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회복하려다 달릴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는 바로 일어나지 못한다. 물론 몸이 완전히 굳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보다, 조금만 더 미루고 싶다는 마음이 앞선 까닭이다. 눈을 뜬 뒤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것은 물 한 잔도, 커튼도 아니다. 그저 휴대전화다. 그는 짧은 영상 몇 개를 넘겨본다. 물론 그것이 특별히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또한 그 몇 초짜리 화면이 삶을 진짜로 달래주는 것도 아니다. 그 몇 초에서, 누군가는 여행을 가고, 누군가는 유행하는 밈을 따라 하고, 누군가는 단기간에 몸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얼마를 모았다고 자랑한다. 대체로 시끄럽고, 대체로 가볍고, 쉬이 잊히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걸 본다. 나는 그를 보며 생각한다. 저건 게으름일까. 아니면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견뎌야 할 무엇이 있다는 뜻일까. 이내 주방에서 들려오는 “밥 먹어라”라는 말. 그 말 뒤에 따라붙을 수 있는 침묵. 혹은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그래서 요즘은 뭐 하니”라는 질문. 나아가 그런 말을 듣기도 전에 자기 안에서 먼저 울리는 ‘오늘도 별수 없겠지’라고 속삭이는 목소리. 어쩌면 그는 그 모든 것을 피하려고 화면부터 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 그는 너무 높은 노동 강도에 지쳐 회사를 나왔다. 잠깐 쉬면 다시 나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몸을 추슬러 다시 이력서를 넣고, 다시 움직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잠깐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경기는 나빠졌고, AI의 등장으로 채용은 줄었고, 마음은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또 시간은 흘렀고, 계획한 것보다 공백은 길어졌다. 결국 그는 쉬는 사람이 아니라, 왜 쉬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침을 거르고 집을 나설 때에도 그는 배가 고프다. 하지만 식탁에 앉으면 어제와 같은 대화가 시작되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밥을 피하고, 질문을 피하고, 그 질문 속에 비칠 자기 모습을 피한다. 그렇게 스터디카페로 간다. 가방 안에는 토익책이 있고, 자격증 책이 있고, 몇 달 전 결제해 둔 강의 영수증이 구겨진 채 들어 있다. 책의 필기는 들쭉날쭉하고, 계획표는 몇 번이나 새로 썼지만 여전히 오늘의 계획과는 멀어져 있다. 태블릿을 켜고 인강을 들을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유튜브를 비롯한 숏폼이 재생되고 있다. 나는 이런 그를 보며 자꾸 같은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일까. 아니면 무엇이든 시작하려 할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가로막히는 사람일까.
이 사회는 그를 오랫동안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론부터 내린다. 그가 뭐라도 하면 되는데 안 하는 거라고 말한다. 다들 힘든데 그가 유난이라고 말한다. 그의 부모가 버텨주니까 저러는 거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눈이 높아서 그렇다고도 하고,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느냐는 말로 그와의 대화를 닫아버리기도 한다. 이런 문장들은 너무 익숙해서, 이제는 누가 먼저 썼는지도 알기 어렵다. 가족 안에서 돌고, 뉴스 댓글에서 돌고, 커뮤니티에서 돌고, 직장인들의 술자리에서 돈다. 너무 자주 되풀이되다 보니 이것은 어느새 하나의 평가가 아니라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상식이 되었다고 해서 덜 잔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식이 된 말은 상처를 주면서도,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상식이란 방패에 스스로를 숨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특별히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는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현실이란 프레임에서 말한다. 버텨야 한다고 믿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믿고, 멈춘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위험해진다고 믿는다. 완전히 틀린 말만도 아니다. 다만 한국 사회는 멈춘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다. 경력의 공백은 설명을 요구하고, 설명은 금세 변명처럼 들리게 되며, 변명처럼 들리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의 입장을 변호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그러니 “뭐라도 해야 한다”라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말이 아니라, 너무 현실을 알기에 던져진 말이다. 문제는 바로 그 현실성에 있다. 그 말은, 결과를 안다면 곧 몸도 움직일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이력서를 넣어야 한다는 것,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것, 경력이 길게 끊기면 불리하다는 것, 지금이라도 뭐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등. 그 정도는 누구보다 당사자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회는 그 앎과 실행 사이에 놓인 거대한 틈을 보지 않는다. 피로가 얼마나 오래 사람을 붙들 수 있는지, 거듭된 좌절이 어떻게 행동할 힘을 무디게 하는지, 바깥에서 보기엔 멀쩡한 하루가 안에서는 얼마나 큰 소모인지. 그런 것들은 쉽게 이 틈을 보는 시선에서 제외된다. 그저 남는 것은 결과뿐이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말하기도 전에, 왜 아직 결과를 내지 못했는지부터 해명해야 한다. 바로 이 단순함이 오늘의 잔혹함이다.
