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수치심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더 이상 쓸만한 인간이 아닐까 봐 두려워하는 시대

by 문어

“요즘 AI, 프롬프트, 자동화 같은 거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저는 잘 안 써봤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전 이직을 하려는 후배와의 술자리에서, 그가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일부러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현 사회적 흐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최근 주식 동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반도체와 AI로 빠진 대화에서 나올 수 있는 꼬리 질문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단순한 물음이었지만 그 물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의 질문 저변에는 다른 것들이 깔려 있었다. 분명 그는 도구에 대해 묻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괜찮은 사람인가, 이미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등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묻고 있었던 것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AI를 두고 나누는 대화를 보면 이 녀석은 대체로 실용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도구는 문서 요약이 빠르다, 저 서비스는 회의록 정리가 괜찮다, 초안은 AI로 먼저 잡는 편이 낫다 등. 이렇게만 들으면 모든 것이 생산성의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화가 조금만 길어지면 다른 감정이 스며들어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AI를 못 쓰면 뒤처진다”, “손으로 하는 방식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 같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어느새 도구를 평가하던 말은 사람을 평가하는 말로 바뀌고, 이제 담론은 무엇을 쓸 줄 아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하느냐로 넘어간다. 왜 이런 전환이 일어나는 걸까. 그 안에는 몇 가지 조건이 겹쳐 있다.


모른다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응당 새로운 도구가 나오면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고, 낯선 기술 앞에서는 누구나 서투르다. 문제는 AI가 낯선 것에서 당연한 것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유례없이 빠르다는 것에 있다. 누군가는 이미 회의 자료를 몇 분 안에 정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제안서 초안을 몇 번의 입력만으로 뽑아낸다. 이런 풍경은 퍼지는 데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상식이 되는 속도가 빠를수록, ‘아직 모른다’와 ‘이미 늦었다’의 간극은 짧아진다. 어색해도 괜찮은 시간, 천천히 익혀도 괜찮은 유예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 배우는 중인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분명 필요하지만, 세상은 그 사람의 허락과는 무관하게 상식 기준선을 옮겨놓는다.


그런데 이 속도가 건드리는 것은 현재의 능력만이 아니다. 더 깊이 파고드는 곳은 우리가 보낸 과거의 시간이다. 오래 갈고닦은 글쓰기, 몸에 밴 기획의 감각, 반복을 통해 단단해진 판단력 등, 예전에는 분명 숙련이라 불리던 것들이 낡아 빠진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그건 AI로도 초안이 나오지 않나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갑자기 옛 방식을 고수하는 뒷방 늙은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미처 새 도구를 익히기도 전에, 이미 쌓아온 것의 가치까지 흔들리는 경험. 그 경험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대개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 뒤에 쌓아놓은 것이 무너질 때 아프다.


여기에 한 겹이 더 쌓인다. 사회는 이미 이 적응 속도를 능력으로 취급하고 있다. 빨리 익히는 사람은 감각 있는 사람으로, 빠르게 활용하는 사람은 유능한 사람으로 대한다. 학습의 속도는 어느새 그 사람 가치의 일부로 다루어진다. 게다가 지금의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업데이트에 가깝다. 배움은 시간이 걸려도 되고 시행착오가 허락되는 인간의 과정이지만, 업데이트는 새 버전에 맞춰 반드시 빠르게 진행되어야 하는 기계의 논리다. 사람에게 기계의 속도를 요구해 놓고, 따라가지 못하면 개인의 자질 탓으로 돌린다. 이때, 보다 느린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닌 능력이 부족한 존재라는 낙인을 받는다.


유예 없는 속도, 과거까지 소급되는 평가절하, 적응력을 개인 존재 가치와 동일시하는 사회. 이 세 가지가 겹칠 때, 이제 미숙함은 단순한 미숙함으로 남지 못한다. 그것은 불편이나 조급함이 아닌, 더 날카롭고 더 깊은 곳을 찌르는 감정으로 바뀐다. 그것이 수치다. 흔히 말하는 “AI 불안”과는 다르다. 본디 불안은 미래를 향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걱정하는 감정이다. 반면 수치는 현재의 자기 자신을 향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충분한 인간인가를 묻는 감정이다. AI를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어쩌면 향후 기술이 고도로 발달할 것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통념은 늘 그렇듯 이 감정을 개인의 몫으로 돌린다. “빨리 배우면 되지”, “의지의 문제지”, “적응할 생각이 없어서 그래”. 하지만 앞서 보았듯 미숙함 자체가 수치의 기원일 필요도 없고, 기원도 아니다. 즉 미숙함을 수치로 바꾸는 것은 개인의 부족함이 아니다. 적응 속도를 인간의 가치로 환산하는 사회의 구조인 것이다.


기술 변화의 속도는 구조가 만든 조건이다. 산업의 방향, 직무의 성격, 조직의 문화, 시간의 여유, 쓸 수 있는 학습 자원, 나이에 따른 부담, 이미 맡고 있는 역할의 무게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가 AI를 빨리 익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의지만으로 된 일이 아니다. 그가 놓인 조건이 허락한 일이기도 하다. 반대로 누군가가 아직 익히지 못했다면, 그것 역시 의지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복잡한 조건을 지운 채, 남들보다 늦으면 개인의 탓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통념은 구조가 만든 격차를 성실성의 차이로 읽고, 환경이 만든 속도를 개인의 능력 차이로 치환한다. 그리고 그 순간 구조의 부담은 개인의 수치로 바꾸게 된다. 이것은 부당함을 넣어서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지금의 AI 담론을 두고 “배우면 되지 왜 그렇게 예민하냐”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일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개인이 배우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그들이 어떤 감정 속에서 학습을 하느냐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치심은 사람을 잠깐 움직이게 할 수는 있어도, 오래 배우게 하지는 못한다. 나아가 수치 위에 올라선 배움은 사람을 성장시키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깎아내리기 좋도록 날을 더 날카롭게 가는 것일 뿐이다. AI가 당연시 여겨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기계의 능력이 아니다. 그 기계를 핑계로 인간의 가치를 다시 줄 세우는 악습의 재현이다. 어쩌면 AI 시대를 살아가는 법보다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서로에게 수치를 가지지 않게끔 위로하는 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