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의 과잉,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

by 문어

최근 키키의 〈404 (New Era)〉가 빠르게 호응을 얻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지금 대중이 어떤 방식의 새로움에 반응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이 곡은 전면적인 새로움으로 밀어붙이기보다, 이미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리듬을 오늘날 다시 표면 위로 다시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노래는 온전히 낯섦으로 귀를 붙들려고 하지 않고, 지금의 방식으로 정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진입 장벽이 높지 않다는 점에서 힘을 얻는다. 2026년 1월 공개된 이 곡이 UK 하우스 계열의 클럽 사운드와 Y2K 감성을 현재형으로 재가공했다는 평을 받은 것도 그래서 이상하지 않다.

이런 곡을 단순히 복고라고 부르면 설명이 부족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노래가 과거의 복사본이 아니라, 이미 익숙한 결을 현재의 템포에 맞게 다시 재조정된 감각이라는 것이다. 대중(나를 포함한)은 원본의 귀환보다, 기억을 살짝 건드리면서도 동시에 오늘의 트렌드를 반영한 작품에 훨씬 더 빨리 접근한다. 낯선 세계를 처음부터 학습해야 하는 대상보다, 기시감을 발판으로 삼되 동시대적으로 들리는 형식이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지금 사랑받는 것은 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요즘의 감각 안에서 새롭되, 완전히 미지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의 역설이 생긴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부족하지 않다. 기술도, 이미지도, 형식도, 말투도 쉼 없이 갱신된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은 점점 전면적으로 모르는 것보다, 익숙함을 경유한 변화 쪽으로 기운다. 이건 상상력의 마모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모든 것이 너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우리는 미지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를 바꾸게 되었다. 전면적으로 충격을 주는 것 대신, 익숙함을 경유한 갱신을 택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작품이 부족한 시대가 아니다. 넘쳐나는 시대다. 결핍은 공급량이 아니라 체류 시간에 있다. 숏폼과 피드, 추천 알고리즘과 자동 재생은 문화의 입구를 넓혔지만, 동시에 하나의 대상을 오래 붙들 가능성을 크게 낮췄다. 무엇이든 즉시 도착하고, 도착한 것은 곧바로 다음 것에 밀려난다. 문제는 단지 속도의 상승이 아니다. 그 속도가 감각의 기본 리듬을 바꾸었다는 데 있다. 예전에는 하나의 노래나 책이나 장면이 사건처럼 도착했다면, 지금은 수많은 사건 후보가 한꺼번에 밀려든다. 새로움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너무 흔해졌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깊이는 난해한 것을 소비한다는 뜻이 아니다. 한 대상을 반복해 접하고,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층위를 나중에 발견하고, 마침내 그것에 대해 다시 말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을 뜻한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대개 이런 과정을 필요로 한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몇 번은 잘 들어오지 않고, 반복 끝에 비로소 자기 취향 안으로 내려앉는다. 그런데 지금의 환경은 그 과정을 자꾸 끊는다. 막 익숙해질 즈음 다른 것이 밀려오고, 겨우 결을 익힐 무렵 모두의 시선은 이미 다음으로 넘어간다. 문화는 더 자주 도착하지만, 덜 오래 머문다. 우리는 좋아하기도 전에 다음 것을 배운다.

이 붕괴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개인적 집중력의 문제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깊이는 시간이 만든다. 그리고 함께 붙들 수 있는 세계, 내가 공동성이라 부르고자 하는 것은 그 시간이 그것을 취향으로 찾아 소비하는 사람들 외부로 번질 때 생긴다. 이때 공동성은 모두가 동시에 본다는 뜻이 아니다. 같은 대상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오래 주고받을 수 있는 공통 기반을 뜻한다. 물론 같은 밈을 아는 것도 공유의 한 형태다. 그러나 해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통 기반과, 동시에 반응하고 동시에 잊는 것은 다르다. 개인이 오래 듣고 오래 말해야 타인과 나눌 것도 생긴다. 그런데 모두가 급히 다음 것으로 이동하면, 어떤 대상도 충분한 깊이를 확보하지 못한다. 깊이가 얇아진 자리에서 함께 붙들 수 있는 세계 역시 얇아지는 것이다.

한때 대중음악은 플레이리스트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거리의 표정을 만들고, 또래 집단의 차림을 바꾸고, 멋의 문법을 조직하는 힘이었다. 빅뱅이 전성기를 지나며 보여준 영향력, 특히 G-Dragon을 축으로 확장된 패션을 떠올리면 이 점이 공감을 사기 충분할 것 같다. 하이탑 스니커즈, 실루엣이 두드러지는 스트리트웨어, 액세서리의 사용, ‘이것이 트렌드다’라는 느낌이 음악과 함께 퍼져나갔다. 샤이니의 초기 스키니진 열풍도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컬러 스키니진과 슬림한 실루엣을 대중적 스타일로 밀어 올리며 한국 언론이 ‘SHINee 트렌드’라 이름 붙인 유행을 만들었다. 물론 그때도 유행의 교체는 있었고, 모든 소비가 깊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곡의 감각이 일상까지 파고드는 시간이 지금보다는 길었다. 특정 그룹의 무대가 실제 일상의 선택으로 옮겨갈 만큼 강한 공통 감각을 낳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시 취향은 단지 듣는 행위에 머물지 않았다. 일상의 선택으로 번졌다. 한때 노래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었다. 옷장에서, 거리의 사람들에게서 다시 들렸다.

지금도 유행은 있다. 더 빠르고, 더 넓고, 더 세분화되어 확산된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파급력보다 지속 시간이다. 오늘의 대중문화는 순식간에 퍼지지만, 그만큼 빨리 교체된다. 한 곡이 스타일이 되고, 태도가 되며, 공통 감각으로 굳어질 때까지 버티는 일이 예전보다 훨씬 드물다. 모두가 소비하지만 오래 눌러앉지는 않는다. 같은 밈을 알고, 같은 클립을 보고, 같은 구간에서 반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함께 살아낸 문화 경험으로 굳어지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것은 누군가의 악의가 아니라 환경의 변화다. 그 변화가 감각의 작동 방식을 바꾸었다. 그래도 남는 말이 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비하지만, 더 적은 것을 공유한다.

그래서 오늘 사랑받는 것을 두고 사람들이 덜 새로운 것을 원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지금의 문법 안에서 새롭되, 오래 설명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것에 반응하고 있다. 그것은 피로한 시대의 감각이 택한 현실적인 수용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적응에는 대가가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처음을 맞이하면서도, 그것이 공동의 기억으로 굳어질 때까지 곁에 두지 못한다. 즉 한 장면에 충분히 머물기도 전에 다음 장면을 받아야 한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혁신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새로움이 깊이가 되고, 그 깊이가 공동의 것이 될 때까지 함께 머무는 시간. 때론 그 시간을 가졌던 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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