나는 한동안 쉰다는 것과 멈춘다는 것을 구분했다. 쉰다는 것은 회복을 품은 말이고, 멈춘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끊긴 상태를 가리킨다고 믿었다. 그런데 특정인들을 인터뷰하다 보니, 그 두 가지 단어들을 그렇게 분명히 나누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특히 너무 지쳐서 회사를 나온 사람, 잠깐 숨을 돌리려 했던 사람, 몸과 마음이 먼저 무너질 것 같아 일단 멈춘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인터뷰 대상인 A 씨는 분명 숨을 돌리기 위해 멈췄다. 하지만 그가 막상 멈추고 나니 쉴 수는 없었다. 그의 멈춤이 곧 불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제 좀 괜찮아졌다’보다 ‘너무 늦은 것 아닌가’란 질문이 먼저 찾아온다. 즉, 멈춘 동안 회복이 쌓이는 게 아니라, 멈췄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압박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쉼과 멈춤은 더는 뚜렷하게 갈라지지 않는다. 쉼은 끝날 수 있어야 쉼이다. 쉬고 나면 다시 돌아갈 자리, 적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바닥이라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청년들에게는 그 바닥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멈춘 순간부터 경력은 끊긴 것으로 이해되고, 공백은 길이로 환산되며, 나이는 설명해야 하는 짐으로 바뀐다. 한두 달이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시간이 어느새 계절이 되고, 계절이 몇 번 바뀌면, 사람은 회복보다 조급함을 더 많이 배운다. 그래서 아침에는 ‘오늘은 진짜 해보자’고 마음먹었다가도, 오후쯤 되면 ‘지금 시작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생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런 그의 저녁에는 하루를 또 허비했다는 자책이 밀려오고, 밤이 되면 내일부터는 달라지겠다고 다짐이 곧게 선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것은 다시 휴대전화다. 바깥에서 보면 이것은 무기력한 생활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안에서 보면, 회복에 실패한 시간이 자꾸 제자리에서 되풀이되는 모습에 더 가깝다. 멈췄는데 쉬지 못하고, 쉬지 못하는데 다시 달릴 수도 없는 상태. 나는 오늘의 어떤 ‘쉬었음’을 바로 그런 시간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부모 세대와 기성세대를 단순히 비난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해석이다. 그들 역시 자기 삶의 조건 속에서 세상을 배웠고, 그 배운 방식으로 현재를 이해하려 할 뿐이다. 많은 부모는 자기 청춘을 낭만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가난했고, 힘들었고, 참고 버텨야 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다만 나는 누가 더 힘들었느냐를 겨루고 싶지 않다. 그저 힘들다는 결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이다. 어떤 세대에게는 버티면 앞으로 좋아질 것이란 믿음이 있을 수 있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은 나아지리라는 상상이 사회 전체에 어느 정도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정진, 성실, 인내 같은 말이 지금보다 덜 공허하게 들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에게는 그 상상의 원동력이 없다. 청년에게 노력은 여전히 요구되지만 그 노력이 어디로 이어질지 선명하지 않고, 애쓴다고 해서 삶이 차근차근 안정되리라는 믿음은 쉽게 생기지 않는 것이다. 청년들의 정착은 늦어지고, 생존을 위한 비용은 높아지고, 경쟁은 일상이 되었다. 그 결과 청년은 미래를 꿈꾸기보다 미래를 관리하라는 요구를 세상으로부터 먼저 받는다. 이 차이를 충분히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 지금 청년의 장기 공백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왜 이렇게 오래 쉬는지, 왜 지금이라도 아무 일이나 붙잡지 않는지, 왜 자꾸 준비만 하는지를 묻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대개 몰라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자기 시대의 문법으로 지금을 읽는 질문에 불과하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방향이 더 쉽게 어긋난다. 기존의 세대들은 자기 경험에 충실하게 입각하여 말하지만, 그 경험만으로는 오늘을 끝까지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충고가 위로가 되지 못하고, 조언은 되려 심문의 탈을 쓴다. 이것을 나는 세대 갈등이라는 말보다, 세대마다 가진 감각이 다르다고 표현하고 싶다. 한쪽은 버티면 열린다고 믿었던 시간을 살았고, 다른 한쪽은 버텨도 열릴지 알 수 없는 시간을 산다. 그 차이를 헤아리지 못하면 서로의 말은 자꾸 엇나갈 수밖에 없다.
