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무위’와 ‘관조’로 읽는 주의력의 소멸과 회복
한동안 나는 신호등 앞의 삼십 초도 그냥 서 있지 못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추면 손이 먼저 주머니를 더듬었다. 급한 연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화면을 켰다. 메신저를 보고, 뉴스 제목을 훑고, 짧은 영상을 몇 개 넘기면 금세 초록불이 들어왔다. 길을 건너고 나면 방금 무엇을 봤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시간을 아끼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실은 하루를 잘게 잘라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한병철이라면 이 삼십 초를 ‘머무름’의 문제로 읽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원자화되는 순간 향기를 잃는다. 왜냐하면 향기란 지속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잘게 쪼개진 시간에는 깊이가 없다. 또 무게도 남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견디지 못하게 된 순간, 나는 머무름의 기술을 잃은 것이다.
나를 지치게 한 것은 일의 양이 아니었다. 반응해야만 하는 것들의 빈도였다. 잠깐 걷는 동안에도 화면을 보고, 밥을 먹으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읽고, 잠들기 직전까지 새로운 소식을 확인하는 생활. 한병철은 이 상태를 ‘과잉긍정성’이라 불렀다. 규율사회의 피로가 억압에서 왔다면, 성과사회의 피로는 스스로 부과한 자극의 총량에서 온다. 아무도 나에게 삼십 초 안에 뉴스를 읽으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읽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한병철이 ‘자기 착취’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런 장면이다. 집중력은 흩어지고, 감정은 얕아지며, 하루는 조각났다. 그가 말한 착취라는 말이 과하기는커녕 적확하다.
그래서 알림을 껐다. 대단한 결심은 아니었다. 막상 꺼 보니 해방감보다 불안이 먼저 왔다. 혹시 중요한 연락을 놓치면 어쩌지. 나만 뒤처지면 어쩌지 등. 이것 역시 한병철의 진단에 따르면, 오늘날의 불안은 실제 위험이 아니라 ‘불안의 체제’ 자체에서 온다. 그 체제 안에서 사람들은 따로 떨어져 각자로 존재한다. 그리고 접속만이 유일한 줄로 느껴진다. 내가 두려워한 것 또한 정보의 상실이 아니다. 그저 늘 접속되어 있다는 감각을 잃는 일이었을 뿐이다.
며칠쯤 지나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전에는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신발 밑창이 보도블록을 긁는 소리, 카페에서 누군가 웃음을 참지 못해 문장을 끝맺지 못하는 소리,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의 앞면과 뒷면이 번갈아 뒤집히는 모양. 그제야 세상의 해상도가 조금은 높아진 것 같았다.
한병철이 복원하려 한 것이 이것이다. 관조, 비타 콩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 그는 멈춤이 없으면 행위가 눈먼 반응으로 퇴화한다고 말했다. 자극에 반응하고,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삶은 생존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 즉, 무위의 능력을 잃은 사람은 작동은 하되 살아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무위’는 게으름이 아니다. 한병철에 따르면, 무위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가장 밀도 높은 형태다. 의도를 내려놓고 멈추면, 가려져 있던 것들이 비로소 보인다.
내가 알림을 끈 뒤 되찾은 감각들은 새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원래 거기 있었으나 반응의 빈도가 가려 놓은 것이다. 이때의 무위는 그 가림막을 치우는 일이다. 우리가 잃은 것은 시간이 아니다. 존재의 밀도다. 행위는 늘었는데 존재는 줄었다. 한병철은 이 상태를 ‘절대적인 존재 결핍’이라 부른다.
기술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편리함이 도움을 넘어 점유로 바뀐다는 데 있다. 활동적 삶(vita activa)이 관조적 삶을 완전히 몰아낸 자리에서, 삶은 기능은 하되 의미는 사라진다. 장자의 숲에 쓸모없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재목이 되지 못했으므로 아무도 베지 않았고, 그래서 그 나무만 제 수명을 다했다. 한병철이 말하는 무위도 같은 결에 있다. 쓸모를 증명하지 않는 시간이 삶을 지킨다.
여전히 신호등 앞에서도 끝내 화면을 켜지 않는다. 삼십 초는 여전히 짧고, 그동안 세상이 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그 짧은 틈 안에서 나는 행위를 멈추고 존재 쪽으로 돌아온다. 한병철이 관조라고 부른 것은 이 전환이다. 반응을 멈추고, 그저 있는 것. 초록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할 때,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든다. 그리고 길을 건넌다. 이번에는 방금 지나간 삼십 초의 향기를, 조금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