게 된다. 포모를 개인의 약점으로, 주거 불안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자본 이동의 혼란을 개인의 무지로 돌리는 순간 구조는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구조를 다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이게 만드는 순간, 유행은 더 이상 ‘취향’만이 아니라 시대의 증상을 짚어내는 좋은 도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