더 깊은 문제는, 이런 바깥의 시선이 결국 자기 안으로 옮겨온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부모의 말이 아프다. 친척의 질문이 싫고, 친구들의 소식이 부담스럽고, 커뮤니티의 조롱 섞인 댓글이 마음을 무너뜨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누가 전하는 것이 의미 없게 된다. 그러한 자기 안에 이미 충분한 감시자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아직 여기 있지. 왜 나는 남들처럼 가지 못하지. 정말 내가 의지가 약한 사람인가. 부모가 아니었으면 벌써 무너졌겠지. 그래봤자 나는 200충, 300충 취급이나 받겠지. 이런 생각이 되풀이되면 사람은 단순히 실패를 겪는 데 머물지 않는다. 자기 존재 전체를 실패처럼 느끼게 된다. 이 지점에서 ‘쉬었음’은 경제활동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계속 심문하는 시간이 된다. 몸은 집 안에 있고, 책상 앞에 있고, 스터디카페에 앉아 있다. 겉으로 보면 조용하다. 그러나 내면은 한순간도 조용하지 않다. 계획표를 적을 때조차 희망보다 조바심이 먼저 손끝에 배어 있고, 하루가 끝날 때 남는 것은 ‘오늘도 조금은 했다’는 감각이 아니라 ‘또 제대로 못 했다’는 자기부정에 가깝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부모 집에 살고 있으니 그나마 안전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맞다. 누군가에게 그 집은 마지막 안전판일 수 있다. 그러나 안전판이 있다는 것과 고통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서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겉으로 추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쪽의 갉아먹음을 지워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A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한순간도 쉬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가하는 비난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A의 그 시간을 단순한 휴식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본다. 되려 낙인이 안쪽까지 스며든 시간, 바깥의 평가가 자기혐오의 말로 바뀌는 시간에 더 가깝다.
그래서 “그렇게 불안하면 공부라도 하면 되잖아”라는 말은 일견 맞는 듯하면서 동시에 결정적인 곳에서 어긋나게 된다. 실제로 그들은 공부를 한다. 적어도 하려고 한다. 장기 공백 상태의 많은 청년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마냥 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준비하는 사람에 가깝다. 책상 위에는 토익책이 있고, 자격증 책이 있고, 시험 문제집이 있고, 이미 결제해 둔 강의 목록이 있다. 폴더 안에는 수정하다 만 자기소개서가 여러 버전으로 저장돼 있고, 취업 사이트 알림 메일은 읽지 않은 채 쌓여 있다. 달력에는 하루 계획과 한 주 계획이 적혀 있지만, 체크 표시가 늘어나는 속도는 더딜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흔적들이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흔적은 그가 얼마나 오래 ‘아직 놓지 않았다’는 것에 얼마나 겨우 매달려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문제는 준비가 길어질수록 준비의 의미가 조금씩 바뀐다는 데 있다. 원래 준비는 미래를 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즉 오늘의 시간을 내일을 위한 투자의 행위여야 한다. 그런데 준비가 너무 오래 이어지면, 그것은 미래를 여는 일이라기보다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최소한의 증명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자격증 강의를 결제하는 순간에는 자신도 다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며칠 뒤 진도가 밀리고, 책만 펼쳐둔 채 화면을 보다 하루가 끝나면, 그 결제 내역은 희망의 흔적이 아니라 죄책감의 증거가 된다. 준비는 이렇게 사람을 움직이게도 하지만, 때로 더 깊이 책망할 근거가 되기도 한다. 특히 끝이 보이지 않는 준비는 삶을 현재에서 밀어낸다. 그는 늘 곧 시작할 사람으로 남는다. 곧 시험을 볼 사람, 곧 합격할 사람, 곧 다시 사회로 돌아갈 사람. 그러나 그 ‘곧’이 곧이 아니게 될수록 현재는 점점 흐려진다. A는 지금을 사는 주체가 아니라, 아직 시작하지 못한 미래의 예비품이 되는 것이다. 나는 장기 커리어 공백 청년의 방에 쌓인 노력의 흔적들을 볼 때마다, 그것이 성실의 증거인지 상처의 흔적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그것은 어쩌면 성실하려 애썼다는 흔적이면서 동시에, 그 성실이 자꾸 좌절로 되돌아왔다는 흔적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흔적은 남는데 삶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유를 단순히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설명해 버리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요즘 애들은 집중력이 약하다고. 화면 몇 번만 꺼도 될 일을 못 한다고. 그러나 집중력이라는 말은 너무 많은 것을 지워버린다. 왜 집중이 깨지는지, 무엇이 사람을 자꾸 짧은 자극 쪽으로 밀어 넣는지, 긴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남아 있기는 한지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숏폼을 넘기고, 하려던 공부를 접고 유튜브를 보고, 커뮤니티를 돌며 시간을 보내는 일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곧장 개인의 도덕적 결함으로만 보는 순간, 우리는 그 장면의 단편만을 보는 것이다. 지금의 숏폼과 커뮤니티는 단지 오락의 수단이 아니다.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가장 값싼 마취제라 할 수 있다. 계속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미 늦었다는 조바심, 나만 뒤처진 것 같은 수치심, 부모의 기대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상태에서 꾸준한 공부, 긴 준비, 불확실한 미래등에 오래 집중하기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짧고 빠른 자극으로 달아난다. 그 도피는 비겁해서라기보다, 당장 견딜 힘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거기에는 또 다른 값이 따라온다. 몇 시간을 흘려보낸 뒤 찾아오는 공허, 또 하루를 날려버렸다는 자책, 남들은 돈을 벌고 스펙을 쌓는데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절망. 그럼에도 다음 날 그는 또 화면으로 간다. 마취제가 치료를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잠깐이라도 덜 아픈 쪽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단지 플랫폼의 문제라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밑바닥에는 줄 세우기의 문화가 있다. 성공주의, 능력주의, 성과주의가 뒤엉키며 만들어낸 서열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줄에서 밀려나는 순간, 사람은 단순히 경쟁에서 뒤처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기 존재 의의까지 의심받는다고 느낀다. 그러니 주의력이 흐트러지는 것은 습관의 문제만이 아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겨우 붙들기 위해 택하는, 불완전하지만 절박한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이 맥락에서 한병철 교수를 아니 떠올릴 수 없다. 그가 말한 성과사회는 바깥의 채찍보다 안쪽의 채찍이 더 세게 작동하는 사회였다. 누가 직접 몰아붙이지 않아도 사람은 스스로를 다그치고, 실패의 원인을 구조보다 자기 자신에게서 먼저 찾는다. 오늘의 커리어 장기 공백 청년은 바로 그 압박을 가장 예민하게 받아내는 존재 가운데 하나다. 그 스스로는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생산하지 못하는 자신이 곧 가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더 깊이 무너진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돈을 못 버는 것에 있지 않다. 인간의 존엄이 지나치게 생산성과 성과의 언어로 옮겨갔다는 지점이 문제라 할 수 있다. 무엇을 해냈는가, 얼마를 벌었는가, 어떤 이력을 제출할 수 있는가, 얼마나 쉬지 않고 움직였는가. 이런 질문들이 삶의 거의 모든 자리를 차지하면, 공백은 더 이상 공백이 아닌 결함처럼 읽힌다. 설명되지 않은 시간, 내놓을 수 없는 시간, 남에게 쉽게 말하기 어려운 시간. 그래서 장기 공백은 경제적 곤란에 그치지 않고 존재의 곤란으로 번진다. 요즘 뭐 하냐는 질문 앞에서 선뜻 내놓을 말이 없다는 것, 현재의 나를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내 시간이 사회 안에서 아무 이름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사람을 점점 더 움츠러들게 만든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는 “뭐라도 하라”라고 말한다. 아르바이트든, 계약직이든, 단기 일이든, 일단 움직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때로 현실적인 조언일 수 있다.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다시 움직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이 자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까닭은, 그 밑바닥에 한 가지 믿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존중받기 어렵다는 믿음. 생산하지 않는 시간은 무가치하다는 믿음. 나는 바로 그 믿음이 오늘의 많은 청년을 가장 깊게 상처 입힌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잠깐 멈추었을 때 사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왜 아직 결과가 없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유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묻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그 순서를 거꾸로 한다. 상처보다 성과를 먼저 보고, 회복보다 복귀를 먼저 요구하고, 사람보다 이력을 먼저 읽는다. 그러니 어떤 청년은 점점 더 자신을 설명할 방법을 잃는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지친 사람에게 쉬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쉬고 난 뒤 돌아올 자리를 좀처럼 남겨두지 않는다. 건강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한 번 트랙에서 밀려난 사람에게는 다시 들어갈 방법을 마련하지는 않는다. 번아웃을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번아웃 뒤에 남는 공백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잠깐 멈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의 허가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인데, 사회는 그 믿음에 좀처럼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청년은 부모의 집과 스터디카페, 침대, 스마트폰 화면 사이를 오래 왕복하면서 자신이 아직도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를 의심한다. 아프게도 이 의심은 개인이 나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가 개인에게 송달한 판결문이고, 개인이 머릿속에서 자기 비난의 문장으로 다시 쓰이는 과정에서 생긴다. 사람들은 타인의 멈춤을 너무 쉽게 도덕적 잣대로 바꿔버린다. 버티지 못한 것은 약함이고, 오래 쉬는 것은 나태이며, 준비만 하는 것은 핑계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역시 언제든 비슷한 자리에 서게 될 수 있음을 잊는다. 그들 역시 몸이 먼저 무너질 수도 있고, 일이 삶을 집어삼킬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회복이 더 절실해질 수도 있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될지도 모른다. 멈춤이 늘 선택의 이름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이 문제는 일부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생산성을 잃는 순간 존엄까지 의심받는 사회를 그대로 둘 것인가의 문제다. 우리는 너무 오래 사람을 성과로 읽는 법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그 문법은 빠르고 편리하지만, 인간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상처는 이력서의 공백으로 나타나고, 탈진은 설명되지 않은 시간으로 남고, 회복은 자주 나태로 오해된다. 이 사회의 잔인함은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성과의 말로만 다시 읽어버리는 것에서 생긴다.
그러니 이 글은 누군가를 함부로 면책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세대 전체를 비난하기 위한 글도 아니다. 다만 조금 더 정확한 표현법을 찾고 싶은 것이다. ‘쉬었음’ 청년은 어쩌면 원해서 ‘쉬었음’을 택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회복을 위해 잠시 멈추었고, 그 멈춤은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 멈춤을 오래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그사이 스스로를 점점 더 심하게 검열하며 피폐해졌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판정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왜 아직도 거기 있느냐고 묻기 전에, 그 자리가 어떤 자리였는지 먼저 상상해 보는 일, 그리고 이미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전부 네 잘못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일이다. 너무 당연하게도 나는 이 문장을 쉽게 쓰고 싶지 않았다. 너무 쉬운 위로는 때때로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말은 진부해 보여도 필히 다시 말해져야 한다. 네 잘못이 아니다. 적어도 전부 네 잘못은 아니다. 네가 약해서 이 자리까지 온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상처를 회복하려 멈추었고, 그사이 세상은 네가 다시 달릴 수 있는 곳을 너무 빨리 치워버렸다. 안타깝게도 그렇다고 해서 삶이 저절로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구조를 이해했다고 내일 아침 곧바로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거창한 희망을 노래할 생각은 없다. 다만 A가 인생 전체를 한 번에 되돌리려 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 하루를 전부 구하려 하지 말고, 하루의 지켜져야 할 원칙 하나만 다시 세워도 좋다 생각한다. 제시간에 밥 한 끼를 먹고, 화면을 조금 늦게 켜고, 한 페이지를 읽고, 한 줄을 쓰고, 한 통의 메일을 보내는 것. 비록 그것이 초라해 보여도 다시 달릴 수 있는 트랙을 만드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슬프지만 세상은 당신에게 너무 빨리 결과를 요구한다. 하지만 회복은 원래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 리듬의 문제이다. 그러니 아직 제자리에 멈춰 있다고 느끼더라도, 그 시간이 곧 너의 무가치함을 뜻하지는 않음을 기억하라. 너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너무 오래 스스로를 채찍 질 힌 사람일 수 있다. 채찍질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걷는 법보다 주저앉는 법에 먼저 익숙해지게 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가혹한 채찍질이 아니라 다시 발을 디딜 수 있는 작고 단단한 발판이다. 당연하지만 그 바닥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단단해야 한다. 숨은 이미 한 번 돌아왔고, 상처는 아직 다 아물지 않았더라도, 사람은 그렇게 다시 조금씩 자기의 리듬을 되찾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도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누군가의 멈춤을 성급히 해석하지 않는 것.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보다 얼마나 아팠는지를 먼저 헤아려보는 것. 돌아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돌아올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보는 것. 그 생각이야말로, 지금 이 사회가 너무 오래 잊고 있었던 최소한의 다정함일지 모른다.